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분쟁의 기원
제3세계
국가에 이바지하는 종교. 종교 민족주의
단일민족주의의 역설
독이 된 9.11테러, 이라크 전쟁

팔레스타인인은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다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 - P746
국의 위임통치령이 된 그 지역에서 수 세대에 걸쳐 거주해 왔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난민은 대부분 자신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반면에 유대인의 기억은 완전히 다른 성격을 띠었고, 그 핵심은 나치 치하에서 겪은 박해의 역사였다. 1933년 이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대열에 전쟁 이후 새로운 이주자 대열이 가세했다. 유대인 이주민이 보기에 현대사가 시사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들을 내부와 외부의 적으로부터보호해 줄 독자적인 국가 건설이라는 지상 과제였다. 아랍 난민도 비슷한 관점을 공유했지만, 아랍인이 생각한 새로운 팔레스타인 국가는 설립자들이 유대인 국가로 규정한 이스라엘과 판이했다. 따라서 만약 팔레스타인 난민이 모두 팔레스타인 땅에 있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유대인 인구보다 수가 많아지면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 터였다. 유대인이 아랍인보다 수적으로 적어지면유대인의 기대 수명이 더 길다 하더라도(이스라엘은 수십 년 만에 기대 수명이 가장 긴 나라 중 하나로 떠올랐다.) 다수의 팔레스타인 아랍인을 배제하지 않는다면 유대인 국가의 전망은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았다.(그리고 팔레스타인인의 출생률은 20세기 마지막 10년까지 매우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결과적으로 팔레스타인인은 자기 나라를 갖지 못한 채 계속 요르단강 서안에 세워진 난민촌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역사적 기억의 공유는 불가능해 보였다. - P747
제3세계의 정체성은 탈식민화와 국가건설의 경험에서부터 공통의 문명에 대한 믿음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다. 모든 상황에서 비서구 세계는 서로, 그리고 서구 국가들과 함께 초국적 경험을확대해나갔다. 그 결과 국가마다 특정한 문제와 전반적인 국제적 사안이 한편에서 ‘현실‘을 규정하고 있는데도 초국적 사고를 더욱 심화했다. 1950년대에학문 분야와 비학문 분야에서 ‘현실주의‘가 유행하면서 이러한 초국적 층위) 를 가려 버리곤 했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 P765
국가에 이바지하는 종교, 그리고 종교에이바지하는 국가는 초국적 사고와 열망이 뚜렷하게 확대되어 가던 시대에 나 - P808
타난, 여러모로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왜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었을까? 그것은 분명히 민족 공동체를 희생해 초국적 개인을 드높이고, 국가의 권위는 꾸준히 약해져 가는데 비국가 행위자의 힘은 강해져 가는 시대 경향에 대한 반발이었다. 종교 민족주의가 어떤 의미에서는 국가를 구제했다. - P809
이렇게 한쪽으로 치우친 힘의 방정식이 냉전의 전부였다면 냉전은 그렇게 오래 이어지지 않았을 터였다. 우리는 소련뿐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을 포함한 다른 사회주의국가들이 세계 각지에서 사회주의사회가 미래의 물결이라는 인상을 심으며 자본주의와 서구에 반대하는 여론의 관심을 끈 덕분에 세계에서 많은 영향력을 행 - P824
사할 수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냉전의 군사적 토대뿐 아니라 이념적토대에 대한 도전이 세계의 지정학적 지도를 뒤흔들고 뒤바꾸어 놓는 데 이바지했다. 이러한 도전은 근본적으로 초국적이었고, 전 세계적인 인권 운동과 세계 평화를 위한 운동에서 소련과 서구 모두에 맞서는 이슬람 근본주의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다. 냉전 종식에는 이런 모든 요소가 담겨 있었고, 지정학적 ‘현실realities‘만을 원인으로 지목한다면 기본적으로 동어반복일 것이다. 즉 냉전이 그러한 ‘현실‘에 의해 규정되어 왔다고 본다면 ‘현실‘이 변해서냉전이 끝났다는 주장은 뻔한 이야기일 따름이다. 지정학적 게임이 벌어지는무대가 크게 변해서 점차 게임의 성격이 달라졌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더도움이 될 것이다. 핵무장국도 여전히 존재하고 국제 관계와 국가 간 경쟁도활발하게 이어지고 있지만, 초국적 세력이 꾸준히 그 자리를 침범해 가는 중이었다. - P825
20세기 말에는 많은 나라에서 단일민족주의를 강화한 경쟁적인 기억이 더욱 두드러졌다. 예를 들어 중국과 일본은현대에 양국 간에 벌어진 전쟁, 특히 1930년대 일본의 중국 침략에 관한 공식기억을 두고 충돌했다. 민간인 저자들이 집필하지만, 수업에 도입하기 전에공식 검인정을 받아야 하는 일본 역사 교과서가 1980년대 이후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아시아 국가들은 도쿄 당국이 최근 과거에 관한 수정주의 교육을 부추기고, 일본군이 자행한 침략과 만행을눈가림하려 한다는 비판을 제기했다. 반대로 일본 일각에서는 일본을 비판하는 나라들이 공식 역사 서술에서 희생자 수를 비롯한 전쟁의 여러 가지 양상을 과장했다고 비난했다. 일본 민족주의자들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아시아를 ‘해방‘하려고 치른 전쟁으로 보았지만, 중국 민족주의자들은 일본 제국주의가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보다 훨씬 나빴다고 주장했다. 한국과 필리핀 등의 민족주의자들도 중국에 동조했다. - P833
