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가지 문제는 농민의 자각으로만 해결될 수 없고 지주들의 민족의식의 각성, 먼 후일을 내다보는 눈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 오늘 이와 같은 상황으로 치닫는다면 결국, 지주나 경작자는 아귀다툼, 메울 수 없는 도랑으로 끝일 뿐만 아니라 다 같이 일제의 밥이 되어 쓰러질밖에 없는 운명, 결코 지주들은 영원한 친일파로 안주할 수 없거니와 땅에서 내어쫓기는 농민들의 전철을 밟게 될 뿐, 그것이 김범석의 사견이었다. - P158

최서희라는 여자는 예외라는 것을 알면서도. 대단한 여자다,
구마가이 같은 베테랑도 공략하기 어려운 여자다. 서장이 그런말을 하지 않았어도 구마가이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 새삼 무서운 여자라는 것을 깨닫는다. 말이 신랄하다든가 의미가 깊다든가 그런 것보다 서희가 자아내는 분위기에는생래적(生來的)인 당당함, 그것이 구마가이를 위압했다. 당당함뿐이랴. 발톱을 감춘 암호랑이 같은 영악함이, 언제 앞발을 들고 면상을 내리칠지 모른다는, 그것은 다분히 선입견이 조작하는 환상이기도 했으나, 분통이 터진다. 그러나 터뜨리지 못하게 서희의 말에는 잘못이 없었고 허식이나 수식이 없다. 허식도 수식도 없다는 것은 괘씸하다. 일본서는 최상급에 속하는여자를 내보였는데 눈썹 하나 까닥이지 않고 오히려 불쾌해하다니, 일본이 모욕을 당하였다. 조선사람 거반이, 친일파만 빼면, 낫 놓고 기역자 모르는 무식꾼조차 일본을 모멸하고 비웃는 것은 다반사가 아니던가. 구마가이 경부는 그것을 모르는바보인가. 바보가 아니다. 그들의 모멸이나 비웃음은 원성이요약자의 자위다. 그러나 서희는 원성도 자위도 아닌, 조선의 문화, 그 우월의 꽃 속에 앉아 허식도 수식도 할 필요가 없는, 제얼굴을 내밀고 있으니, 날카롭고 예민한 사내다. 엷은 그 입술이 상당히 깊게 넓게 느낀다. - P171

"앞으론 제발 그러지 말게. 나는 너의 의기나 총명함을 아끼는 사람이다. 부잣집 아들이라 해서 충고하는 건 아니야. 민족이 다르고 인종이 다르다 하여도, 설사 이해상관이 있다 하여도 상대에 따라서 호의를 가지는 것은 자연스런 일 아닐까?"
"......."
"그럼 들어가 보게."
윤국은 겨우 고개만을 숙이며 인사를 했다.
"음."
구마가이는 픽 웃으며 윤국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직접 학생들을 다룬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구마가이 경부가 좀 점잖은편이라는 소문은 있었다.
‘호의를 가지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라.……… 흥, 저런 자를 믿느니 늑대를 믿겠다.‘ - P175

"상용相容할 수 없는 것이 공존하기 때문에 갈등한다. 금수나미물과 달리 생존이나 종족보전 아닌 것으로도 죽음을 걸고 싸운다. 감정으로 달겨들려 하지 말아라. 어리석은 짓이며 결국엔 자기 자신조차 책임질 수 없는 그런 지경에 빠지게 된다.
각은 끝이 없는 게야."

"항상 그런 말로 식자들은 문제를 회피해왔지요. 입으로만떠들다가 끝나는 거지요. 좋습니다. 어머님께서, 또 형님이 늘말씀하시듯 저는 아직 어립니다. 미숙합니다. 앞으로 몸으로부딪쳐가며 머리 아닌 심장으로 알아야겠습니다. 하지만, ‘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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