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슬픔에 차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고 했던가? 아니었다. 어떤 새로운 힘이 내 인생에 작용하기 시작했고, 어떤 공간에서는 슬픔이 궁지에 몰리기도 했다. 숲에 가려져 있는 텅 빈 깊은 골짜기를 상상해보라. 그 골짜기는 흐릿하게 안개에 싸여 있다. 그곳의 풀은 축축하고 잡초들은 누렇고 눅눅하다. 폭풍우 때문인지 도끼질 때문인지 참나무 사이에 넓은 빈터가 생겨났다. 산들바람이 불어오고 햇볕이 내리된다. 춥고 슬픈 골짜기는 빛이 담긴 깊은 컵이 된다. 한여름 아름다운 하늘에서는 푸른 영광과 황금빛이 쏟아져내려온다. 지금까지 굶주렸던 빈터로서는 처음 보는 영광과 빛이다.
내겐 새로운 신조가 생겼다. 바로 행복에 대한 믿음이었다. - P7

(이 괄호 속에서 단언하건대, ‘연심‘이 아닐까 하는 모든 의심을 극히 경멸하고 부인하겠다. 처음부터 그리고 교유하는 내내 그런 착각이 치명적으로 어리석은 짓이라는 확신이 드는 경우, 여자들은 그런 ‘연심‘을 품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거친 물결 위로 떠오르는 ‘희망‘의 별을 본 적이 없거나 꿈꾼 적도 없으면서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은 없다). 나와 ‘감정‘은 편지에 깊은 존경심과 끝없는 관심으로 찬 호감을 표현하려고 했다. 다시 말해 상대방의 고통을 모조리 내가 대신 감당해주고 싶다는 애정, 언제나 몹시 염려가 되는 상대방을 폭풍과 번개로부터 막아주려는 마음을 표현했다. 바로 그 순간, 마음의 문이 흔들리더니 빗장과 자물쇠가 열리고 앙심에 찬 ‘이성‘이 힘차게 뛰어들어와, 그 종이들을 모두 낚아채서 읽은 다음 비웃고 지우고 찢어버렸다. 그리고 ‘이성‘은 다시 한페이지밖에 안되는 간결하고 짧은 편지를 써서 접어 봉한 뒤 주소를 써서 부쳤다. ‘이성‘이 옳았다. - P9

은둔자, 만일 현명한 은둔자라면, 내면의 겨울인 그 몇주 동안떠오르는 생각을 억누르고 감정에는 자물쇠를 채울 것이다. 자신의 운명이 가끔씩은 산쥐의 운명을 닮게 되어 있음을 알고 마음이편안해질 것이다. 그리고 자그마한 공처럼 움츠린 후, 삶이라는 벽으로 둘러싸인 구멍속으로 순순히 기어들어가 눈보라가 불어들어와 그 안에서 겨울 내내 꽁꽁 얼어버려도 그러려니 할 것이다. - P29

폴리나 메리는 검고 동그란 눈을 한두번 들어 말없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 입을 반쯤 열었으나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내 의사를 존중해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이런 상태가 오래는 안 갈 거야.‘ 나는 혼자서 생각했다. 여자나소녀에게서 자제력이나 금욕은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아는 여자들은 일상적인 잡다한 비밀이나 종종 느끼는 시시 - P65

껄렁한 감정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만 있으면 수다를 떨었다.
백작의 딸은 예외일 수도 있을 듯했다. 그녀는 싫증이 날 때까지바느질을 했고, 그러고 나서는 책을 들었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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