20세기 말의 세계는 이렇게 초국적인 존재들이 국경을 초월한 다양한 층위의 활동과 감정을 보여 주는 만화경 같았다. 초국적 존재는 대부분 국경이낮아지고 국경을 초월한 정보 획득과 의사소통이 쉬워지면서 생긴 새로운 기회를 활용해 자신과 타인을 위해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려고 했다. 하지만 세계를 폭력과 혼란의 도가니에 몰아넣을 활동을 벌인 부정적인 존재도 소수있었다. 결코 초국적이 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떠했을까? 물론 세계에는 초국적이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그중에는 다른 나라나 사회와 물리적으로 단절된 사람도 있었고, 원칙과 취향, 성격 등을 이유로 스스로 고립을 선택한 이도 있었다. 많은 사람이 초국주의의 일부 측면에는 반대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 P859
2003년에 워싱턴이 세계 여론을 무시하고 이라크를 겨냥한 군사작전을 개시하면서 미국의 정책에 대한 적극적 지지가 뚜렷하게 약해졌다.(이라크를 침공하기 전에 전 세계적으로 600만에서 1000만 명에 이르는 사람이 임박한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한 것으로 추산된다.) 미국이 이라크 공격을 감행하면서내건 표면적 이유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테러리스트들을 숨겨 주고,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 살상 무기‘를 개발했다는 것이었다. 이 중 어떤 혐의도 입증되지 않았지만, 조지 W. 부시는 필요하다면 미국 단독으로라도 행동하려 했다. 나중에서야 부시의 고위 보좌관들이 그러한 혐의와 모순되는, 일부는 미국 정보기관 관계자들이 제공하기도 한 정보를 무시했고, 심지어가장 가까운 동맹국인 영국조차 이라크 공격에 회의적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라크 공격을 감행하는 데 유엔의 동의를 얻기가 무척 어려웠지만, 미국은 뜻을 꺾지 않고 2003년 3월에 폭격을 개시하고 이라크를 침공했다. 영국도 군대를 파견했지만, 에스파냐와 프랑스처럼 공개적으로 전쟁을 비판한 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도 있었다. (프랑스는 이라크 공격에 나선 미군 항공기가 프랑스 상공을 통과하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미국의 일방주의는 국제사회뿐만 아니라 미국 여론도 상당부분 멀어지게 했다. 그러나 세계가 워싱턴을 비판하면할수록 부시 행정부의 태도는 더 완강해지는 듯해 보였다. 초국적으로 연결된 세계, 그리고 적어도 이라크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세계와 유리된 듯 보이는 미국 정부 사이에 간극이 뚜렷하게 존재했다. - P867
과거사 문제는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도 극도로 어려운 문제임이 드러났다. 독일, 프랑스와 달리, 일본과 중국은 여전히 과거를 극복하지 못한 채다. 일본과 그 식민지였던 한국도 불행한 식민지 경험에 관해 충분히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이 세나라는 경제적으로 분명하게 서로 의존하고 있지만, 이른바 "역사 문제historyproblem"로 인해 정치적·심리적으로는 더 가까워지지 못하고 있다. 세 나라의 - P886
교사와 학자들이 앞장서 공동으로 책을 집필하는 기획을 시도했다. 하지만이런 노력은 종종 바람직하지 못한 사건으로 좌절을 겪곤 했다. 대표적인 예로 2001년에 일본에서 몇몇 국수주의 저자가 과거를 오로지 일본의 관점에서 본 일국 중심의 국수주의적 역사 교과서를 출판한 사건을 들 수 있다. 이교과서가 일본 문부성의 검정을 통과하면서 한국과 중국에서 즉각 반발을불러일으켰고 민족주의에 불을 붙였다. 다행히도 초국적 성향을 띤 역사가들도 세기 전환기에 더 가시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함께 모여 일본의 우익 교과서가 촉발한 이 불행한 사태에 대응하고자 했다. 세 나라의 역사학자들은 매년 서울과 도쿄, 베이징에 모였다. 2005년에는 이들 중 일부 학자들이 19세기 이후에 초점을 맞춘 동아시아 근현대사 저서를 공동으로 출판했다. 저자들은 책 서문에 과거에서 배우고 평화와 민주주의, 인권을 부각하는 동아시아의 미래를 도모하고자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이 책은 일본이 과거에 한국을 강점하고 중국을 공격한 일을 통렬하게 비판했지만, 세 나라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가 힘을 합쳐 상호 이해를 증진하려 한 노력도 언급했다. 이 책은 수백만 명이 강제 이주와 기아로 목숨을 잃은, 처참했던 대약진이나문화혁명 같은 공산당 정권 치하 중국의 심각한 오점을 언급하지 않은 점에서 결함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 책은 동아시아사 연구를 위한 협력이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징표였다. - P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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