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 칸의 팽창은 금나라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속도로 일어났다. 대책을 강구하려고 해도 사태는 시시각각 변했다. 어쩌나, 어쩌나 하는 동안에 이미 대책을 강구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금나라는 여러 유목 부족에게 경계의 눈길을 보냈으나, 칭기즈 칸 같은 전쟁의 천재가 출현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천재는 상상을초월하는 것이므로 금나라의 정책이 잘못 되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않다.
오는 강가에서 쿠릴타이를 연 뒤, 칭기즈칸은 전체 몽골 민족의 조직을 개조했다. 목가적인 동족 공동체였던 것을 철저하게 군사적 집단으로 - P137

다시 편재한 것이다. 10호, 100호, 1천 호, 1만 호라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행정단위이면서 동시에 전투단위도 되었다. 여진족의 맹안이나 모극과 비슷하다. 몽골족은 자주 이동하기 때문에 이 조직은 특히 효과적으로 기능했을 터이다. 십호장(戶長), 백호장, 천호장, 만호장이 각각임명되었다. 만호장에는 칭기즈 칸이 신임하는 보르추, 무카리, 나야아가임명되었다. - P138

원호문은 120년을 이어온 금조에서 감히 비교할 자가 없는 시인일 뿐만 아니라 같은 시대의 남송을 포함해서 12세기와 13세기 중국 최고의시인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일 것이다.
태평성대였어도 그는 뛰어난 시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중국문학사에서 이렇게까지 위대한 존재로 만든 것은 역시 몽골의 침공이라는난세를 시로 읊었기 때문이다. 주제가 너무 엄청나면 시문이 받아들이기어렵다. 하지만 원호문의 시문은 처참한 시대의 모습을 훌륭하게 담아내고 있다. 청나라의익이원호문을 노래한 시 가운데 ‘국가의 불행은 시인의 행복‘이라는 구절이 있다. 조심하지 않은 표현같지만, 이 구절은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힘이 있다. - P149

요나라는 야율, 금나라는 완안 등 비록 성은 바꾸지 않았지만 동화된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금의 역대황제는 여진의 이름 외에 중국식 이름도 있었다. 그런데 몽골은 중국에 들어오기 전에 중앙아시아에서 서아시아에 곁쳐 이슬람 문화가 번영한 땅에 발을 들여놓았다. 인도에도 갔고 유럽에도 갔다. 그리스도교 문화권의 분위기도 맛보았다. 중국 문명을 접하기전에 그에 필적하는 몇 몇 문화를 접한 것이다. 이것이 몽골의 중국 문심취증을 막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 보면 그때까지의 정복 왕조도는 조금 이질적인 사람들이 찾아왔다는 말이 된다.
7년의 원정은 7년의 귀중한 유학이라고 할 수 있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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