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노동축적과 여성의 지위하락

유럽에서 토지사유화는 15세기 후반에 식민지 팽창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그것은 거주자 추방, 지대 인상, 빚을 지게 하여 토지를 팔게 하는 국세 인상 등 다양한 형태를 취했다. 이것들을 모두 토지 수용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은, 폭력이 수반되지 않은 경우에도 토지 상실은개인이나 공동체의 의지에 역행해서 이루어졌고 이것은 생존기반의 파괴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토지 수용은 전쟁과 종교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특히 전쟁은 이 시기에 영토적·경제적 배치를 바꾸기 위한 수단의성격을 띠게 되었다. - P109

잉글랜드에서 토지사유화는 대개 "인클로저"를 통해 진행되었는데, 이 현상은 노동자의 "공동자산"cawealth을 박탈하는 것과 매우 깊은 연관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반자본주의 운동가들은 이것을 사회적 수급권에 대한 모든 공격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한다. 16세기에는 "인클로저"가 전문용어였다. 인클로저는 잉글랜드에서지주와 부농이 공동체적 토지소유를 제거하고 자신들의 토지보유를 확대하기 위해 이용한 일련의 전략을 가리켰다.28 그것은 주로 공동 경작제open-field system를 폐지하는 것을 의미했다. 공동경작제란 주민들이 - P111

토지사유화가 해방시킨 것은 노동자(남자건 여자건)가 아니라 자본이었다. 이제 토지가 생존의 도구라기보다는 축적과 착취의 도구로서 "자유롭게" 기능할 수 있게 되었기때문이다. 해방된 것은 지주였다. 지주는 직접고용의 경우에만 노동자가 생계유지 수단을 얻을 수 있게 함으로써 재생산 비용을 거의 다 노동자에게 떠넘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상업위기나 농업위기가 닥쳐와 일자리가 없어지거나 타산이 맞지 않으면, 전과 달리 노동자가 굶어 죽건 말건 해고해 버리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 P122

물가상승은 소농을 몰락시켰다. 그들은 소출이 생존에 불충분할 때는 곡물과 빵을 사느라 땅을 팔아야 했다. 물가상승은 자본주의적 기업가 집단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돈이 없으면 굶어죽어야 했던 시대에 농산 - P123

물 투자와 고리대금업으로 떼돈을 벌었다.
또한 가격혁명은 오늘날 세계은행과 IMF가 수행한 "구조조정"의여파로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서 나타난 것과 맞먹는 역사적인 실질임금 하락현상을 촉발시켰다. - P124

유럽에서 "이행"기는 여전히 격렬한 사회갈등의 시기였고, 국가가주도적으로 일련의 정책을 취하는 발판이 되었다. 정책들의 결과에서역으로 이 정책들의 주된 목적을 세 가지 정도로 추려볼 수 있다. 첫째,
더 잘 훈육된 노동력을 창출하는 것. 둘째, 사회적 저항을 분쇄하는 것.
셋째, 노동자들을 강요된 일자리에 묶어두는 것. - P134

인구위기와 경제위기는 1620~1630년대에 정점에 이르렀다. 유럽과식민지 모두 시장이 위축되고, 무역이 중단되고, 실업이 일반적인 것이되었다. 그리하여 한동안 발전도상의 자본주의 경제가 붕괴할 가능성도있었다. 유럽과 식민지의 경제적 통합이 진행돼서, 각지의 위기들이 서로를 빠른 속도로 상승·확대시키는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이는 최초의국제적 경제위기였다. 역사가들은 이를 17세기의 "일반적 위기"GeneralCrisis라 부른다(Kamen 1972 : 307ff; Hackett Fischer 1996:91). - P140

맑스는 출산이 착취의 영역이자 저항의 영역일수 있다는 점을 전혀 인정한 바 없다. 그는 여성이 출산을 거부할 수 있다거나 그런 거부가 계급투쟁의 일부분이 될 수 있다고 상상하지 못했다. 맑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1973 : 100)에서, 자본주의 발전은인구수와 무관하게 진행되는데, 그 이유는 노동생산성이 증가하는 덕에, "고정자본"(기계류 및 기타 생산자산에 투입된 자본과의 관계에서자본이 착취하는 노동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그 결과 "잉여인구"가결정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맑스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전형적인 인구법칙"(『자본』 1권 : 689ff)이라 정의한 이 동학은 출산이 - P148

순수하게 생물학적 과정이거나 경제변동에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활동인 경우에만 적용될 수 있고, 또 자본과 국가가 "여성들이 임신과 출산을 거부할까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을 때에만 적용될 수 있다. 맑스가 가정했던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상황이었다. - P149

