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 내 할 것 없이 다 마찬가지 아니겠소. 기생들이 몸뻬 입고 훈련받으러 나가야 하고 근로봉사 하러 나가야 하고………… 옥봉에서도 장사하는 집 몇 안 돼요. 그놈의 나아리들 땜에, 흥!
반시국적 분자다, 입으로는 그러지마는 금주할 수 없는 높으신 나아리..…… 덕분에 이럭저럭 아직은 문을 안 닫았을 뿐이지" - P332

"알다시피 요즘 학생들 군사훈련 아니면 군수공장에 가서 일하는 것 아닌가. 말하자면 노동자들 선동하기, 눈치껏 태업하기, 공장기구 파손, 변소간에는 말할 것도 없고 후미진 곳이라면 어디든 벽면에 낙서하기, 그 낙서의 종류에는 별의별 것이다 있는 모양인데 조선독립만세서부터 귀축 일본 물러가라, 해방의 그날이 오면 너희들 모가지는 추풍낙엽이다. 친일분자의 모가지부터 비틀어버리겠다 등등 지워도 지워도 끝이없다는 거고, 하는 수 없이 학교 당국에서는 호주머니 속에 백묵이나 연필 따위가 들어 있는지 조사를 해서 들여보내는데도낙서는 줄지 않는다는 거다. 요즘 애들 결코 정면대결은 하지않아."
"신통하군요."
"그 애들 보면 희망이 생겨, 옥쇄가 아니고 지속성이거든." - P334

"어떤 경우에도형, 징용만은 피해야 합니다. 한 번 죽는 게 아닙니다. 차라리 형무소에 들어가는 편이 나아요. 여기서는 실정을 잘 몰라서 설마 하는 경향이 있고………… 동경서 비밀히, 징용자들이 종사하는 곳의 실태에 대해서 정보를 모아보았는데 한마디로 지옥입니다. 매 맞고 고문당하고 그런 차원을넘어섰어요. 굶겨가며 일을 시키다가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되면 숨이 끊어지지도 않은 사람을 생매장하기 아니면 숲 속에던져서 야수들이 뜯어먹게 하는 겁니다. 숨을 쉬는데 콧구멍에서 구더기가 기어나와요."
수관은 몸서리쳤다. 말하는 윤국이도 술잔을 들며 눈을 감았다. - P336

"허무해서 아마 그러실 거다. 돈이 많아도 쓸 곳이 없고."
"허무해서 그렇다는 말엔 나도 동감이다. 자네도 알다시피사업은 올스톱, 돈의 가치는 날로 떨어지고 부동산 매매나 된단 말가, 땅에서는 공출로 몽땅 나가버리니, 전쟁은 불리하고………… 현재를 실감하는 데 여자밖에 더 있어? 나 역시 그래.
마음 붙일 곳이 있어야지. 나는 출발에서부터 야망 같은 것 없었으니까, 자네들 수재하고는 형편이 달랐어. 한순간 순간을즐기다가 가는 거지 뭐. 어차피, 땅속에 들어가 썩을 몸 아닌가."
-> 개망나니들. - P346

"네년이 나한테 칼을 들이대 놓고서도 그 자리가 온전할 것같나? 독사 같은 년, 내가 그거를 모리고 이날까지 살았제. 만정이 떨어진다." 또 서울네는 새우같이 등을 꾸부리고 앉아서 눈을 치뜨고 두만을 노려본다. 힘이 다 빠져서 입도 몸도 뜻대로 놓아주지 않는것 같았다.
"이래가지고는 어디 마음 놓고 집이라고 찾아오겠나? 저년은서방 밥그릇에 비상 타고도 남을 년이다. 생각해보믄 저년으로인해서 부모 형제하고 등졌고 죄 없는 제집 민적까지 파고 자식놈은 저 모양..…………."
새우처럼 꾸부리고 있는 서울네 등이 튀듯 움직였다. - P352

