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사 출신자들은 어느 정도 수준 높은 학문을 지닌 실력자가 많았다. 정관계에는 이처럼 귀족 출신과 진사 출신의 두 흐름이 있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전자가 주류였다. 실력을 가진 진사 출신자가 불만을 품은 것은당연한 일이었다. 모두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귀족 관료는 보수적이고진사 출신 관료는 현상을 변혁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다. 진사 출신 관료의 수가 늘자 그 세력을 배경으로 현상 타파를 부르짖는 진사 출신자가 나타났다. 수석으로 급제한 우승유 같은 사람은 정부의 실정을 지적하며 통렬한 공격을 가했다. 우승유에게는 이종민(李宗)이라는 동지가 있었다. 그들이 정부 요인에게 미움을 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헌종 때의 재상 이길보는 귀족관료였기 때문에 특히 우승유 등을 꺼려 요직에 앉히지 않았다. 아버지의 영향을 이어받은 이덕유(李德裕)도 목종(穆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을 적에 이종민을 검주자사(劍州刺史)로 좌천시켰다. 그렇지만그의 동지인 우승유가 대두하여 재상이 되었으므로, 이번에는 반대로 이덕유가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무종(武宗)이 즉위하여 이덕유가 다시 재상 - P303
으로 복귀하자 또다시 우승유 일당이 추방, 좌천되었다. 이런 일이 되풀되었으니 국가의 활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권이 바뀔때마다 그때까지의 방법을 파기했으며, 인사 면에서도 대신에서부터단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갈아치웠기 때문에 정치는 늘 하다 만 채여서정정(政情)도 매우 불안정했다. -> 우이당쟁 - P304
정부는 폭리를 취했다. 소금은 모두 정부의 손을 거쳐야만 유통되었는데, 이익이 많이 남는 물품이라 암거래가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부의 손을 거치지 않은 소금을 ‘사염‘이라고 불렀으며, 사염 판매는 말할것도 없이 불법이었다. 소금 전매제가 붕괴되면 당나라 왕조도 무너지므로, 사염 거래는 단속이 엄격했다. 한 섬(10말) 이상의 사염을 판 자는 사형, 한 말 이상 판 - P354
자는 장형(杖刑)으로 정해져 있었다. 단속이 심해지자 사염 판매인들도 그것에 대항하려고 했다. 관헌의 습격을 받더라도 그들을 격퇴할 수 있을 만큼의 무력을 갖추게 되었다. 목숨이 달린 일이었으므로 무장은 당연했다. 또 관헌의 단속 정보를 가능한 빨리 알아내야 했으므로 각지의 사염업자들은 서로 연락을 취하고있었다. 황소와 왕선지는 둘 다 사염판매인이었으니, 거병 전에 만난 적은 없다고 해도 서로 연락은 취하고 있었을 것이다. -> 왕선지와 황소의 배경 - P355
실력의 시대였다. 그것은 남북조 이후 이어져 온 귀족사회가 붕괴되었음을 의미했다. 무엇보다 문벌을 중시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성당(盛唐)이후, 문벌이 없는 인물이라도 진사에 합격하면 관계에서 활약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에 반발하는 감정이 우이(牛) 당쟁‘을 낳았다. 진사라고 해도 그렇게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려면, 드물게 예외는 있지만 여유 있는 집안에서 자란 사람이어야 했다. 당나라 초기, 건국의 원훈 가운데도 도적떼 출신자가 재빨리 귀족화했듯이 진사 출신 고관도 귀족화다. 하지만 당나라 말기는 문자 그대로 실력주의의 시대다. 실력이란 무력을 말하므로 ‘군벌의 시대‘라고 바꿔 말해도 좋을 것이다. - P386
