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저녁에 진교역(陳橋驛, 하남성 봉구현 동남쪽)에서 유숙하는데, 장사(將士)들이 서로 더불어 모의하여 말하였다.
"주상은 어리고 약하여서 우리들이 죽을힘을 내어 국가(國家)를 위하여 적(賊)을 깨뜨려도 누가 이를 알아주겠는가! 먼저 점검(點檢, 조광윤)을 세워서 천자로 삼는 것만 같지 아니하며, 그런 다음에 북방정벌을 하자."

조서를 내려서 천하를 소유한 호칭을 정하여서 ‘송(宋)’이라고 하였는데, 관장하고 있는 절도(節度)의 주명(州名, 귀덕절도사의 치소는 송주) 때문이었다.

국운(國運)을 정하여 주(周)의 목덕(木德)을 받아서 이어서 화덕왕(火德王)으로 하고 색깔은 붉은색을 숭상하게 하였으며, 납제(臘祭)는 술(戌)을 썼다.

요인(遼人)이 체주(?州, 산동성 혜민현)를 침범하자 자사인 하남(河南) 사람 하계균(何繼筠, 921~971)이 뒤쫓아서 그 무리를 고안(固安, 하북성 고안현)에서 깨뜨리고 말 400필을 얻었다.

야율노호는 태조의 셋째 아들인데 성격이 잔혹하였지만, 서로(舒?, 述律) 태후가 그를 아주 아껴서 태종(太宗, 야율덕광) 시절에 세워서 황태제로 삼고 천하병마대원수를 겸하게 하였다. 태종이 난성(欒城, 하북성 난성현)에서 죽고, 영강왕(永康王, 야율올욕)이 진양(鎭陽, 항주의 치소)에서 즉위하니 이 사람이 세종(世宗)이며, 태후는 야율노호를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치게 하였다.
군사가 실패하니 대신인 야율오진(耶律烏珍, 옛 이름은 야율악질)이 야율노호를 마주하고 죄를 헤아리며 지독하고 포학하여 인심을 잃은 것을 헤아리니, 태후는 응답할 것이 없었고, 군사는 드디어 풀어졌다.

시신(侍臣) 가운데 군사가 주(周)에 패하여 삼관(三關)에서 땅을 잃은 것은 계책이 아니라고 추가로 허물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요주가 말하였다.
"삼관은 본래 한(漢)의 땅이니 지금 다시 그들에게 돌려주었는데, 무엇을 잃었는가?"
그가 나라의 일을 걱정하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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