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송은 금나라가 영유하고 있는 북쪽 땅을 회복하지 않으면 중화제국의 영예를 되찾을 수 없었다. 금나라는 남송이 지키는 회남 이남 땅을빼앗지 못하면, 경제적으로 균형이 잡히지 않은 결함 국가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두 나라 모두 북벌과 남벌이 국가의 기본방침이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두 나라 모두 그것을 이룰 힘이 없었기 때문에 마침내다시 강화를 맺었다.
국경선은 이전 소흥(금나라 황통) 화약과 똑같았다. 다만 해릉왕의 폭주와 거란족의 대반란 등으로 금 쪽이 조금 불리했다. 따라서 효종 건도(乾道) 원년(1165, 금나라 세종 대정 5년)에 맺은 새로운 화약은 남송에게 조금유리해졌다.
소흥 화약의 세공은은 25만냥, 비단 25만필이었으나, 건도 화약은각각 20만 냥, 20만 필로 줄었다. 더구나 이를 ‘세공‘이라 하지 않고 ‘세폐(幣)‘라고 불렀다.
소흥 화약에서는 두 나라의 관계가 남송이 금나라에 신종(臣從)하는것이었다. 건도 화약은 이를 ‘숙질(叔)‘ 관계로 고쳤다. 옛 화약에서 군신이었던 것이, 새 화약에서 숙부와 조카 관계로 개선된 것이다. ‘공(貢)‘
을 ‘폐(幣)‘로 한 것은 속국의 진공이 아니라는 의미다. - P101
육유를 흥분시켰다. 국가가 처한 상황이 바로 그것이다. 후세의 역사가가
‘남송의 최전성기‘라고 평가한 시대도 육유는 그것을 절반은 침몰한 시대로 받아들였다.
18애국 시인이라는 칭송이 자자한 그에게 한 가지 오점이 있지 않을까하여, 예부터 논란이 된 문제가 있다. 만년의 육유가 한탁주와 관계를 가졌다는 점이다. 광종이영종에게 황위를 계승할 때, 태황태후 오씨의 권세를 등에 업고 잠시 일했던 한탁주는 『송사』의 간신전」에 오를 만큼평판이 좋지 않은 인물이었다. 은퇴한 78세의 육유가 한탁주의 청으로출사한 것이 그의 경력에 오점으로 남았다는 것은 사견치고는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 P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