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 칸 제국의 약점은 쿠릴타이의구성과 기능이 명확하지 않아 후계자 선출에 불안 요소가 많다는 점이다. 이 정권은 세계 제국이 된 뒤에도 여전히 부족공동체 분위기에 머물러 있었다. 오는 강 유역에서 유목하던 시기에는 그것이 소박하고 평화롭게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중국과 이슬람, 유럽의 문명지역까지 뻗어나간 나라가 된 이상, 이제는 그것이 통하지 않는다. - P189

삼경요패(三京撓敗, 삼경, 즉 개봉, 낙양, 귀덕 등에서 크게 패한 것-옮긴이)의 전쟁은 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전쟁이었다. 남송군이 출병만 하지 않았어도몽골군은 남하할 의사가 없었다. 원호문의 ‘불수과채주공(不須誇說蔡州功, 채주의 공적을 자랑하지 마라)‘이 사실로 나타났다. 다만 이 경우에는 몽골군이 춘추의 진나라가 되어 곡과 우를 집어삼킨 것이 아니라 남송 쪽에서 먼저 싸움을 건 것이다.
사가들은 범규의 출병론을 ‘부인(婦人)의 모사(事)‘, 전자재의 행동을
‘어린애의 장난‘이라고 평하고 있다. 현대 여성이 들으면 화를 낼지도 모르나 당시 사람들은 부녀자나 할 짓이라고 어이없어 했다.
이듬해 몽골군은 남하를 개시했다. 맹약을 어기고 개봉과 낙양으로군사를 진격시킨 남송을 힐책하는 출병이었다. 그 후 수년에 걸쳐 남송과 몽골의 싸움이 계속되었다. - P207

이미 원(元)이라 칭한 몽골이 남송을 공격하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양양(襄陽)이었다. 남송이 양양을 확보하고 있는 한, 원은
‘함부로 군대를 진격시킬 수 없었다. 뭉케의 명령으로 쿠빌라이가 남하했을 때도 양양을 공략하지 않고 악주까지 진출했기 때문에 몽골군은 살얼음을 밟는 느낌이었다.
쿠빌라이는 이번에는 양양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대원이라는 국호를 세운 지 2년 뒤인 지원 10년(1273) 정월, 원군은 마침내 번성(樊城)을 함락했다. 이로써 양양의 운명은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양양성은 고립되어 쉴새 없이 긴급사태을 알렸으나, 재상 가사도는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수장 여문환(呂文煥)은 성내를 돌 때마다 남쪽을향해 통곡했다고 한다. 더는 손 쓸 방법이 없었다. 마침내 쿠빌라이의 항복 권고문이 도착했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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