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 더미는 매우 풍성해 보이리라 기대했지만, 사실은 늘 불안을 던져 주었다. 그 자리를 지날 때마다 썩어 버린 것들을 적게는 열 개에서 많게는 20~30개까지 골라내야 했기 때문에, 그 앞에서는 존경의 마음 대신 신중한 눈길이 필요했다. 그 살구 더미는 이제는 더이상 어머니가 살지 않는 그 집에 있던 어머니의 나무에서, 새로운 소란이 한바탕 시작되려던 여름에 따온 것이었다. - P16
어제는 퇴근하고 나서 생각지도 않았던 전화를 받았다. 'xxx 여사'. 어머니였다.
(저 이름은 누가 보면 그저 어떤 아는 어른을 존칭하여 적은 건가보다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란 사람은 원래 그렇게 멋대가리가 없다. 주소록에 애칭이나 별칭으로 저장한 이름은 단 하나도 없는 것을 보면.)
'뭔 일이지?' 하며 역시나 시큰둥하게 전화를 받았다.
(늘 생각은 전화를 자주 하자 생각하지만 거의 잘 되지 않으며 전화를 받을 때 제발 상냥하게 대하자 생각하면서도 또 그게 잘 안 된다.)
어머니는 김치를 담갔다고 하셨다. 그제서야 "아..." 이 무렵이 김장 시즌임을 인식했다. 그리고는 불현듯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어머니께서 김치를 담갔다며 가져가라고 하셨던 일이 떠올랐다.
"저희 김치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두 사람이라 김치를 많이 먹지도 못하는데..."
이번엔 조금 담갔다며 극구 가져가라고 하신다. 아버지께서 꼭 가져갔으면 한다고 덧붙이셨다. 그러면서 여동생은 벌써 김장을 일부 가져갔다고 한다.
"네. 알았어요." 일부러 담아 놓으시고 전화까지 하셨는데 안 가져가는 것은 아닌 것 같아서 그렇게 답했다.
오늘 옆지기가 퇴근하면서 김치를 친정집에 들렀다 가지고 왔다. 조금 담았다고 하더니 비닐 봉지에 한 가득이다. 문자로 답신을 했다. "잘 먹을게요."
우리는 우리가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지만, 종종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사랑하라고, 미워하라고, 두 눈으로 보라고 혹은 눈을 감으라고. 종종, 아니 매우 자주, 이야기가 우리를 올라탄다. 그렇게 올라타서, 앞으로 나아가라고 채찍질을 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알려 주면, 우리는 아무 의심 없이 그걸 따른다. 자유로운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이야기에 질문을 던지고, 잠시 멈추고, 침묵에 귀 기울이고, 이야기에 이름을 지어주고, 그런 다음 이야기꾼이 되어야 한다. - P15
1장 '살구' 편을 읽으며 아무래도 어머니를 생각했고 김치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내 어머니는 20 여년 전 뇌졸중이 와 몇 년을 고생하셨다. 투병 생활 이후 곱고 아름다웠던 어머니가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게 서글펐다. 그래도 살아 있음에 감사하기는 했지만...
어머니의 경험을 한 번 경험하고 나서 몇 년 뒤 아버지가 비슷한 상황이 되었을 때 나는 조금 더 담담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그건 아마 내 머리가 더 자란 탓도 있지만 한 번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알츠하이머와 치매가 이제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기억을 잃는다는 게 생각만 해도 무서워 저만치 뒤에 떼어 놓으며 살고 있다.
동화의 상황은 극단적인 것이 많아 어릴 때 잘 읽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왜 계속 사람들에게 구전되고 읽힐까 궁금했다.
동화는 문제에 관한 이야기, 문제에 휘말렸다가 그것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문제 상황은 무언가 되어 가는 여정에서 꼭 거쳐야만 하는 단계인 듯하다. 온갖 마법과 유리로 만든 산, 집채만 한 진주, 한낮처럼 아름다운 미녀, 말하는 새, 잠시 뱀이 되어 버린 왕은 부수적인 것일 뿐이다. 대부분의 이야기에 담긴 핵심은 역경에서 살아 남는 일, 세상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는 일, 자기 자신이 되는 일이다. 어려움은 늘 필수 사항이지만, 거기서 무언가를 배우는 건 선택 사항이다. - P27
세상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는 일, 자기 자신이 되는 일이라니 그렇게 생각하니 동화가 다르게 보인다.
같은 상황을 마주하더라도 그 안에서 배울 수도, 배우지 못할 수도 있음을 인지해야 하겠다.
불안한 상태의 그 살구 더미는 내게 떨어진 임무인 동시에, 어린 시절부터 내게는 거의 아무것도 주지 않았던 어머니가 남긴 나의 상속권, 동화 속의 유산처럼 보였다. 그건 가족 나무에서 따낸 과일 더미이자 마지막 수확이었고, 동화에 등장하는 마법의 씨앗, 알 수 없는 방의 문을 여는 열쇠, 귀신을 불러내는 주문처럼 수수께끼 같은 선물이었다. 살구를 병이나 깡통에 담거나, 퇴비로 만들거나, 얼리거나, 그냥 먹어 버리거나, 술을 담그는 일은 동화에서 요구하는 임무와 거리가 멀긴 했다. 살구는 내가 풀어야 할 수수께끼, 거의 모든 일이 잘못 풀려나가던 이후의 열두 달 동안 내가 그 의미를 찾아야 할 이야기였다. - P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