중세 내내 여성은 주로 약초로 제조한 여러 가지 피임약을 이용했는데, 대개 생리주기를 바꾸거나 낙태를 유발하거나 불임상태에 이르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 역사가 John Riddle은 『이브의 약초 :서양 피임술의 역사』(1997) Eve‘s Herbs : A History of Contraception in the West 에서 다양한 약재와 각각의 기대효과를 광범위하게 서술하고 있다. 피임 관련 지식은 여성이 출산에 대해 일정한 자기통제를 확보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하지만 피임이 불법화되면서 여성들은 세대를 거쳐 전승되어 오던 이 지식들을 박탈당했다. - P150

비노동자 정의과정은 17세기 후반에 거의 완성되었고,
이에 대해서는 여성주의 역사학계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여성은 원래 그들만의 직업으로 여겨지던 맥주양조나 산파 일에서밀려나고 있었고, 여성고용에 대한 새로운 제한들에 묶이게 되었다. 특히 프롤레타리아트 여성은 최하층의 직업 말고는 일자리를 구하기가어려웠다. 여성 노동인구 3분의 1은 하녀였고, 나머지는 농장 일방적·뜨개질 · 자수. 보따리장사· 유모와 같은 일에 종사했다. - P151

계속되는 토지사유화와 더불어, 동업조합과 시정부의 이와 같은 동맹을 통해 새로운 성적 분업 또는 캐롤 페이트먼Carole Pateman(1988)의용어를 빌자면 새로운 "성적 계약"이 날조되었다. 이 새로운 성적 계약은 여성의 노동자로서의 지위를 은폐하는 어머니 • 아내·딸· 미망인과 같은 용어로 여성을 정의하는 한편, 여성과 그 자식들의 신체와 노동에 대한 무상이용권을 남성에게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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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새로운 성적 사회계약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 여성은 인클로저때문에 남성노동자가 상실한 토지의 대체물이자 가장 기초적인 재생수단이 되었으며, 또 누구나 뜻대로 전유하고 이용할 수 있는 공유재가 되었다. 스스로 매춘에 나선 창녀를 지칭하는 16세기의 "공유여성"(Karras 1989) 개념에서 이 시초축적"의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노동편성에서 (부르주아 남성이 사유화한 여성만이 아닌) 모든 여성이 공유재산으로 변했다. 일단 여성의 활동이 비노동으로정의되자 여성의 노동은 마치 공기처럼 누구나 마음껏 쓸 수 있는 천연자원으로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P157

마녀사냥의 시대에는 여성이 야만적인 존재로서 정신적으로 허약하고, 구제불능의 욕망을 가졌고, 반항적이고, 순종하지 않으며, 자기통제능력이없는 것으로 그려졌지만, 18세기가 되면 이것이 뒤집히게 된다. 이제여성은 수동적이고, 무성적이고, 남성보다 더 순종적이거나 더 도덕적이고, 남성에게 긍정적인 도덕적 영향을 줄 능력을 가진 존재로 묘사되기 시작했다. - P168

플랜테이션 체제는 대대적인 노동집결과 고향에서 뿌리 뽑히고 의지할 곳 없는 예속 노동력으로 공장제에 선례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노동비용 절감을 위한 이주노동과 지구화를 예견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특히 노예와 임노동자를 지리적·사회적으로 나누어 놓은 상태에서
"소비재의 생산을 통해 노예노동을 유럽 노동인구의 재생산에 통합시킨 국제분업의 형성에 결정적인 단계가 되었다. - P170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유럽 출신 노동자를 덜 쓰고 그들을 아프리카 노예들로부터 분리하기 위한 법안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인종적 구분선이 그어진 것은 18세기 말에 이르러서였다(Moulier Boutang 1998). 그때까지는 백인, 흑인, 토착민 간에 동맹의 가능성이 항상 존재했고, 본토에서건 플랜테이션에서건 유럽인 지배계급의 상상 속에 언제나 그러한 동맹에 대한 공포가 존재했다.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는 이런 공포를 잘 드러내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마녀의 아들이자 토착민 반란자인 캘리번과 먼 바다를 항해하는 유럽 출신 프롤레타리아트 트린큘로와 스테파노가 조직한 음모를그림으로써, 억압받는 자들의 치명적인 동맹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동시에, 프로스페로의 마법을 통해 지배자들 간의 불화가 치유되는 극적인 대조를 펼쳐 보인다. - P175

성차별과 마찬가지로 인종차별도 입법을 통해 제도화되고 강제되어야 했다. 흑인과 백인 간의성관계가 금지되었고, 흑인노예와 결혼한 백인여성은 비난을 받아야했으며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평생 노예로 살아야 했다. 1660년대에 메릴랜드와 버지니아에서 통과된 이 법령들을 살펴보면 인종차별사회는 위로부터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확인된다. 게다가 "흑인과 백인의 관계를 종식시키기 위해 종신노예화라는 처벌이 필요했다는 점은 그 관계가 얼마나 친밀했었는지를 보여 준다.
마치 마녀사냥의 대본을 따르기라도 한 것처럼, 새로운 법령들은백인여성과 흑인남성의 관계를 악마화했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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