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의 시대적 변화를 단지 왕조교체에서 찾았던 종래의 십팔사조사관에 대해, 나이토의 설은 시대상의 변화를 지적하고, 당·송 양 시대 사이에 성격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밝혀 중국사에서 당송변혁의 중요성을 학계에 인식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그의 설은 시대라는 그 자체를 완결된 개체로 보고 주로 문화사 중심으로 파악한 것으로, 한 시대에서 다음 시대로 나아가는 필연적 발전법칙에 의해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나이토의 학설은 교토 대학을 주무대로 삼아 많은 후계자를 배출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미야자키 이치업적이 주목할 만하다. 미야자키는 나이토 학설을 사회경제적인 면에서 보강하고, 나아가 중국사 이외의 아시아 여러 국가(이슬람과 인도를 포함)의 시대구분까지 고려하여 총괄적인 시대구분 속에서 송대의 시대성을 파악했다. 예를 들면 1950년 출판된 동양적 근세는 당말 변혁을 중세사회로부터 근세사회로의 변혁이라는 사회경제적 의미로 파악하면서송대를 유럽사의 르네상스기에 대비시켰다. 한편 도쿄 대학에서는 가토 시게시가 중국경제사의 개척자로서 견고하고 치밀한 실증적 연구를 진행했는데, 특히 당송시대의사회경제사 연구에 진력하였다. 가토는 시대구분론에 대해서는 극히신중한 태도를 보였는데, 『중국경제사개설支那經濟史槪說』(1944)에서 다음 - P17
과 같이 지적하였다. "전국진한은 물론 남북조 시대까지는 소작인이 그렇게 많지 않았고, 대관호족大官豪族의 대토지를 경작한 것은 주로 노복奴僕이었다. 균전법의 붕괴를 전후하여 농경에 노복을 쓰는 것이 쇠퇴하고, 소작인을쓰는 것이 유행했다. 대지주가 소유한 대토지, 즉 장원의 토지를 경작한것은 주로 소작인[전호佃戶]이었다. · 송대에는 노복을 경작에 쓰는일이 더욱 쇠퇴하고 소작제도가 점점 발달했다. 북송시대에 전국의자작농과 소작인의 비율은 대략 2대 1 정도 되었을 것이다." AP즉 노예노동시대에서 지주전호제로 이행한 시기를 당말오대로 설정하였기 때문에, 가토 역시 당과 송 사이에 변혁이 있었다고 본 것 같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마에다 나오노리前田典의 『동아시아에서의 고대의 종말』(1948)이 출판된 이래 중국사 시대구분을 둘러싼 논의는 더욱활발해졌다. 마에다의 설은 동아시아 역사를 일체로 파악하면서, 여러 민족의 역사발전에 대한 이해는 상호간의 연관성을 중시해야 하며, 중국사에서 고대사회의 종말은 당말오대 즉 10세기 전후였다고보았다. 이 마에다 설을 계기로 해서 이후 점차 중국사를 동아시아사의일환으로 보고 시대구분을 하려는 방향을 취하게 되었다. - P18
조보는 태조가 즉위한 다음 해인 961년(건륭 2)절도사에 대한 대책을 바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방진鎭(절도사)이 상당한 비중을 갖고 있는 것은 오직 황제의 힘이약하고 신하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들을 다스리고자 한다면달리 뾰족한 방책이 없습니다. 오로지 그들의 권력을 빼앗고 그들의전곡穀을 제어하고, 그들의 정병을 거두어들이면 천하는 자연히안정될 것입니다." - P28
송 초의 과거에는 제과科(경의과라고도 함)가 있었다. 진사과는 시부와 논 및 첩경 묵의로 시험을 쳤고, 제과는 경서經書·예서 사서. 등의 첩서 뮥의로 시험을 보았다. 시부란 시와 부시의 일종)를 짓는 것이고, 논은 논문이다. 첩경은 경서와 예서, 사서 등의 본문에서 앞뒤를 가린 채 한 줄만 드러내고 그한 줄 중에서 또 석 자를 감추어 감춘 글자를 맞추는 것이다. 묵의는경서·예서·사서의 작자 이름을 묻거나 이들 책에서 한 어귀를 뽑아그 문장 다음에 오는 문장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즉 시부 및 논은직접 작문을 하는 시험이고, 첩경과 묵의는 일종의 암기시험이다. - P26
인종 때의 진사과는 종래의 시부·논·첩경·묵의 외에 책策이 더해졌다. 책은 시무時에 대한 대책을 논하는 것이다. - P59
북송에서는 처음 화북관료가 권력을 잡았으나 이후 강남관료가 진출하여 북송 말에는 강남관료가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남송의 육유陸游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천성(인종의 첫 번째 연호) 이전에 인재를 뽑아 등용할 때에는 대부분북인을 뽑았는데, 구준이 이를 담당하였다. 그로 인해 남방의 사대부들이 울적해하였다. 인종이 그 폐해를 알고 널리 인재를 뽑아남북 간의 차이를 없앴다. 그리하여 범중엄이 오(강서江·소주蘇州)에서, 구양수가 초楚(강서江西·길주吉州)에서, 채양蔡襄이 민園(복건福建·홍화興化)에서, 두연杜이 회계會稽(절강浙江·소흥紹興)에서, 여정 이 영남(광동廣東·광주廣州)에서 일어나 한 시대의 명신이 되니 성송사람을 얻는데 ‘뛰어나다고 칭찬받았다. 그런데 소성(철종 친정 후의 연호)·숭녕(휘종의 - P63
연호) 연간에는 남인을 뽑는 일이 더욱 많아져 북방의 사대부가 다시울적해지는 슬픔이 있었다. 그래서 진관(휘종조의 명신, 복건·남검주사람이 홀로 그 폐해를 보고는 조정이 남인을 중시하고 북인을 업신여기면 국가 분열의 싹이 튼다고 말했다. 이는 천하의 지당한 지적이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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