세종은 오대 여러 제왕 중에서도 명군으로 꼽힌다. 오대의 제왕 중에서 내정에 많은 힘을 쏟은 사람은 후주의 세종 정도다. 개간, 치수, 강기숙정(正), 행정개혁, 군대 정비 같은 일에 정력적으로 몰두했다. 역사상 세종은 불교를 탄압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란(法難)‘이라고 불교 측에서 말하는 일종(一宗)이 바로 이 세종이다. 탈세와 병역 기피를 위해 출가한 승려를 환속시켜 생산적인 일에 종사시키는외에, 사찰의 토지를 몰수하고 불상과 범종을 회수하여 동전을 주조하는 경제적인 효과까지 생각한 폐불령이었다. - P407
후당에서부터 시작하여 후진, 후한, 후주를 섬겼고, 요나라의 태종(야율덕광)이 남하했을 때도 영입되어 입조했으므로, 이 인물은 다섯 조정에서 모두 재상으로 활약했다. 계산하는 방법에 따라 조금 차이는 있지만, 5조(朝), 8성(姓) 11군(君)을 섬겼다는 미증유의 기록을 가진 주인공이다. 예부터 풍도는 문제 있는 인물로, 칭찬과 비방의 낙차가 그만큼 큰 예도드물다. 오대는 남형(刑)의 시대여서 사람의 목숨을 지푸라기처럼 여겼다고 한다. 무슨 일이 있으면 쉽게 사람을 죽인 것이다. 그런데 정치의 무대에서, 그것도 재상으로서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 왕조가 바뀌어도 죽지 않고, 더구나 재상으로서 임용된 일은 기적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 P410
당말부터 오대에 걸쳐 완전히 몰락한 것은 귀족사회였다. 기록된 역사는 귀족과 귀족사회에 속해 있던 사람들의 움직임만을 보여 준다. 굵고뚜렷한 경계선이 있어서 그 아래에 위치한 비(非) 귀족층은 문헌에 전혀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귀족사회의 붕괴로 그 경계선이 허물어졌다.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아직 그 경계선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여러 번반복하지만 화응이 염사를 불태워 버린 것은 그런 의식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남당의 국주(國主)도 당당히 사를 지었다. 시는 읽는 것이지만, 사는 노래하는 것이다. 이 시대는 노래가 입을 통해서 나오는 상태였다. 아니면 그때까지 그들의 입을 막고 있던 것이 힘을 잃은 시대였다고 바꾸어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의 주제가 주로 사랑이라는 점도 그때까지 금기시했던 것이 불식되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귀족적 분식 대신에 서민적인 솔직함이 시대의 분위기를 물들이고 있다. - P434
문관정치가 확립된 것은 송대였다. 그 이전 오대는 무가정치라고 ㅎ수 있다. 오대 전의 당나라, 그리고 남북조는 귀족정치였다. 과거에 급제한 수재들이 문관으로서 정치의 본류를 형성한 것은 송나라부터다. 이체제는 20세기 청나라 말기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그 여운은 오늘날까지전해진다. 송나라의 숨결은 천년에 걸쳐 중국 산하에 살아 있다고 할 수있다. 우리가 송나라에 친근함을 느끼는 또 한 가지 이유는 건국에 피비린내가 적었다는 데 있다. 전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울 때는가공할 만한 유혈의 참사가 뒤따른다. 그런데 송의 경우는 뜻밖에도 조용했다. 술에 취한 동안에 황제가 되었다는 것은 약간 과장된 말이지만, 송나라 태조가 광포한 짓을 싫어한 인물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 P450
조이용이 요와 맺은 조건은 결국 영토는 그대로 두고 송은요에게 해마다 비단 20만필은 10만냥을 보내고송은 형, 요는 동생의 - P462
관계를 맺는 내용이었다. 요가 송과 군신의 관계는 맺지 않았지만, 송을 형으로 함으로써 송은간신히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요사』에는 송이 요나라의 황태후를 숙모라고 부른다고 표현했다. 이것이 역사상 ‘전연(淵)의 맹(盟)‘이라고 부르는 강화조약이다. 이 조약에 따라 이후 약 40년 동안 두 나라의 관계는 안정되었다. - P463
