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한 놈은 고해성사라는 걸 하지도 않고 왜 피해를 당한 사람이 고해성사를 하고 나아가 고발을 해야 하는지. 안하무인! 빡침의 연속이다.
나는 신부의 이 태도도 마음에 안 든다. 기도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나? 그럼 이 여성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건가? 물론 육체적인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고 정신적인 문제도 있었으나 그렇다고 이것이 자신을 내팽개쳤으며 사랑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보려고 발버둥친 사람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그냥 허무한 제스처가 아니었나 생각하게 된다. 물론 그 신부는 가톨릭 교리를 충실히 지켰다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여성이 원한 것은 결단코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부모님의 태도도. 후... 딸이 그런 일까지 겪었는데 꼭 트럼프를 찍어야 했나? 나는 딸의 절규가 이해가 되었다. 나라도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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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줄기 속에서 작은 돌들이 자꾸 발밑에 밟혔고 몸에서 에런과벤의 냄새가 훅 끼쳤다. 그들의 땀내가 목구멍 뒤에 맴돌았다. 그 냄새는 주위의 증기에 매달린 채 숨을 한번 들이쉴 때마다 점점 강해졌다. 바디워시를 샤워 타월에 붓고 구석구석을 문질렀지만 몸에밴 남자들 냄새는 꽃향기로 가려지지 않았다. 아무리 박박 문질러도 냄새는 가시지 않았다. 바디 워시를 더 따르려고 손을 뻗는데 별안간 내 안의 모든 것이덜컥 움직였다. 정신이 육체에서 떨어져 나왔다. 위에서 내가 나를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몸이 울고 있다는 걸 꽤 차분하게 알아챘지만 눈물은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더 이상 이 연약한 분홍색 피부와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그것의 고통과 문제로부터 동떨어져 있었고 나를 그토록 오래 데리고 다녔던 그 죽은 몸뚱이에서 뽑혀 나간채 시간 밖에 떠 있었다. - P288
"속죄를 위해," 스캔런 신부님이 무릎에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성모마리아님께 기도를 올리세요. 여성으로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알려달라고 성모마리아님께 도움을 청하세요." 신부님의 말씀은 나를 더욱 흐느끼게 했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스캔런 신부님이 고해성사 때 무슨 말을 했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내게 필요한 말을 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여러모로 그의 말은 옳았다. 나는 자아를 찾으려고 노력하는불안정한 여학생이었고, 때로 부적절한 곳에서 자아를 찾으려고 애쓰기도 했다. 하지만 신부님 앞에 앉아 있는 내게 이 고통을 초래한사람이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줄 필요는 없었다. 이미충분히 수치스러웠다. 그때 내게 필요한 것은 정신 치료를 받을 수있게 안내받는 것이었다. 내게 필요한 것은 몸도 못 가누는 상태에서 어떻게 합의를 할 수 있었겠느냐고 누군가 말해주는 것이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성폭행당한 사실을 알려줄 사람이었다. - P293
그로부터 근 13년이 지나 스캔런 신부님이 영면했다. 그 직후 가톨릭교도들은 그를 칭송했다. 지금도 스캔런 신부님을 성인으로 시성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보기에도 그렇게 하는 게마땅하다. 한 번의 판단 실수가 지금껏 쌓아온 덕을 무효화하는 것은 아니며 성인들도 때로 죄를 짓는다. 그러나 나는 안다. 여자들이너무 오랫동안 남자들의 짐을 짊어지고 왔다는 것을. 오랜 세월 여자는 본성에 결점이 있는 요부로 묘사되었다. 여자는 남자를 죄로인도하는 무절제의 화신이다. 아담이 사과를 먹은 것은 오로지 이브가 사과를 먼저 먹었기 때문이다. 에런과 벤이 나를 이용한 것은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성폭행당한 죄를 용서해준 신부님은 언젠가 성인으로 추앙될 것이다. 사과를 먼저 먹은것은 이브였다. 사과에는 선악에 대한 앎이 들어 있다. 아담이 선악의 차이를 말해주지 않으리란 걸 이브는 미리 알았던 것이다. - P294
