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을 뒤엎은 왕망 '신'은 한나라가 유학의 이상대로 돌아가길 원했다. 외교정책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예악이 없는 주변 국가들이 스스로를 왕이라고 부르는 것이 못마땅했던지 '왕'을 '후'로 격하시켰다.
『후한서』「동이열전」에는 고구려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王莽(왕망) 初(초)에 句驪(구려)의 군사를 징발하여서 匈奴(흉노)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흉노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 너머로 도망한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遼西大尹(요서대윤) 田譚(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자, 王莽(왕망)이 장수 嚴尤(엄우)를 시켜 치게 하였다. [嚴尤는] 句驪侯(구려족) 騶註(추주) 를 꼬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長安(장안)에 보내었다. 王莽(왕망)은 크게 기뻐하면서, 高句驪王(고구려왕)의 칭호를 고쳐서 下句驪侯(하구려후)라 부르게 하였다. 이에 貊人(맥인)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은 더욱 심하여졌다.
그런 왕망 신이 나간 뒤 후한 시기가 시작되었다. 광무제 이후 장제까지(3대)는 그럭저럭 이어졌으나 이후는 외척과 환관 세력이 판을 치면서 짧은 시간 안에 무려 7왕조가 바뀐다(화제-상제-안제-순제-충제-질제-환제).
소제 때 환관들간의 갈등이 벌어지면서 반정이 일어나고 순제 때 공신이 된 환관들 19명이 모두 열후에 오르게 된다. 환관 간의 이권 다툼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한 세력이 다른 세력을 뒤엎고 반정에 성공, 정권이 결국 바뀌었다. 솔직히 7왕조의 황제는 단명했기에 음모론이 제기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시기인 듯하다.
어쨌든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환제 정권 때 양기 부부의 이야기였다.
아버지 양상은 소심하기는 했으나 그래서인지 자기 그릇을 어느 정도 알았던 것 같다. 하지만 아들인 양기는 제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망나니였고 부인인 손수도 그에 못지 않았다. 마치 누가 더 막 나가나 경쟁이라도 한다고 해야할까. 물론 기록이라 정도의 차이는 감안해야하겠지만 없는 일을 쓰지는 않았을 것 같다.
환제 정권 때는 환관끼리의 암투도 극심했고 앞서 이야기한대로 외척인 양기 집안의 횡포도 심했다. 그리고 정작 가장 넓은 층인 사인 계층은 이들 사이에 끼여 있어서 취업문이 좁아졌으니 왕의 주변에는 이득을 보기 위한 이리떼들만 잔뜩 모여있었다. 게다가 환관들이 양자를 들이는 것이 가능해지고(환관의 권력 계승이 가능해진다는 것) 사람 추천하는 것도 가능해지면서 그야말로 정권은 엉망진창이 되어갔다.
그런데 아이러니인 것은 환관이 양자를 들이는 것에 혜택을 본 자가 있다. 조씨 집안이다. 삼국지의 조조는 이 덕택으로 역사의 주 무대에 들어설 수 있었다.
이제 삼국지의 무대가 등장할 차례가 되었다.
후한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빼앗은 위나라의 조씨는 환관이 양자를 들여서 이어온 집안 출신이었다. 『자치통감』의 주를 작성한 호삼성은 이 양가 4년의 항에 조조가 이를 계기로 훗날 마침내 한의 황위를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가 후한을 대신하게 된 것은 조조의 아들인 조비 때였으며, 서기 220년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환관이 작위를 세습하는 것을 허가하는 결정이 내려지고 정확히 85년 뒤의 일이다. - P143
호족 상류층은 외척이거나 중앙 고관, 유력자의 천거, 아니면 군수의 추천으로 관리가 될 수 있었다. 군수는 추천하는 일이 의무여서 해마다 인구에 비례해서 효렴에 한두 사람 추천해야 했다. 환관은 자기 말을 잘 듣고 자기 대신 착취해서 돈을 벌어 줄 만한 하층 인물을 추천했다. 때로는 돈으로 산 노예를 추천하는 경우조차 있었다. 이렇게 되자 상층과 하층 사이에 낀 중간층인 사인은 관직에 오를 기회를 얻지 못했다. - P160
관직을 얻으려고 찾아온 사람들이 양기의 저택 앞에 줄을 섰다. 또 선물을 들고 지은 죄를 무마해 달라고 부탁하러 온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엄청난 금품과 재물이 양씨 집과 손씨 집으로 들어갔다. 양기가 대저택을 세우자 아내인 손수도 이에 뒤질세라 길 건너편에 저택을 짓고 건축 공사 경쟁을 벌였다고 전한다. 사치스럽기 그지없는 그 저택은 숲과 폭포까지 갖추었으며, 또 각지의 장원도 광대해서 황실의 그것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낙양의 유행은 양기의 처 손수가 만들어 냈다. 그녀는 다른 사람하고는 다른 기발한 스타일을 좋아했다. 자기과시욕이 몹시 강했던 것이다. 수미. 타마계. 절요보. 우치소. 손수가 만들어 낸 세련된 유행을 추종한 사람들도 많아 낙양의 모든 여자들이 그런 화장법과 머리 모양, 걸음걸이, 웃는 법을 흉내냈다. - P156
전한의 무제는 유교를 국교로 삼았지만, 유학 그 자체가 보급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성천자가 되고자 했던 왕망 시대는 국교의 지위를 받은 유학이 겨우 열매를 맺기 시작한 시기다. 더구나 왕망은 대외정책을 유학의 이상에 따라 추진하고자 했다. (...) 왕이 후로, 고구려가 하구려로 격하된 쪽에서는 당연히 거센 반발이 일었다. 정치적인 민족의식이 일어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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