천하를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신법 실시가 아니라 그것의 폐지와 부활이라는 변동, 즉 당쟁이었다. 역대 중국의 역사가는 북송의 쇠망을 신법 탓으로 돌리는 자가 많아왕안석은 악역으로 몰려 버렸다. 개혁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인데 왕안석의 집정은 겨우 6년이었다. 시간을 두고 일관되게 실시해야 효과가 나타나는데도, 정국은 긴 안목으로 지켜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표면은 어찌되었건 중국인의 사고방식에는 노장적인 면이 의외로 강하다. 노장의 사상은 ‘무위(無爲)‘를 존중한다. 너무 간섭하는 정치는좋아하지 않는다. 신법은 그 성격상 백성의 생활에 상당히 깊이 파고들어 간섭하는 것이었다. 그 번거로움이 싫었던 것이다. 신법은 높은 이상을 내걸었으나, 새로운 정책을 실시할 때 일어나는혼란은 피할 수 없었다. 구법의 의식적인 방해도 있었지만 말단 정책을 이해하지 못한 혼란도 있었다. 지금까지의 역사가처럼 모든 죄를 왕안석과 신법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 P489
휘종은 채경과 동관과 함께 있을 때가 가장 즐거웠다. 서화와 시문 이야기 상대로서 두 사람을 능가할 대신은 없었다. 게다가 이 둘은 정치적인 수완도 어쨌든 표준 이상이었다. 휘종은 정치를 그들에게 맡겨 놓고자신은 우아한 예술 생활을 보내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술을 하려면 돈이 든다. 그 돈은 재상들이 어떻게든 마련했다. 이제 ‘신법‘은 그런 일을 위해 쓰이게 되었다. 항주에는 궁정용 도구를 만드는 공예국(工藝局)을 설치했는데, 그 설치를 동관이 맡았다. 또 황족의 혼례기구를 만들기 위해 ‘후원작(後苑作)’이라는 관청을 만들었다. 여기에도 환관 양(楊)이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양전은 ‘공전법(法)‘이라는 새로운 법을 만들어 후원작의 경비를 조달했다. 왕안석의 신법 안에 ‘방전균세법(方田均稅法)‘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대지주가 숨긴 논을 찾아내 세금을 매기는 것이 목적이었다. 전국적으로 실시하지는 못했지만 토지 실측으로 숨긴 논밭을 많이 찾아내 증수(增收)로 이어졌다. 대상은 대부분 대지주였다. 휘종 때의 ‘공전법‘은 그렇게 만만한 법이 아니었다. 자의 기준을 바꾸었던 것이다. - P528
방납은 ‘끽채사마(喫榮事魔)‘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끽채사마란 채식주의자에다 마귀를 섬기는 자를 뜻한다. 분명한 증거는 없지만, 이것은 당나라 무종(武宗) 회창(會昌) 연간의 폐불령 때 함께 탄압받은 마니교가 지하로 숨어들어 살아남은 집단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냥 무장만 한 암거래상인 집단이 아니라 종교라는 유대로 묶인 만큼 단결이 강한 사람들의 반란이었는지도 모른다. 휘종은 이 지방의 반란이 조작국과 화석강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토벌군을 보냄과 동시에 그것들을 폐지했다. 조작국과 화석강을 폐지함으로써 조금이나마 백성들의 원망을 무마하려고 했던 것이다. 방납은 항주를 함락하고 한때는 엄청난 기세로 자신을 성공(公)이라 칭하고,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 P533
금군은 개봉을 철저하게 유린했다. 재화를 약탈하고 부녀자도 끌고갔다. 개봉은 순식간에 폐허가 되고 말았다. 금군 내에 있던 연경의 한인들이 약탈 안내역을 도맡았다. 역대 황제, 특히 휘종이 고심하여 모았던서화, 기물(奇物)도 가져갔다. 연경의 한인들이 특별히 찾았던 것은 소식과 황정견의 글씨였다. 이때 왕안석의 글씨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고한다. - P548
흠종과 태상황 휘종은 스스로 금나라 군영으로 가서 포로가 되었다. 황족, 고급관료, 금나라가 필요하다고 인정한 기술자, 예술가 수천 명이금나라로 끌려갔다(이것을 ‘정강(靖康)의 변‘이라고 한다. 9제(帝) 167년 동안 이어 온 송 왕조는 이것으로 일단 막을 내렸다. - P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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