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가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숱한 건물이었다. 한없이 넓고 하얀 가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카키빛군용차, 마차, 인력거, 바람에 서걱거리던 가로수, 무리지어 가는 사람들, 꽃잎 같은 아이들이 있고 행진하는 일본 병정, 그모든 것이 소리 죽은 채 땅속으로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땅속으로 꺼져 들어가고 있었다. - P13

일본은 이번 전쟁에서 속전속결, 국지전으로 결과가 날 것으로 믿으려 했지. 장개석(蔣介石)이든 모택동(毛澤東)에 의해서든 중국이 통일되기 전에, 사실 서안사건(西安事件) 후 장개석이 공산당 토벌을 중지하고 항일로 돌아선것과 중국 국민의 여론이 한결같이 항일로 굳게 뭉친 것은 일본에게 더 기다릴 수 없는 초조감을 안겨주었고, 과거에는 물 - P28

론 근자에 있는 만주사변 역시 속전속결, 국지전으로 계속 재미를 본 그 단꿈도 버릴 수 없었고, 때에 따라서 불안이나 불확실하다는 것이 결단력을 부추기고 자신을 부추기는 경우가 있지. 결국 일본은 시기상조를 주장하는 신중파를 누르고 전쟁으로 건너뛴 건데, - P29

일본은 거대한 공룡에 물린 격이고 헤어날 수 없는 늪에 빠진 거다. 그들은이미 국가총동원령을 선포했고 인원과 물자를 모두 전쟁에 투입한다는 것인데 인원과 물자에는 한계가 있고 그 한계에서 물리적으로 일본은 무너지기 시작하는 거야. 시간은 힘을 소모하고 자리는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인원과 물자가 엷게 깔릴 수밖에 없고 성글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면 결국 녹아버리게 돼 있어. 엷어지고 성글어지고 힘이 빠진 곳을 지금 팔로군(八路軍)이뚫고 있는 게야. 장개석은 오히려 일본은 도외시하고 전쟁 후중공에 대비하여 군사력 소모를 견제하고 있는 형편이며 국민당에서 이당활동제한변법(異黨活動制法)을 내놓은 것만 보더라도 그간의 사정을 알 수 있지. 그러나 일본은 끝없는 늪인 줄 - P29

알면서도 고통스런 행군을 아니할 수 없게 돼 있다. 일본을 위해 중재에 나설 나라도 없고 전쟁물자를 대주기는커녕 팔아주는 곳도 없어. 작년에는 미국에서 미일(美)통상조약을 폐기했고 영일(英日)회담은 결렬, 국제연맹이사회에서는 중국원조의안을 가결했고, 뿐인가, 여태까지 소련은 무제한으로 중국을원조해왔거든. 중국에서 손 털고 철군하는 것 이외 일본은 달리 방법이 없다. 그것은 패전을 항복을 의미하는 거니까 늪이든 지옥이든 갈 데까지 가보자, 한 가닥 희망은 지금 구라파에서 독일이 전쟁의 주도권을 잡았다는 것과 국공(國共)이 분열하기 시작했다는 점인데 그러나 일본은 너무 깊이 물려버렸고 바닥이 나버렸어. 문제는 우리다. 우리 민족의 운명이다." - P30

총칼과 교지(智)로써 우리 속에 가두어진 조선 민족, 성질사나운 놈 있으면 잡아먹고 지혜로운 놈 있으면 잡아먹고 먹음직스러우면 잡아먹고 허약한 놈 잡아먹고 나머지는 부려먹으면서 필요할 때 조금씩, 유사시에는 비상용이고, 분명 볼모는 아니다. 일본이 강탈한 강산에 노닐던 짐승들이다. 그들 재산 목록에 들어 있는 것이다. 어찌하여 이같이 하늘과 땅 사이에 법이 없는가. 그러나 법을 바라는 자는 어리석고 어리석은 자는 죄인이 되어 가둠을 당하며 모든 것, 생명까지 박탈당해야 한다. 이 무법의 벌판을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걷고있는 걸까. - P58

처녀들에게도 앞날은 있는 걸까. 칼의 문화, 유곽문화(遊廓文化), 그것도 문화의 범주에 속하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으나 여하튼 일본 군화가 지나간 곳이면 맨 먼저 어김없이 서는 게 유곽이다. 그러고 보면 칼과 섹스는 불가분의 관계인 것 같고 생과 사의 윤회인 것 같고, 이 미망(迷妄)의 유전(流轉)은 진정 끝남이 없는 것인가. 유곽으로 끌려온 조선의 딸들, 그것은 죽음인가 삶인가.
죽음도 아니며 삶도 아니다. 그럼 그것은 무엇인가. 땅도 빼앗기고 삶의 터전도 다 빼앗기고 마지막 남은 딸을 팔아넘긴부모의 그 죄업의 생애를 전율 없이 생각할 수 있는가. 공장 월급의 몇 달치 선불이라 속이고 얼마간 금액을 떨어뜨린 사내들은 딸을 끌고 간다. 가난과 생명의 존재는 이토록 처절한 것인가 참 그렇다! - P59

하얼빈을 지나 멀리멀리 우수리강과 합류, 노령 하바로프스크까지, 송화강은 가히 만주의 젖줄이며 대지의 생명선,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다. 땅문서가 없었던 땅, 땅임자도없었던 땅, 흑룡강 우수리강에는 어족(族)이 지천이며 사계절유목과 수렵, 나무열매의 채집으로 굳이 땅을 일구지 않아도넉넉했던 삶의 터전, 기름진 망망대륙인 만주땅, 대궁(大弓)을사용했었다는 동이족(東夷族)이 송화강 따라, 우수리강 흑룡강을 건너 시베리아 벌판인들 아니 넘나들었다고 어찌 단언하리.
강물은 청록빛, 청자靑磁를 빚은 물빛인가, 고구려의 남정네가 이 강물에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았을 것이다. 고구려의 아낙이 이 강가에서 빨래를 했을 것이다. 지난날은 모두 아름답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날이 설사 질곡의 하늘 밑이라 한들 어찌 오늘만 할 것인가. 그 옛날 나라의 기틀을 잡아주고, 무지몽매하여 고구려에서 보낸 국서(國書)도 오직 읽는 이가 왕인(仁)의 자손 한 사람뿐이었다던지, 그런 그들에게 지식을 전달해주 - P85

고, 죽통에 밥 담아 먹는 그들에게 도예를 가르치고 불상을 바다에 띄워 보내주고 그렇게 예술을 전수해주었는데 우리는금 저들에게 야만족으로 매도되고 있다. 금치산자로
선고받은 것이다. 어느 나라 지도에도 조선은 없고 조선이라는나라는 없는 것이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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