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전투에서 기관총 중대장 최인걸(崔仁傑)의 용맹한 이야기는 다시 들어도 감동이다. 그는 사수가 죽자 제 몸에 기관총대를 묶어서 쏘았다. 그렇게 쏘다가 기어이 탄환이 바닥나자적탄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전쟁터에서 충실히 자기 임무를완수하고 세상을 떠난 장렬한 죽음이었다. 김상하(河). 그는 아직 어린 소년인데 교전 중 얼굴에 총상을 입었다. 왼쪽 뺨이 찢어지고 아래턱이 깨어져 선혈이 낭자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악이 돋았다. 눈에서 불꽃이 활활타올랐다. 윗도리를 홱 벗어 던지더니 혼신의 힘으로 수류탄을집어 던졌다. 나중엔 죽은 전우의 몸에서 수류탄을 벗겨내어던지고 또 던졌다. - P613
1920년 경신년 10월 21일. 그날 늦은 아침부터 26일 꼭두새벽까지 무려 6일 동안을 격렬하게 싸웠던 청산리 독립전쟁. 그눈부신 혈전(血戰)의 막은 서서히 내렸다. 청산리 전투는 오로지 우리 겨레의 단합된 힘으로 제국주의 외세 일본의 정규군대 공격을 통쾌하게 무찌른 그야말로 청사(靑史)에 길이 빛날대승리였다. 청산리 일대 여러 골짜기에서 여러 날 동안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로 군정서 사령부에서는 일본군 1,600명이 죽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중국 측 보도는 ‘2,000명 사망‘이라고 했다. 용정 일본영사관 비밀보고서는 가노 연대장 이하800명이 전사했다고 축소발표했다. 독립군 측은 200여 명이죽거나 다쳤다. 그 무엇보다도 군정서부대와 홍범도의 연합부대가 서로 힘을 합쳐 막강한 왜적을 쳐부순 것이 가장 큰 성과요 감격이었다. 이날의 패배가 너무나 창피하고 면목이 없었던 아즈마는 독립군의 숫자를 무려 세 배나 불려서 거짓보고를했다. - P629
1920년 경신년 10월 5일부터 11월 23일까지 간도 일대에서왜적에게 무참히 학살된 무고한 조선인 동포는 그 수가 어림추산으로 무려 3만 명이 넘는다. 훈춘, 화룡, 연길, 왕청과 기타남만, 북만 등지에서 체포된 사람은 5,000명이었고, 6,000호의동포들 살림집이 부서지고 불탔다. 학교는 50여 개소, 양곡 손 - P647
실은 4만 5,000석 등이다. 피해추산 총액은 187만 8,600원으로 집계되었다. 이는 오로지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당한 놈들의패전 분풀이였다. 곳이였다역사는 이를 일러 ‘경신년대참변‘(庚申年大慘變)이라고 적었다. 다른 말로는 ‘간도대학살‘이라고 한다. 왜적은 놈들의 여러공식적 기록에서 ‘간도사변‘ 혹은 ‘간도토벌‘이라고 기록했다. 완전 무방비의 일반 서민들을 대상으로 마을마다 찾아다니며총과 칼로 공격하여 집단으로 살상했던 대표적인 제노사이드(genocide), 즉 한국인에 대한 집단학살극이었다.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당한 것에 대한 화풀이를 그렇게 광기에 차서 서슴없이 자행했던 극악무도한 복수극이었던 것이다. - P648
조선민중의 항일 무장투쟁 기본 전선은 바로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의 국경지대였다. 그 주력부대가 바로 홍범도 장군을 위시한 여러 지도자들이 이끌던 대한독립군이다. 하지만 당시 대다수 독립군 수령들은 공명심과 소영웅주의, 영도권 독점의 야심 등등 마음속에 도사린 헛된 욕망들 때문에 - P660
제대로 된 연합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오직 단독행동으로 무언가를 펼치려 했다. 이것은 우쭐거리는 소영웅주의에 불과했다. 독립군 수령들은 대개 자기네 관할로 일정 구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영토 안에 거주하는 동포들을 대상으로 여러 사업을실시했다. 군중문화 사업에 아동교육 사업에 후생 사업에 웬만한 민사사건은 물론이요, 강도 일제의 밀정 침투를 막는 방첩사업까지 모두 독립군 부대가 맡아서 처리했다. 그런데 사업은여기서 끝나지 않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함부로 휘둘러서 말그대로 봉건 영주를 닮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경우도 적지않았다. 이것은 그들의 일그러진 공명심과 자기과시, 우쭐거림,개인적 탐욕, 터무니없는 야심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홍범도 장군만이 이러한 지방세력을 전혀 갖지 않았다. 단한 가지 빛나는 경력인 항일투쟁 사례 하나만으로도 그 신망은다른 어떤 지도자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크고 우뚝194했던 것이다. - P661
일본군 토벌대와의 그토록 치열한 전투에서도 모진 목숨이용케도 이날까지 잘 버텨왔다. 그런데 살벌한 러시아 땅 자유시의 한구석에서 같은 핏줄을 나눈 동족들에게 어이없이 목숨을 잃었으니 이처럼 원통한 일이 또 어디 있는가. 홍범도 장군은 부하들과 함께 다니며 죽은 병사의 시신을 일일이 수습하고외곽지 한곳에다 큰 구덩이를 파서 묻었다. 이 궁핍한 시기에염습인들 제대로 할 수 있었겠는가. ㅇㅂ그저 길게 파놓은 흙구덩이에 한 줄로 시체를 가지런히 눕혔다. 그러곤 그 위에 하얀 광목천을 덮고 그대로 흙을 덮었다. 매장을 끝낸 다음 홍범도 장군은 가까운 언덕 솔밭 속으로 들어갔다. 비 맞은 소처럼 크게 흐느끼는 통곡 소리가 들렸다. 무릎 꿇고 엎드려 땅을 치며 우는 홍 장군의 슬픈 울음이었다. - P712
1941년 봄 최진동이 일본군 정보기관의 호출을 받고 그곳을다녀온 뒤로 그는 일본군의 노골적인 협조자로 변신했다. 점차확고한 신임까지 얻어 당당하게 일본 여행도 다녀왔고, 일본방문길에는 내각대신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1884~1948)를 접견했다. 도조란 놈은 최진동의 손을 잡고 "그대는 대일본제국의 모범적 신민"이라며 "잘 부탁한다"는 칭찬과 부탁의 말만 자꾸 되풀이했다. "천황폐하가 그대를 높이 평가하신다"는 말로추켜세우기도 했다. 최진동은 그로부터 삶의 가치관과 방향성이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그의 일본행은 시종일관 일본 측의극진한 환대 속에서 우호와 친선의 분위기로 이루어졌다. - P732
그로부터 최진동은 완전히 일본을 위한 충성파로 변신했다. ‘일본군 간도성 선무부 도문본부 정보계 경리‘가 왕년의 독립군이었던 최진동의 명함에 표시된 공식적 직함이었다. 혹시라도 남아 있을 조센징의 항일역량을 철저히 감시하고 그것을 아주 뿌리 뽑는 역할을 충직하게 수행하고 다녔다. 자기 휘하에배정된 200~300명가량의 특무 밀정을 운영하며 미친 듯이 항일독립군 전력자들을 잡아들였다. - P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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