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의 압박이 갈수록 더해가고 있다. 특히 미국인들이 내 정신을 엄청나게 압박한다. 그들은 내가 스틸웰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공산당과 타협하기를 강요한다. 제국주의 속셈을 완전히 드러냈다. 스틸웰은 워싱턴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싸움에서 의심의 여지 없이 이기고 있었다. 그는 버마의 위기는 장제스가 자신에게 더 이상의 지원을 꺼렸기때문이라고 분명히 못을 박았다. 9월 7일 헐리는 새로운 지휘구조에 관한세부 사항을 명확히 결정하기 위해 충칭에 도착했다. 스틸웰은 공산당을 포함한 모든 중국군의 지휘권을 갖게 될 것이다. 겨우 일주일 뒤 장제스와 스틸웰은 헐리가 요청한 회의에서 또 한 번 충돌했다. - P423
연합국은 장제스가 동맹국들에게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허구를 강요함으로써 미중 관계를 갉아먹었다. 가치가의심스러운 버마를 되찾으려고 계속 시도하기보다는, 장제스가 제한된 자원을 중국을 방어하는 데 사용하도록 허용하는 쪽이 훨씬 합리적이었을 것이다. 설령 매스컴이 보기에는 중국이 광범위한 전쟁 수행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말이다. 처칠이 받아들일 생각만 있었다면장제스를 일본의 대아시아주의와 공산주의에 도전하는 비백인 민족주의저항의 진정한 상징이자 다른 비유럽권 민족들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특사로 활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는 장제스 정권은 생색은 낼 수 없으면서 지나치게 야심적인 목표에 연루된 채 중국 자신의 목표와 우선순위 - P434
를 늘 서구 연합국과 소련에게 양보한다는 인상을 주었을 뿐이었다. 이 씨앗들은 1949년 공산당이 최종 승리를 거둔 뒤에도 이어질 미중의 불신을 싹트게 했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미중 관계는 그 상처가 치유되려면 여전히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P435
장제스는 중국의 미래에 관한 얄타 회담에 전혀 끼어들 수 없었지만 스스로 의문을 품고 있었다. "이번 회담이 중국에 미치는 영향은 클 것이다. 나는 루스벨트가 처칠과 스탈린이 나를 상대로 꾸미는 음모에 가담하지 않기를 바란다." 장제스가 협정 내용을 들었을 때 침울해 하면서 세계가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벌어졌던 패권 경쟁에 또 한 번 던져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3국 정상 회담은 이미 제3차 세계대전의 씨앗을 뿌렸다." 장제스는이렇게 썼다. "루스벨트는 여전히 이 회담을 외교적 승리라고 부르고 있다. 실로 터무니없는 소리다. 얄타 협정에 비밀 조항이 붙어 있다는 소문은 장제스의 의혹을 더욱 증폭시켰다. 마침내 루스벨트는 중국 대사 웨이다오밍을 면담하고 만주와 관련한 비밀 협약이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 사실을 안 장제스는격분했다. - P447
소련은 미국이 일본에서 자신들에게연합 지휘권을 허용할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국민당과 맺은 협정을 더 이상 성실하게 준수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미국과의 마지막 결전에 내몰리는 일이 없도록 애를 썼다. 1945년에서 1946년으로 바뀔 때,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의 군사력이 장제스 정권을 위해서 싸우도록 허용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못을 박았다. 장제스 - P463
는 패트릭 헐리의 갑작스러운 사임으로 당황했다. 헐리는 국무부 내부의 좌파 성향 동료들이 자신의 위치를 흔들고 있다면서 비난했다. 트루먼은 가능한 한 가장 권위가 있는 특사를 중국에 파견키로 했다. 조지 마셜 장군이었다. 미 육군참모총장의 직위를 막 내려놓은 마셜은 양측이 협정에 동의하도록 노력할 참이었다. - P464
냉정하게 말하면, 종전 직후 국민당 치하에서 만들어진 진정한 성취가 있었지만, 국내보다는 국제무대 쪽이었다. 중국의 전시 기여는 새로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5개 상임이사국 중 하나로 규정되면서 다른 나라들이 안전보장이사회에 상정하는 안건에 거부권을 행사할 권리를 갖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중국은 또한 그 밖의 모든 새로운 국제기구 내부에서 한 자리를 차지했다. 1945년까지도 여전히 세계 문제에 있어서 완전하고 동등한 주권을 가진 비서구 국가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영국과 프랑스는 인도가 독립을 쟁취했지만 여전히 그들 제국의 많은 부분을 유지했다.) 중국의 지위는 국가 자체보 - P467
다 훨씬 더 중요했으며 1937년 전쟁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반 식민국가이자 납작 엎드린 채 와해 직전이었던 모습과는 깜짝 놀랄 만큼 대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일단 내전이 시작되자, 국민당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대부분장제스의 판단 착오 때문이었다. 항일전쟁 동안, 장제스는 예상했던 것보다훨씬 형편없는 역할을 했다. 내전 중에는 판단력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특히 이웃 소련의 강력한 지원을 업고 마오쩌둥을 지탱하는 공산당의 심장부였던 둥베이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전선을 확대하기로 결정한 것은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 P468
중국 내에서 좀더 분명하면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더욱 의미 있는사실이 있다. 자국 내에서는 국민을 결속시키고 국제 정치 무대에서는 중국을 대결보다는 협력적 행위자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해 항일전쟁을 이용하고있다. ‘항일전쟁단어는 중국에서 중일전쟁을 가리키는 보통명이라는사로 남아 있다. 그러나 ‘반파시즘 전쟁‘이라는 용어도 흔하게 사용되어왔다. 특히 작가들은 중국의 저항을 단순히 일본에 맞서는 개별적인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추축국에 대한 집단 저항의 일부로 묘사하려고 한다. 여기에 함축된 의미는 명백하다. 더 이른 시기에 자신들의 기여가 필요했을 때 중국은약속을 지켰다. 이제 또다시 폭넓은 역할과 함께 국제사회에 진입하려는 이때에 자신들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역사 해석은 전쟁 동안 중국에서 미국의 역할을 인정하지만, 항상 미국에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다. 한중국 역사학자는 중국을 주요 세계 강국 중 하나로 만들려고 했던 미국의진짜 목적이 전후 세계에서 미국을 위한 속국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고 결론내렸다.(동일한 문제에 있어서 처칠의 우려를 떠올리게 한다.) 또 다른 동조자는 미국의 외교 정책은 단순히 "그들의 국가 이익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고주장했다. - P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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