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우리 땅을 강점하여 내 민족을 핍박하고 착취하는데 대하여 반대하는 것을 사회주의라 한다면 저는 사회주의자겠지요. 조선은 지금 정권 운운할 처지도 아니며 국토는 잃고민족이 말살되어가는 형편인데 반일이면 되는 거지, 기치를 선 - P237

명히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리고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고 생존의 권리를 박탈하는 경우가 비단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간에만 있는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기업과 노동자의 경우에도생존을 외치고 권리를 주장하면 이런 경우 사회주의자라는 못을 박기도 하더군요."
유인실은 조롱하듯 말했으나 적개심을 나타낸 것은 아니었다. 조용하는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재미있습니다. 생각보다 유선생은 훨씬,"
하다가 조용하는
"여자들이 빽빽 소리를 지르는 걸 보면 내일 당장 독립이 온다 하더라도 눈살이 찌푸려지는데 유선생은 목구멍이 찢어지는 소리 대신 주먹으로 툭툭 치는군요. 그런데 남자도 하기 어려운 일을, 유선생께서는 초지일관하실 작정입니까?" - P238

"조선사람 전부가 임금노예로 떨어진다 할 것 같으면 상대적으로 조선사람 전부가 결사대로 들어가자 그런 말도 나옴직한데 정복자나 피정복자 쌍방의 방향이 화살 가듯 그렇게 곧게나 있는 것은 아니며 제아무리 욱일승천(旭日昇天)한다는 일본의기세이기로, 또 한편 한 사람의 친일파도 없는 조선 민족이라가정하더라도 말입니다. 역사의 역학적 방향과 인간의 그것과반드시 일치하는 것일까요?"
"절망적이군요. 침략하는 일본이나 짓밟히는 우리들 모두는 의지 밖에서 역사에 희롱당하거나 혜택을 받는다 그런 얘긴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이 말살당하느냐 안 당하느냐 그것은 우리 자신들에게 달려 있는 거구, 친일파의 존재가 아니었던들 우리의 사정은 좀 달라져 있었을 거예요. 길은 형편 따라 우회할 수도 있고 질러갈 수도 있겠지만 생각은 화살 가듯 곧아야 한다고 믿어요." - P244

제 민족까지 덫에 쓰는 고기로 삼았다는 얘기는 제남사건(濟事件)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제 민족까지 덫의 고기로 쓰는 수법이 어디 제남사건에만 했을까마는, 아무튼 조선은 먹었고만주를 수중에 넣는 것이 숙원이던 대일본제국, 그것은 또한시간문제이기도 했었는데 재작년 삼월남경(南京)정부가 북벌재개의 성명과 더불어 결행에 옮겼을 때 일본은 일본거류민의재산과 인명을 보호한다는 구실 하에 천진 주둔군의 일부, 육사단에서 오천 명을 뽑아 제남에 파견하였는데 정작 남경정부의 혁명군은 장작림 군대와는 교전이 없었고 평화적으로 입성했던 것인데 일본군이 도발하여 중국 정부의 직원을 사살하고마약 밀매자인 일본인 십여 명을 참살, 그 시체들을 전쟁으로가는 덫에다 장치했던 것이다. 일본 국내에서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일본 거류민 수백 명이 학살되었다는 소문이 유포되었고신문도 덩달아 그것을 과대 보도, 전쟁 열기에 불을 지르기 시 - P259

작하였으나 그들의 뜻대로는 되지 않았다. 장작림을 괴뢰로 하여 서서히 만주와 몽고를 먹어치우려던 일본의 정부측 복안이나 가와모토 다이사쿠(河本大作] 현역 대좌로 하여금 장작림을실은 열차를 폭파케 하고 그 혼란을 틈타서 만주를 점령하려던 관동군(關東軍)의 계책도 다 실패하고 도리어 폭사한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張學良)에 의해 국민정부는 만주의 군벌과 합작하여 중국은 통일되었다. 일본으로선 이가 갈리게 분통 터지는일이었던 것이다. - P260

이들이 명치유신을 꾀하여 그야말로 천우신조, 천재일우라 할까. 열강의 뒤꽁무니를 슬금슬금 살피다가 노쇠한청국, 국내 사정이 엉망으로 돼 있는 러시아를 물어뜯은 것은전통적인 그 칼과 황도사상, 그러니까 칼은 힘으로, 황도사상은 명분으로 둔갑한 거지. 그리고 그 밑바닥에 있는 것은 공범자끼리의 굳은 악수, 털어먹으러 가자, 털어서 갈라 먹자, 음흉스럽지. 국민이나 실력자나 서로의 지분(分)을 생각하면서 멀쩡한 얼굴로 천황을 향해 충성을 맹서하거든. 저희들끼리 싸우다가도 공동 이해에 처하면 칼은 안으로부터 밖으로 눈 깜짝할새 선회하는 일본의 특성이야말로 황당무계한 것도 진실이 되며 진실에 대한 고뇌가 없기 때문에 참다운 뜻에서 사상도 종교도 부재야. 차원 높은 문화예술이 없는 것도, 그들의 음악이나 춤을 보아. 단조로운 몸부림, 힘의 폭발이 없는데 칼을 들면잘 싸우거든. 한마디로 천황을 아라히토가미로 모시는 황당무계한 것도 방편에 불과한 건데, 충성의 대상이 다양하다. 일본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천황에서 장군, 번주(藩), 잘게잘게 썰어내려 오면 새까만 말석의 무사, 그들 밑에 따른 자에게는 그들이 각각 충의의 대상이라, 충의의 그 곁에는 언제나 칼날이 - P275

번득이는데 그런 면에서도 우리는 민족주의의 희박함을 감지할 수 있지. 아녀자도 가슴에 비수를 품고 주군(君)이나 부모의 원수를 찾아 방랑하는 기풍이 성행하고, 그러니 그들의 적은 오랜 역사 속에서 그들 자신의 동족이었다… -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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