"사람들은 해악을 당할까봐 두려운 거야. 미운 놈 떡 하나더 준다는 말도 있지 않아? 왜 떡 하나를 더 주겠니? 제발 해코지 말고 물러가라는 뜻이지. 악신을 달래는 것도 우리들 풍속이야. 어떤 면에서는 아주 노회한 생각이지만, 그리고 또 일부에서는, 소위 친일 패거리들인데 그 여자 뒤에 엄청난 힘이 있는 거로 착각을 하고 이용해보려는 속셈도 있겠지. 그 여자는그렇게 생각하게끔 하는 데는 비상한 재주가 있는 모양이고,
하기야 뭐 경찰 간부의 정부면 힘이 있다고도 할 수 있겠지." - P414

탱화에서 눈을 떼고 백씨를 바라보던 명희는 여간하여 그 예배가 끝날 것 같지 않아서 다시 관음상으로 시선을 옮겼다. 순간 명희는 참으로 기이한 충격을 받는다. 그렇게 현란하게 보이던 관음상이 폐부 깊은 곳, 외로움으로 명희 이마빼기를 치는 것이었다. 어째서일까? 명희는 자기 마음 탓이려니생각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동이었다. 숙연한 슬픔, 소소한 가을바람과도 같이 영성(靈性)을 흔들며 알지 못할 깊고도 깊은 아픔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원초적이며 본질적인 것으로 삼라만상에 대한 슬픔인 것 같았다.
법당에서 나왔을 때, 선명한 단풍과 아직은 푸름이 남아 있는 맞은편 숲이 투명한 푸른 하늘에 묻어날 듯 명희 시계에 들어왔다. 마치 인생의 한 고개를 넘은 듯 명희 입에서 가느다란한숨이 새나왔다. 도대체 김길상이란 누구냐 하는 의문도 명희마음속에서 강하게 소용돌이쳤다. - P426

"철없는 젊은이들은 산에 들어만 가면 솔잎을 뜯어 먹더라도살 수 있다 생각할지 모르나 실제 있어보면 그렇게는 안 되어있거든. 첫째는 식량이 문제고 산이 표적이 되어서도 곤란한일이지요."
"그건 그렇소."
"그렇다고 해서 명을 걸고 들어오는 사람 막을 수도 없는 일아니겠소?"
"평사리 우가 놈, 면소에서 서기질을 하는 그런 놈이 하나 있어요. 그놈이 사냥감을 찾듯이 며칠 전에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간 일이 있었지요. 그놈을 잡아 없이하는 거야 어려운 일 아니나 일이 크게 벌어져서 산사람들 많이 다칠까 싶어서."
"한 놈이 와서 뭘 어떡하겠소. 이 넓은 산중에서."
"그도 그렇지만 들어오는 사람 중에 염탐꾼이 끼어들 수도있을 것이며 미련한 산놈 중에서 내통하는 자가 없으란 법도없지요." - P434

"천지만물의 이치는 하나일세. 공연히 식자들이 그것에다 각기 다른 옷을 입혀 다른 것같이 생각하는데, 내 말을 끝까지 듣게. 그러면 그 옷이란 무엇이냐, 소위 이론일세. 이론이란 꿰맞추거나 틀에다가 넣어서 비어져나오는 것은 짜르고 비어 있는곳은 메우고 반듯하게 하는 것인데 그것으로 사람 사는 이치가다 드러난 것일까? 아니지. 하기야 끝없이 부연한다 하더라도진리가 도드라질까?" - P443

"되어 있는 밥 엎어버리고 언제 꼬부랑 글씨 배워서 새 밥을 짓누,
내 것을 모멸하고 부수면서 독립운동을 해? 내 것을 소중히 여기고 지키려는 마음이어야 독립운동도 되는 거지. 그렇게 갈팡질팡하는 우리들의 대표격이 이 아무개인데, 그자가 독립운동을 안 했던 것도 아니요, 그러나 오늘은 어떠한가? 당연히 갈자리에 가서 서 있는 게야. 하루아침에 변절한 것은 아닐세. 내것을 버려라, 버려, 깡그리 버려야만 우리가 산다, 그러던 자가어찌 끝내 독립지사로 남으리. 결국 본받아라, 본받아라 했던그곳으로 가는 것은 자연의 이치 아니겠는가. 당연한 귀결이지." - P44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