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項梁者楚將項燕子也嘗殺人與兄子籍避仇吳中籍少時學書不成去學劍又不成項梁怒之籍曰書足以記名姓而已劍一人敵不足學學萬人敵於是項梁乃敎籍兵法籍長八尺餘力能扛鼎才氣過人會稽守殷通聞陳涉起欲發兵以應涉使項梁將梁乃使籍拔劍斬守頭佩其印綬門下大驚擾亂籍所擊殺數十百人一府中皆慴伏莫敢起梁乃擧吳中兵使人收下縣得精兵八千人梁爲會稽守籍爲裨將徇下縣籍是時年二十四〈史項羽本紀〉

○ 田儋者故齊王族也自立爲齊王率兵東略定齊地

○ 韓廣自立爲燕王

○ 周市立魏公子咎爲魏王

항연의 아들인 항량은 초나라 장수였다. 형의 아들인 항적(항우)가 글도, 검술도 중도에 그만두자 항량이 노하였기에 그가 말하길 ˝글은 성과 이름만 쓸 줄 알면 되고 검술을 한 사람을 대적하는 것인데 배울 것이 있겠습니까. 만 사람을 대적하는 병법이 있다면 배우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항량이 항적에게 병법을 가르쳤다. 회태수가 진승의 군대에 대응하고자 항량을 장수로 삼았으나 회태수를 죽이고 오히려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항량은 오중의 병력을 모두 동원하여 정예병 8천을 얻었다.
옛 제나라 왕족이었던 전담이 자립하여 제왕이 되어 제나라를 평정하였다. 한황이 자립하여 연왕이 되었다. 주포가 위나라 공자를 세워 위왕으로 세웠다.

【癸巳】二年二世數誚讓李斯居三公位如何令盜如此李斯恐懼乃阿二世意以書對曰賢主必能行督責之術以獨斷於上群臣百姓救過不給何變之敢圖二世說(悅)於是行督責益嚴稅民深者爲明吏殺人衆者爲忠臣刑者相半於道而死人日成積於市秦民益駭懼思亂〈出李斯傳〉

○ 趙將李良襲殺趙王張耳陳餘收散兵擊良乃求趙後立趙歇爲趙王

○ 二世益遣司馬欣董翳佐章邯擊盜陳王敗走其御莊賈殺陳王以降

○ 陳人秦嘉起兵於郯聞陳王軍敗乃立景駒爲楚王景駒在留沛公往從之張良亦聚少年百餘人道遇沛公遂屬焉良數以太公兵法說沛公沛公善之常用其策良爲他人言皆不省良曰沛公殆天授故遂從不去〈出本傳〉

○ 項梁以八千人渡江而西

○ 黥布者六人也姓英氏亡之江中爲群盜聞項梁渡淮引兵屬焉

○ 項梁衆至六七萬人軍下邳進擊秦嘉景駒殺之

○ 沛公往見梁梁予沛公卒五千人

○ 項梁使項羽別攻襄城襄城堅守不下已拔皆坑之

○ 梁聞陳王定死召諸別將會薛計事沛公亦往焉居鄛人范增年七十素居家好奇計往說項梁曰陳勝首事不立楚後而自立其勢不長今君起江東楚蠭(蜂)起之將皆爭附君者以君世世楚將能復立楚之後也於是項梁然其言乃求得楚懷王孫心立以爲楚懷王從民望也〈出史紀項羽記〉
項梁自號武信君

진나라 2세 황제가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자 승상인 이사를 꾸짖었다. 그는 자신의 지위가 박탈될까 두려워 법을 더 강화하면 도적이 감히 일어나겠느냐 아부하였다. 이에 황제가 법을 더 강화하자 세금을 더 많이 거두는 이가 현명한 관리가 되고 사람을 죽이는 이가 충신이 되었다.
조나라 장수 이량이 조왕을 습격하여 죽이자 장이와 진여가 이량을 공격하고 조나라를 구하고 조왕을 세웠다.
이세 황제가 사마흔과 동예를 보내 장감을 도와 반란군을 치게 하였고 이 때 진승은 패주하고 자신의 마부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장량이 소년 100여 명을 모아 패공을 만나 그에게 조언을 하였는데 패공은 그 계책을 항상 따랐고 이에 그에게 정착하였다.
항량의 군대가 어느덧 6~7만이 되었다.
항량이 진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장수들을 모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때 패공과 범증도 참석하였다. 범증이 진승이 오래 가지 못한 이유를 설파하고 항량이 옳다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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