통합을 통해서도, 즉 일정 정도의 적응 단계를 통과한 후에도 사회는 지금까지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은 ‘통합’에 대한 서사가 보장해 주는 거짓 확신이다.
그런데 이런 오해는 어디에서 생겨날까? 사회적 다양성이 여러 문화와 종교의 수집이라고 믿는 데서 생긴다. 사회의 다양성이 단순히 더함으로써 생긴다는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것이 있고, 이것이 고유한 토착적인 것이며, 기존 토착 문화에 새로운 무언가가 단지 추가될 뿐이라는 생각이다.

다원화는 새롭게 오는 사람들만 바꾸지 않는다. 다원화는 이미 그곳에 있던 사람들도 변화시킨다. 다원화는 단순한 더하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원화는 관련된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의미를 물어야 하는 당연함은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모든 문화에서 외부의 관점은 내부 관점의 부분이 된다. 언제나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는 외부의 관점. 이는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다른 것을 믿을 수도 있으며 다르게 살 수도 있는 외부의 관점을 말한다. 이 외부의 관점이 오늘날 모든 정체성, 모든 문화의 필수 부분이다. 외부의 관점은 이제 내부의 관점의 부분이 되었다.

민족이라는 주도 문화의 확립은 패권을 다시 세우려는 시도다. 그러나 패권이 없다면, 그리고 자기 주도권이 흔들린다면 패권을 위해 먼저 싸워야 한다. 당연함의 상실은 말하자면 ‘정상성’의 상실이기도 하다. 이 말은 ‘정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이상 제시하거나 묘사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정상성’을 정의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거대한 사회 권력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정상성, 당연함은 단지 그 정상성의 형태가 통용되는 집단에 소속된 이들만을 위한 가치다. 다른 이들에게 정상성은 정상이 아니다. 정상성은 배제의 역학이자 제외의 역학이다.

동질 사회가 우리의 완전한 소속을 약속했다면, 그러니까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어 주고 우리에게 완전한 정체성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면 지금은 그 반대로 말할 수밖에 없다. 이질 사회, 다원화 사회, 다양성의 사회는 사람들이 이 사회에 더는 온전하게, 직접, 당연히 소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질 사회는 또한 우리가 더 이상 같은 종류의 자아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예전처럼 같은 종류의 우리로 구성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온전하지 않다.

다양성은 기분 좋은 공존이 아니다. 단결? 존중? 현수막에서 보이는 병존은 현실의 한 모습이지만 동시에 주술이기도 하다. 이 상황을 모든 이들이 수용하기를, 이 상황이 평화롭기를 바라는 주술.
다원화를 위한, 혹은 다원화를 방지하는 만병통치약이 있다는 생각도 이런 주술에 속한다.

민족 형상은 군주제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군주제와는 달리 민족 형상이 만드는 중심은 한 인격에 고정되지 않는다. 어떤 개인도 절대로 민족 형상을 체현하거나 실제로 현실화하지 못한다. 민족 형상 안에서 단지 다시 재인식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여성 운동이 성공적으로 보여 주었듯이 그 형상의 범위를 다시 설정할 수도 있다. 민족 형상은 변한다. 그러므로 민족 형상은 사회 전체를 실제로 체현했던 군주처럼 빈자리를 채우지 못한다. 이런 관점에서 민족 형상은 민주주의의 중심에 있는 빈자리를 완전히 채우지 못한다. 단지 덮어 주고 가려 줄 뿐이다.

1세대 개인주의에서는 주체의 변화가 중요했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교육 기관들을 통해 수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관들은 주체를 변화시키려고 했고, 대부분 규율을 통해 작동했다. 이와 반대로 1960년대 이후 출현한 2세대 개인주의에서는 성별이나 성적 지향성같이 자신의 정체성을 위해 본질적으로 선택된 특징과 함께 주체를 바꾸지 않는 게 중요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본질적으로 개인의 표현이 중요했고, 중요하다. 이와 반대로 3세대 개인주의(다원화 개인주의)는 개인의 분열, 우연성의 경험, 불확실의 경험, 원칙적인 개방성 등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3세대 개인주의는 우연이라는 요소가 심장으로 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연성에 대항하는 데서 생명을 얻는 정체성의 심장에 바로 이 우연성이 들어왔다.

다원화는 우리 각자 안에 자리 잡은 다양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개인들에게 다원화가 미치는 의미를 번역한다면, 감소된 정체성이다! 오늘날 우리는 더 작은 자아다. 왜냐하면 우리는 작아졌고, 우리는 더 이상 당연한 우리가 아니며, 의문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은 자아이며, 오늘날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정체성은 언제나 우리와 완전히 다른 정체성에 연결된다. 우리는 오늘날 어쩔 수 없이 외부의 관점을 내면의 관점으로 포함시켜야 한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묻는 내면의 관점이다. 우리는 당연함이 축소된 자아다. 우리는 정체성의 프레카리아트(Precariat, 불안정하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Precario와 노동자를 뜻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합성어로 저임금, 저숙련 노동에 시달리는 불안정한 노동 계급을 가리킨다.)로 살아간다. 프레카리아트처럼 안정되고 고정된 관계에 비해 더 많은 노동을 요구받는다.
이것은 더 작은 자아가 되기 위해 더 많은 수고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다원화된 개인주의가 낳은 모순된 결과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다름이 동등하게 만날 수 있는, 추상적이지 않은 만남의 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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