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희야, 조선사람들 의식구조가 어떤 건지 너 아니?" 가라앉은 눈빛으로 명희를 바라본다. "아직은 지독한 봉건주의 아닌가요?" "이중구조야. 이를테면 수구와 개화(開化)가 따로 있는게 아니구 함께 있는 거야. 함께 얽혀 있는 거야. 너도 그렇구나도 그 이중구조의 희생물이라 할 수 있어. 신여성이라 일컫는 교육받은 여성들, 그 대부분이 완상품이며 고가품일 뿐 사람으로서의 권리가 없다. 좋은 혼처에서 주문하는 고가품이요돈푼 있는 것들이 제이 제삼의 부인으로 주문하는 상품이다그 말이야. 그러면 진보적인 쪽에선 어떤가. 그들 역시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여자에게 주려고 안 해. 이론 따로 실제 따로, 남자의 종속물이란 생각을 결코 포기하지 않아. 여자가 인간으 - P109
로서 있고자 할 때 인형처럼 망가뜨리고 마는 것이 현실이야. 신여성이 걸어간 길은 완상품이 되느냐 망가지느냐 두 길뿐이었다." - P110
"인간의 심리를 모른다 그 말이야. 집요한 것은 언제나 가해자다. 보복당하리라는 두려움이 있으니까 상대를 뿌리째 뽑아서 후환을 없이하려는 집념, 너 생각해보아. 도둑놈 경우를 생각해보아, 남몰래 도둑질하다가 들키면은 칼을 들이대는 것이그들 본능이야. 배은망덕한의 경우도 그래. 은혜 베푼 상대를모략하고 중상하고 이간질하며 씹고 다니는 것도 자신의 합리화, 배은망덕을 덮으려는 심리 아니겠어?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삭막하고 살아가기가 힘든 거지. 그러나 권선생은 이런 말을 했어. 죄를 짓게 되면 그것을 은폐하기 위하여 또 죄를 짓는다, 그 죄를 또 은폐하기 위해 죄를 계속 짓게 되는데 그게 바로 형벌이라는 거야. 결국 기가 쇠하고 무게 때문에 파멸하며, 후회나 회개가 구원이 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라는 거지. 나 그 말 듣고 많이 위로받았다. 속수무책이라도 덜 억울하더구나." - P116
"우리는 매사를 비극적으로만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는 것 - P147
같소. 독립운동이나 혁명운동도 비극적 색조를 깔아서 그것으로 통합하려는 경향, 물론 우리 민족의 현실은 비극임에 틀림없고 국내에서는 싸운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입지에서 그런감정의 유도誘導)가 화약이나 무기의 역할을 안 한다 할 수는없겠지요. 그러나 지나치게 정서적 면만 부각이 되면 튀겨서부푼 옥수수 같은 소영웅들의 목소리만 요란해지고 실질적으로 거둬들이는 실(實)은 보잘것 없이 될 수도 있을 것이오. 쉽사리 비관주의에 빠질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용기 없는양심 때문에 자기 자신만 갉아먹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게 비관주의의 주범이지요." - P148
조선인들은 모두 순간순간그것을 경험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불안과 공포, 억압에서 빚어진 습성 같은 것이지만 이제는 북녘땅에서 실려오던 신화 같은 것은 없다. 한 줄기 빛도 보이지 않는 어둠만 있을 뿐 전쟁의 함성, 전과(戰)만 대서특필, 전해질 뿐, 모든 것은 일본이파놓은 깊이 모를 수렁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창씨개명, 조선어 금지, 지원병 제도, 민족신문의 폐간, 노동력 차출, 식량공출, 유명무명의 조직 확대, 관리들과 학교 교사까지 준군복(服)인 카키빛 국민복으로 갈아입은 지도 오래이며 중학교는 물론 여학교까지 교련이라는 명칭에 군사훈련이 실시되고 있었다. 친일파는 친일파대로 우국지사는 우국지사대로 서민은 서민대로, 가진 사람 못 가진 사람, 지식인 학생들, 장사하는 사람, 막노동꾼, 농민, 고기잡는 사람, 하급관리, 월급쟁이들 할 - P154
것 없이, 각기 위치와 관점은 다르지만 보다 가혹한 수난이 이민족에게 닥쳐오고 있다는 예감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그것은거의 본능적으로 감지되는 것이며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젊은 엄마에게도 어느 순간 불안과 공포는 찾아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 P155
"우리가 이 순간 바보같이, 미치광이가 되어 술을 마시고지만, 또 손 하나 발 하나 내밀 수 없는 철저하게 무력한 상태에 놓여 있지만 우리는 항복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민족주의는 결국 자아에 대한 방어요 민족적 존엄은 결국 내 자신의존엄이기 때문이다. 다 빼앗기고 벌거숭이 되어도 우리는 항복하면 안 돼, …" - P16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