위원단은벤이 숲에 함께 있었다는 데는 동의했지만 성관계는 합의하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말도 안 돼." 엄마가 중얼거렸다. 그런 다음 핸드폰을 가방에 집어던지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찡그린 이마와 떨리는 입술로 보건대몹시 화가 나 있었다. "총장한테 직접 가서 따져야겠다. 아니면 스캔런 신부님께 말씀드리든지 해야겠어. 우리 생각을 알려야지." 나는 의자에 그대로 앉아 접시에 놓인 상추를 뒤적거렸다.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않았다. 난 엄마처럼 반응하지 않았다. 무감각했다. 문제를 공론화하면서 옳은 일을 한다고 내 입장을 밝힘으로써 다른 여학생들을 돕는다고생각했지만 성취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벤은 처벌 없이 빠져나갈 것이고 나는 위원단이 내린 평결의 무게를견뎌야 할 것이다. 합의에 의한 것이었다. 넌 그저 네 자신을 여성으로사랑하지 않은 것일 뿐이다. - P303
암사슴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귀를 쫑긋했다. 혼란 전야의고요함 속에서 사슴과 나는 서로를 응시했다. 머릿속이 격렬하게 뛰었다. 에런과 벤을 생각하고, 그들과 숲에 있었던 그 추운 밤을 생각했다. 암사슴의 날씬한 목과 부드러운 점들과 급소를 생각했다. 씰룩거리는 귀와 맑은 눈을 생각했다. 곧이어 그것은 다시 에런과벤이 되어 내 마음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그들의 몸, 그들의 체취. 땅에 누운 나의 맨 넓적다리와 그다음 날 아침 딱지투성이의 무릎을 생각했다. 곧이어 그것은 다시 암사슴이 되었다. 암사슴의 부드러운 점들과 비에 젖은 털. 고해성사. 성모마리아 피났어? 라는 질문. 그런 다음 에런과 벤, 숲속에서의 추운 밤, 골프를 치는 남자들, 웃는 남자들, 버클에서 풀리는 허리띠, 붉은 컵, 맨 넓적다리, 암사 - P309
슴, 암사슴의 날씬한 목, 부드러운 점들, 부러진 뼈, 암사슴의 피. 암사슴을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리면서 사슴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암사슴은 날씬한 다리로 우아하게 몸을 돌리더니 새로 돋은 초봄의 풀들 위로 떠갔다. 순식간에 사슴은 무리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아 울었다. 처음으로내가 무서웠다. - P310
내가 성폭력을 고발하러 나선 것은 다른 여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맞서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했다. 내 목소리가 변화를 이끌어낼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 후로도 피해를 입은 여학생이 너무도많았다. 그사이 나 같은 젊은이들이 문제라고 혀를 차는 나이 든 미국인들의 한탄을 숱하게 들었다. 그들은 우리가 자기중심적으로 권리만 내세운다고 말했다. 우리는 직업윤리도 형편없었다. 순간의 만족을 추구하는 한편, 앞선 세대의 규율과 실행력은 부족했다. 이런비난은 늘 초점에서 벗어난 것이다. 우리 세대는 변화를 만들어낼힘이 있다고 믿으며 자랐지만 꿈을 꾸면 이룰 수 있어 우리의 이 - P312
상은 사회가 남용과 타성에 빠져 황폐화되는 사이에 무너져 내렸다. 어린 시절의 포부는 더 이상 실현 가능한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선한 의도는 갈 곳을 잃고 우리 안으로 파고들어 좌초된 다음, 유리만큼 부서지기 쉽되 뿌리 깊은 이기주의를 양산했다. 세상의 구원을 꿈꿨던 어린아이가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제 한 몸 구할 수없는 세상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다. - P313
남자들이 누군가의 성기를움켜쥘 권리가 있다고 생각할 때 어떤 해를 입힐 수 있는지 부모님 - P331
은 목격한 터였다. 엄마는 성폭행을 당한 내 눈물을 닦아주었고 아빠는 금 목걸이를 주었다. 12년이 지난 지금, 트럼프는 남성의 특권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고 부모님은 그런 트럼프를 지지했다. 그뿐아니라 트럼프를 위해 기꺼이 교황을 버리는 한편, 트럼프가 용납한여성혐오주의로 상처 입은 딸을 외면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차에 탔을 때 누구보다 날 사랑하는 줄 알았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 P332
이곳은 망명과 기회의 나라였다. 거대한 실험. 세계제일의 나라. 그곳에는 자체의 결점이 있고그것도 치명적인 결점이 대부분이지만, 절망은 그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말을 더듬는 아저씨가 그 증거였다. 그는 자신의 외로움을 키울 수 있었지만 지독한 패배감에 젖거나 자기감정에 몰입하지않았다. 마음속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을 안고 있지만 노래를 불렀다. 자신이 기댈 수 없었던 아버지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의 말을 앗아간 폭력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의 고통은 냉소를키우는 변명이 되지 않았다. 그는 분노를 방패처럼 들지 않았고 그압력 아래에서 무너지지도 않았다. 삶은 그에게 주목받지 못하는목소리를 주었으므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해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은 것이다. - P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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