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날이 오락가락하더니 오늘 아침까지 내리던 비가 그치고 파란 하늘을 보니 울적했던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나는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구나 싶었다.
지난 주 일요일에 산책 나갔다가 아파트 근처에서 발견한 꽃나무들. 참 화사하니 이뻤다!
지지난주에 마트 근처에 갔다가 생선 구이 정식 집을 갔다.
사진에서도 느껴지겠지만 요사이 밖에서 먹은 밥 중 가격 대비 가장 만족스러웠다. 옆지기도 엄지척을 했다. 인당 14,000원인데 남는 게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반찬도 정갈하니 괜찮았고...
고등어랑 삼치를 하나씩 시켰는데 진짜 배부르게 잘 먹었다.
이건 지난 주말에 먹은 삼겹살 집. 원래 가려고 했던 삼겹살 집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냥 다른 곳으로 갔다.
개인적으로 웨이팅은 못하겠더라. 아무리 맛집이더라도.
고기를 너무 좋아하는데 이제 물가가 너무 올라서 밖에서 먹기는 어렵지 않나 싶다. 그래도 반찬들이 많아서 고기 3인분으로 끝났으니 망정이지^^;;;
낮에 산책을 하며 찍었다. 올 봄 산수유를 놓치지 않고 지나가서 다행이다.
현재 이런 책들을 읽고 있다.
세계철학사 1권은 고대, 중세 시기 지중해 세계를 중심으로 나타난 철학자들을 다룬다.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 '로고스(이성)'에 대한 개념은 서양 철학의 원형을 담고 있다. 두 사람의 사상은 다른 듯 보이지만 결국 그 기반은 같다고 봐야 한다. 개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학문 분류는 오늘날에도 그 기반이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라 놀라울 따름이었다. 반면 생물학적인 성과 가부장제에 기반한 역할 정의는 역시 읽다 보면 갑갑해질 수밖에 없다.
자연철학자들은 오랜만에 읽어도 재밌었는데 '데모크리토스' 이외에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일원론이 아닌 다원론으로 세상을 바라보려고 했던 것이 아무래도 내게 공명을 주는 것 같다.
플라톤 철학 전체를 관류하는 문제의식은 ‘가짜‘에 대한 경계심과 그 반면으로서 진짜를 가려내려는 열정이었다. 그의 사유는 가짜가 판을 치는 그리고 오히려 진짜는 핍박받는 현실에 대한 의구심과 환멸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유는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려는, 사물들에 상이한 존재론적 위상을 부여함으로써, 달리 말해 사물들을 존재론적 위계(ontological hierarchy)에 따라 분류함으로써 진품을 가려내려는 열망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의 사유 전체는 모방(‘미메시스‘) 개념에 의해 추동되고 있으며, 모든 구별, 평가의 기준으로서 제시된 것이 바로 이데아 개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데아를 얼마나 잘 모방하고 있는가가 그 사물의 존재론적 위상을 판별할 수 있게해주는 기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이 보기에 사람들이 사물들의 실재, 진상(眞相)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들이 감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 P341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은 질료 및 시간과 떼어서는 의미를 상실하는, 플라톤의 형상과 성격을 달리하는 실체이다. 그러나 현실태로서의 형상이 잠재태로서의 질료를 이끌어가는 목적론적 구도는 그가 결국 플라톤을 잇고 있다는 점을 다시한 번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고 있는 세계는 형상과 질료가 오로지 형식적으로만 구분되는 이원적 일원의 세계이며, 질료의 잠재성을 형상이 이끌어가는 목적론적 세계이다. 그리고 이런 존재론은 무엇보다 생명체들의 세계에서 두드러지게 확인된다. 그의 존재론은 근본적으로는 플라톤을 잇고 있지만, 보다 경험주의적이고 유기체주의적인 색채를 통해서 새롭게 재구성된 플라톤주의인 것이다. - P440
자연철학들의 기본 논리는 다음과 같다.
