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법 63가(家)의 술을터득한 자를 총동원해서 종군시킨 처사는 우습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병법에는 당연히 다양한 유파가 있다. 하지만 그 우열을 따지지 않고 모조리 채용했기 때문에 실제로 전쟁에 나갔을 때 63파의 참모 고문이 갑론을박하느라 수습이 안 된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백만 대군이라 큰소리쳤지만 실제로는 40만가량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대군은 대군이다. 군량 문제 하나만 해도 어마어마한 일이었고, 명령계통 따위도 분명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들은 먼저 양성(陽城)을 포위했다. 곤양에는 유수가 있었다. 유수는 13기병(騎兵)을 거느리고 남문으로 탈출해 성 밖에서 병사를 모아 역으로 포위군을 공격해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 P23
장안의 황제 왕망은 이제 착란상태에 빠졌다. 최발(崔發)이라는 자의수상쩍은 말을 듣고 군신을 이끌고 남교(南郊)에서 하늘을 우러러 목 놓아 통곡했다.. 예로부터 나라에 큰 재앙이 있으면 곡(哭)을 하여 그것을 눌렀다고합니다. 마땅히 하늘에 고하여 구제를 청하소서. 최발의 말을 듣고 통곡 대회가 열렸다. 우는 모습이 심히 비통한 자는서민이라 해도 낭(郞)으로 등용했다. 낭은 200석의 숙위관(官)이다. 이때문에 낭의 수가 5천 명으로 늘었으니 확실히 제정신이 아닌 것만은틀림없었다. - P27
왕망에 반대하는 세력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등엽의 부하가 된 왕헌(王憲)이라는 자가 첫 번째로 장안에 발을 디뎠다. 새로 참가한 군에 다시금 새로 참가한 부대가 결국 장안에 맨 먼저 돌입해서 왕망을 죽였다. 왕헌은 홍농현(弘農縣)의 연(緣)이라는 속리(俗吏)였다. 그에게는 반 왕 - P27
망 혁명전쟁에 가담한다는 의식이 전혀 없었다. 단지 약탈집단에 가입한다는 정도였다. 장안에 돌입한 뒤 그의 부대는 약탈과 폭행을 자행했다. 후궁에는 미녀가 많았다. 먼저 차지한 자가 임자라는 생각에 장병들은궁녀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왕망을 죽인 사람은 상(商)나라 사람인 두오(杜吳)라는 자였고, 목을친 자는 공빈취(公)였다. 왕헌은 자신을 한(漢)나라의 대장군이라 칭하고 약탈한 옷을 걸치고 거마(車馬)를 함부로 썼다. 그거마에는 황제기가 걸려 있었다. 이윽고 갱시제가 파견한 진짜 장군인 신도건과 이송이 장안에 입성했다. 그들은 왕헌을 체포해서 목을 베었다. 왕망의 인수 (印綬)를 얻었으나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은 것, 궁녀를 빼앗고 천자의 깃발을 단 것 등이 대죄가 되었다. 왕헌은 도적단에 들어가서 약탈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런 일로 죽는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 P28
왕망정권을 무너뜨린 것은 농민군의 궐기였지만, 그들은 자신들의권을 만들지 못했다. 사람들은 질서를 바랐으나, 그들은 그것을 주지 못했다. 그들은 통치하기 위해 조직을 짜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조직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율(律)을 확립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 마지막 모습이 강도 집단이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광무제는 자신의 군대를 엄한 규율로 정리하는 한편 관용을 베풀어인재와 병력을 늘렸다. 광무제 집단과 적미군의 차이는 뭐니 뭐니 해도 ‘지식‘이었다. 광무제는 낙양의 태학에서 공부한 인물이다. 『군국책(軍國策)』과 『사기(史記)』를 읽었으니 역사에서 배웠을 터이다. 『손자』를 읽고 알게 된 모략을 활용하기도 했다. 적미군 간부 중에서 글을 읽을 줄 아는사람은 옥리(獄吏)라는 구실아치였던 서선(徐)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적미군을 자기 세력 아래 둔 뒤, 남은 일은 농(隴, 감숙)의 외효와 촉(蜀,사천)의 공순술이라는 두 지방정권을 제압하는 일이었다. - P40
광무제에게는 별다른 일화가 없다. 적어도한나라 고조에 비하면 눈에 띠게 빈약하다. 광무제는 근엄하고 솔직한인물이었다. 창업 인물은 대개 고조처럼 거칠고 파격적인 경우가 많지만, 광무제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광무제가 시작한 왕조를 후한이라고도 부르고 동한이라고도부른다. 전한과 후한은 시대를 기준으로 부르는 명칭이고, 서한과 동한은수도의 위치를 기준으로 부르는 명칭이다. 전한의 수도는 장안이고, 후한은 그보다 좀 더 동쪽인 낙양이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전한, 후한보다서한, 동한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쓴다. 10세기 중반에 당나라가 멸망하고, 오대(五代)라는 단명 왕조가 계속되던 시대에 겨우 4년 동안이었지만, - P41
‘후한‘을 칭했던 왕조가 있었다. 그것과 구별하기 위해 광무제가 세운 후한을 동한이라고 부른다. 다만, 동서로 나누어 부르면 분열국가로 혼동하기 쉽다는 결점이 있다. 서한과 동한 모두 중국 전체를 지배한 당당한 왕조였다. 전후, 동서, 남북 같은 표현을 왕조명에 붙이는 것은 사실 후세 사람들이 편하자고 그렇게 했을 뿐이다. 광무제가 창건한 후한(한)이라는 왕조도 당시에는 그저 ‘한‘이라고 불렀다. 단지 후세 역사가가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왕권이기 때문에 둘을 구별하기 위해 그렇게 가려 부른 것뿐이다. - P42
광무제는 호쾌한 척하며 다른 사람과 속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일 따위는 할 수 없었다. 남과 사귈지라도 오로지 수동적인 자세만을 취했다. 그런 사람이 용케도 황제가 될 수 있었다고, 아주머니들은 감탄도 하고이상하게도 생각했던 것이다. 광무제는 이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며, 나는 천하를 다스리는데도 역시 유(柔)의 도(道)로써 이를 행합니다. 라고 말했다는 기록을 『후한서』에서 볼 수 있다. 유의 도란 온후하고 거스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소년시절의 광무제는친구와 사귈 때도 하고 싶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온후하게 남의말을 웃으면서 듣는 성격이었다. 일족의 여인들의 눈에는 그런 모습이 투쟁심이 강하지 않은 소년으로 비쳤던 것이다. 그런 사람이 황제가 되었으니, 그녀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광무제는 그 말에 자신은 정치를 하는데도 어렸을 때처럼 무리하지않으려고 조심한다고 대답했다. - P53
호족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은 대세를 거스르는 일이므로 이제부터는하지 않겠으니 이제 여러분은 안심하시오, 라는 속뜻이 담긴 말인지도모른다. 근대 역사가 중에는 이때 광무제가 한 말이 호족에게 완전히 굴복한발언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전에 일족의 여인들의 말이있어, 그것이 광무제의 성격을 간결하게 형용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것은 광무제의 성격뿐만 아니라 후한 왕조의 성격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삼공(三公)의 명칭을 언급하면서 대사도와 대사공의 ‘대‘자를 없앴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아주 먼 옛날에는 관명(官名)이 사도나 사공으로 원래 대(大)자를 붙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과장을 좋아하지않았던 광무제가 ‘대‘자에 거부감을 가졌던 것도 개칭하게 된 한 가지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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