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 나서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기개 있는 사인과 환관의 대립도 격해졌다.
이 삼파의 권력투쟁이 후한 왕조를 뒤흔들어 그 활력을 잃게 했으며,
마침내 멸망으로 치달을 빌미를 제공했다.
광무제가 이상으로 여겼던 작은 정부에도 커다란 허점이 있었다. 군주독재 정체는 군주가 제대로 서 있는 동안에는 잘 돌아가지만 그렇지않을 때는 혼란에 빠진다.
후한 왕조는 황제의 집이 곧 국가라는 성격이 농후했다. 집안의 혼란이 곧 국가의 혼란으로 이어졌다. 광무제도 당연히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통치했던 시대에도 다음 황제인 명제 시대에도 외척과 환관이 정치의 장에 나서는 것은 억제되었다. - P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