1. 세계를 이루고 있는 실재는 영원하고 자기동일적이고 순수한 존재‘들‘이다.
2. 이 존재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관계 맺음‘으로써 무/부정 및 타자성을 매개해 운동함으로써 우리가 보고 있는 이 현상세계가 성립한다. - P148
엠페도클레스는 다원론을 시도한다. 영원한 것이 단지 하나(일자)가 아니라 넷이 된다. 다른 모든 것들은 이 넷으로부터 나오고 넷으로 돌아가지만, 이 넷은 영원한 동일성이다. - P150
아낙사고라스의 생각은 정신이라는 것이 따로 설정되고 그것이 이 우주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 P173
데모크리토스는 아르케로서 원자들(atomata)을 제시한다. 각각의 원자는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와 같지만, 원자들‘은 다자를 형성하며 또 운동한다. 데모크리토스의 사유 또한 포스트-파르메니데스적 사유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들을 "어떤 것(to den)", "꽉 찬 것(to naston)", "있는 것(toon)" 등으로 부른다. 그리고 일자와 마찬가지로 이 원자들도 우리의 감각을 벗어나는 존재들이다. - P177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1~2부는 많이 어려워서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었는데 그나마 3부는 기존에 읽었던 내용들이 많아서 역시 이해하기가 더 쉬웠던 것 같다. 페미니즘의 역사, 사이보그에 대한 이야기, 맥락적으로 세계를 보는 방법에 대해서까지 읽었다. 이제 어느덧 마지막 장을 남겨두고 있다.
‘우리‘는 픽션 읽기라고 일컬어지는 고도로 정치적인 실천을 통해 생산된 포함과 배제, 동일시와 분리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누구에게 설명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읽기 자체 속에서 생산된다. 모든 읽기는 잘못된 읽기이자, 다시 읽기이며, 편파적인 읽기이자 강제적 읽기이며 상상된 텍스트의 읽기이기도 하다. 텍스트는 원래부터 궁극적으로 그냥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세계가 원래부터 무너져 있었던 것처럼, 텍스트는 이미 언제나 서로 경합하는 실천과 희망으로 뒤엉켜 있다. - P224
인종, 젠더, 자본은 전체와 부분에 대한 사이보그 이론을 요청한다. 사이보그에게는 총체적 이론을 생산해 내려는 충동이 없지만, 경계 및 경계의 구성과 해체에 대한 개인적 경험은 있다. 파급력 있는 행위를 위해, 과학기술에 대한 하나의 관점과 지배의 정보과학에 도전하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할 정치적 언어가 되기를 기다리는 신화 체계가 있는 것이다! - P327
상황적 지식은 지식의 대상이 텅빈 스크린, 토대, 자원이 아니라 행위자이자 행동가로서 형상화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며, ‘객관적인‘ 지식에 실린 고유한 행위자성과 저자성으로부터 변증법을 차단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형상화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요구한다. - P359
페미니즘의 역사를 읽을 때마다 마주하게 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은 이제 좀 읽을 때가 된 것 같다. 특히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엥겔스는 계급과 국가 사이의 매개적인 구성체로서 가족을 최우선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성별의 구분을 분리하여 고려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적대적인 구분에 포함시켰다[카워드(Coward), 1983]‘ 가족 형태의역사적 다양성과 여성의 종속이라는 문제의 중요성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연스러운 이성애를 토대로했기 때문에 섹스와 젠더를 역사화할 수 없었다. - P238
그리고 읽고 있는 원서들.
도스토옙스키 전집도 이어서 읽어야 하는데... NOON 세트를 더 빨리 읽을 것 같았지만 역시나 동시다발적으로 읽는 책들이 많다보니 쉽지가 않구나. NOON 세트는 도스토옙스키의 백야와 추리소설들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눈 깜짝할 새 3월 말이 다 되어 간다. 주말에 책을 몰아 읽기는 하는데 쑥쑥 읽히지는 않아서 간혹 졸기도 하고 안되겠다 싶으면 눈도 붙이고, 드라마도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