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벽난로에 기대서서 그녀가 커피 주전자를 들어올리는 모습을지켜보았다. 팔찌에 램프 불빛이 반사되어 부드러운 머리칼끝이 환히빛났다. 어쩌면 저렇게 호리호리하고 경쾌한지. 어쩌면 저렇게 모든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지! 조화로움으로 똘똘 뭉친 존재같았다. 해스킷에 대한 생각이 물러나면서 웨이손은 다시금 그녀를 소유했다는 기쁨에 빠져들었다. 모두 그의 것이었다. 가볍게 움직이는 ‘ 하얀 손과 밝은 머리칼, 저 입술과 눈・・・・ - P150
해스킷과의 결혼이 함축하는 삶의 단계를 허물 벗듯 벗어버린 방식이 얼마나 놀라운지, 그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녀의 모든 면모가, 몸짓과 억양과 암시 하나하나가 그 시기를 의도적으로 면밀하게 부정한결과로 보였기 때문이다. 아예 해스킷과의 결혼 자체를 부정했다 한들그의 부인이던 자아가 싹 사라진 지금의 모습보다 이중적이라는 비난을 받지는 않을 것 같았다. - P157
그녀는 ‘오래된 신발처럼 편안한 사람인 것이다. 여러 발이 그 신발을 거쳐갔으므로, 그녀의 유연함은 서로 다른 갈래의 긴장을 수없이 거쳐온 결과물이었다. 앨리스 해스킷, 앨리스 배릭, 앨리스 웨이손. 그녀는 연이어 각각의 인물이 되며 그 이름들에 자신의 사생활, 자신의 인성, 그리고 미지의 신이거주하는 자기 내면의 자아를 조금씩 떼어두고 온 것이다. - P164
"아, 여자들이야 원래 사소한 문제를 두고 한걱정하니까." 헤일 씨가비타사람 좋은 말투로 우월감을 내비치며 말했다. 두 여자가 좀더 가까이 붙어섰다. 어느 쪽도 입을 열지 않았다. 지방검사가 문득 예의에 어긋났다는 느낌이 든 모양이었다. 자기 앞날도 생각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젊은 정치인처럼 정중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걱정이 한가득인 마나님들이 없다면 우리가 뭘 할수 있겠어요?" 여자들은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고, 마음을 누그러뜨리지도 않았다. - P183
여자들이란, 하며 남자들이 큰 소리로 웃고 화덕에 손을 쬐더니 검사가 씩씩하게 말했다. "자, 이제 헛간으로 가서 그곳도 살펴봅시다." "그게 뭐가 어쨌다고 난리인지 모르겠네." 세 남자가 나간 뒤로 문이닫히자 헤일 부인이 분하다는 투로 말했다. "자기들이 증거 찾고 있을때 우리는 우리대로 소소한 일로 시간을 보내는 게 뭐 그렇게 비웃을일이라고." "아무래도 자기들이 하는 일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요." 보안관 부인이 변명하듯이 말했다. - P192
"수년 동안 마음 둘 곳 없이 공허한삶을 살다가 이제 새 한 마리가 노래를 해주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그 노래가 그치고 적막만 남는다면 정말 끔찍하겠죠." 그 말은 그녀가 아니라 내면의 다른 존재가 하는 말 같았고, 피터스부인은 스스로도 깨우치지 못했던 어떤 생각에 가닿았다. - P201
그 젊은 날의 모습이, 그리고 이십 년 동안 이웃해 살면서도 삶을 갈구하다 죽을 지경에 처하도록 내버려뒀다는 사실이 불현듯 감당하기힘들만치 그녀에게 밀려들었다. "아, 가끔이라도 이 집에 찾아왔어야 했는데!" 그녀가 외쳤다. "그게죄야! 그게 죄라고요! 그건 누가 처벌하나요?" "너무 큰 소리 내면 안 돼요." 피터스 부인이 겁에 질린 얼굴로 위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움이 필요하다는 건 사실 나도 알았을 거라고요! 정말 이상해요피터스 부인. 이렇게 가까이 살면서도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우리 모두 똑같은 일을 겪으며 사는데 조금씩 다를 뿐이지 사실 다 똑같잖아요! 그게 아니라면 당신과 내가 어떻게 이해를 하겠어요? 지금 알게 된 이 모든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아차렸겠어요?" - P202
만사에 규칙이 있으니까. 그 특정한 시기에 식탁보는 왕궁의 복도에 깔린 카펫 사진에서 볼 수 있듯 작은 노란색 구획이 지어진 태피스트리로 만들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다. 그와 다르게 생긴 식탁보는 진짜 식탁보가 아니었다. 이 진짜라는것들이, 일요일 오찬과 일요일 산책과 별장과 식탁보가 오롯이 진짜가아니고 사실 반은 허깨비였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쏟아진 저주가 법을 어긴 데서 오는 자유로움뿐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은 얼마나 충격적이고 멋진 일이었나. 그 진짜 기준이되는 존재라는 자리는 이제 무엇이 차지하고 있을까? 여자의 경우라면남자겠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기준을 세우고 휘터커의 우위표"를세운 남성적 시각. - P214
그녀는 애처로울정도로 왜소한 몸에 마디가 불거진 맨손으로 앞에 선 건장한 거구의남자에게 용감하게 맞섰다. "이봐, 사이크스, 보자 보자 하니까 이제 뵈는 게 없나본데. 내가 너랑 결혼한 지가 십오 년이고 그 십오 년 동안 세탁 일을 했어. 땀흘려죽어라 일만 했다고! 땀흘리며 일하고, 울면서도 땀흘리고, 기도하면서도 땀흘리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그가 야비하게 물었다. "무슨 상관이냐고, 사이크스? 네 뱃속에 들어간 밥도 네 손으로 벌어들인 것보다 비누 거품 가득한 내 세탁통으로 벌어들인 게 더 많아. 이집도 내 땀으로 장만한 거니까 이 집에서 내가 내 맘대로 일할 권리는있어." - P300
그녀는 누워서 지금까지의 결혼생활이라는 여정에 잔뜩 널린 잔해들을 말똥말똥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여정에서 멀쩡히 남아 있는 건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꽃 같은 것은 그녀의 가슴에서 배어나온 짜디짠 물줄기에 진즉 다 잠겨버렸다. 그녀의 눈물, 그녀의 땀, 그녀의 피. 자신은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그에게는 육체적인 욕정만이 있을 뿐이었다. -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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