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는 가을이 머물고 있었다. 물들기 시작한 가로수 아래, 얼음 갈라지는 소리라도 들려올 것 같은, 서늘하고 푸른 하늘 아래, 꾸물꾸물 움직이고 있는 군상들, 누더기 같은가 하면 곤충 같기도 한군상들이 서로 방향을 달리하며 혹은 같이하며 가고 있었다.
낡은 상자 같은 트럭이 달리고 짐 실은 우마차도 지나가고 있 - P256

었다. 여인을 신이 만든 꽃이라 했던가, 자연의 열매라 했던가.
꽃으로도 열매로도 볼 수 없는 몸뻬 차림의 우중충한 모습들,
남자들은 한결같이 카키색, 사람들에게는 계절이 없었다. 배급소에서 식량을 달아주고 배급표를 챙기는 그 현실만이 있었을뿐이다. - P257

욕망과 희생의 싸움이었다. 사람 속으로 뛰어들어 자기도 한몫을 하겠다는 충동과 세상을 바라보며국외자로서 흐르는 대로 흘러가겠다는 에고이즘과의 싸움이었다. 집념과 포기의 싸움이었다. 도덕과 반도덕, 그에게는 윤국이 거대한 성(城)으로 인식되었다. 그것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광은 더욱더 자신이 피를 많이 흘려야 한다는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치명적인 것은 믿지 못할 자기 성격적 결함이었다. 제2의 혜숙을 또 만들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은 그의 전진에 제동을 걸었다. 영광은 양현을 사랑했으며이 세상에 나와서, 가장 강렬한 집념이었다. - P266

팽팽하게 당겨진, 결코 누그러질 수 없는 긴장 속으로 들어간 느낌이었다. 양현은 계속해서 울었다. 명희는 저도 모르게뜨개질하다 만 것을 집어들었다.
‘언제나 그렇게 엇갈려. 왜 그렇지? 그러면서도 사람은 살아간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그런 슬픔 속에서도 여전히 사람은 살아가고, 얼마나 신기한 일이냐? 양현아, 실은 나도 지금 혼란스러워" - P271

영미와 전쟁이 시작되고 햇수로만 일 년 팔 개월이 지나간 지금, 확실히 사태는 전과 같지 않았다. 신문지상에서도 금년 들어 일군은 과달카날섬에서 철수를 했고 사월에는 연합함대(聯合艦隊)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山가 비행기 속에서 전사했으며 오월에는 또 아스섬의 일군은 전멸했다는 보도였다. 소위 옥쇄했다는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맹우(友) 독일도 소련의 스탈린그라드에서 항복했으며 북아전선(戰線)의 독일군도 항복했으며 이태리의 무솔리니도 실각, 파시스트당은 해산이 되었다. 일본 - P284

의 패색이 짙은 것은 이제 부인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것은 희망이기도 했지만 조선인에게는 절망이기도 했다. 일본은 결코 그냥 물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모두 옥쇄한다고 떠들지만 저들만 옥쇄할 것인가. 서희는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끌려나가는 어린 처녀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었으며 농부며 노동자, 심지어는 도시의 중산층 청년들까지 어디로 끌려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언제 어느 때 학생들이 몽땅 전선으로 내어몰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얼마 전에 조선에도 징병제가 실시되어, 그것에 대비하여 중학교에서는 그토록 치열하게 군사훈련을 해오지 않았던가. 식량배급의 통장은 어디든 달아날 수없는 조선 청년들 소녀들, 그리고 중장년들의 무겁고도 무거운멍에였다. - P285

"세상이 그렇게 돼버린 걸 어떻게 해요? 할 수 없지."
"그렇다면 돈 쓰고 공을 들여서, 일본까지 뭘 하러 공부하러가느냐 말이야."
"처음에야 뭐 순사 될려고 그랬겠어요? 전문부 나와가지고사실 조선사람들 취직자리가 어디 쉬워요? 놀고먹기 십상이지.
소사 급사 서기 순사가 고작 아니에요? 고등문관에나 패스하면 모를까, 그건 하늘의별따기, 선생이나 의사가 최고급이지뭐. 하니 어떡하겠어요? 놀고먹다가 징용에라도 잡혀가면 그것으로 그만이에요. 살아서 돌아오기 어렵다 하더구먼요. 차라리군대 가는 편이 낫다 그러고들 말하대요."
"하긴 그래. 징용 안 가려고 성한 다리를 뿌러트리는 사람도있다던가." - P289

불안한 사랑,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랑, 그러나 양현은 자기 자신이 얼마나 그 불안한 사랑에 매달려 있는가를 깨닫는다. 외부의 장애보다 영광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장애물이 그 얼마나 큰 것인가를 양현은 새삼스럽게 통감한다. 그것은 그의 처절한 외로움이며 그 외로움을 타고 흐르려는 그의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양현은 그를 꽉 붙잡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의 외로움을 녹여주리라! 마치 영광이 옆에 있는 것처럼 그러는가 하면 등을 돌리는 뒷모습에 매달리는 광경을 보기도 하고 영원히자기 앞에서 모습을 감추어버리는, 그 돈암동 거리를 눈앞에떠올려보기도 한다. - P302

윤국은차안에 서서 피안의 양현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강을 결코 건너지 못하리라는 것을, 피안에 닿지 못하리라는것을 윤국은 깊이 깨닫는다. 양현은 양현의 길을 가고 자신은자기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 P325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자기 자신에게도 어두운 그림자는 있다. 죽을지도 모르고 체포될지도 모른다. 언제 딛고 있는땅이 함몰할지 모른다. 그것은 현재 조선인이 처해 있는 입지이기도 했다. 마음으로나마 풀어주자. 양현을 그 인습에서나마풀어주자, 편견에서도 풀어주고 세속적 기준에서도 풀어주자. -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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