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유라시아 대륙의 제국과 미개척자들 ~118p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역사학자들은 이 지역을 하나의 전체로 논의하지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19세기 및 20세기 민족국가의 국경에 의해 규정된 단위들에 집중해 왔다. 우리는 이 기간의 중국, 러시아, 일본의 수많은 개별 역사(역사 서술)와 한국과 베트남의 몇몇 개별 역사를 알지만, 중앙유라시아의역사는 거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개별 역사(역사 서술)들 중 이 지역을 서로 연결하는 역사를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별로 없다.‘ 그러나 최근의 몇몇 연구는 이 더 큰 규모(이 지역 전체의 변화를 묘사하는 중요한 개념적인 도구들을 실제로 제시했다. - P78

티무르 이후 유라시아는 독립적인 제국 및국가들로 분리된 채 남았지만, 이들은 몽골인들이 조성한 상호 연결망을 유지했다. 심지어 우리는 우리의 세계화된 근대 세계에 나타나는 여러 특성의 - P81

기원을 15세기 이후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제국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수많은 부침을 겪었지만 점차 세계시장, 지정학적 상호작용, 이주, 역내의 문화 전파는 강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이후 세기들 동안의 더 광범위한 규모의 훨씬 더 집중적인 상호작용을 위한 토대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티무르의 실패가 낳은 즉각적인 여파는 폐쇄(쇄국)로 복귀하는 현상이었는데, 특히 중국에서 이 현상이 두드러졌다. - P82

명나라의 강역은 거의 40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데, 오늘날 우리가중국 본토‘라 부르는, 종족적으로 거의 완전히 한족이 차지하는 땅과 대략맞아떨어진다. 원이나 청과 달리 명은 유목 지역과 목축 지역을 통치한 적이없지만, 1500년 당시에 여전히 지구에서 가장 큰 정치 단위였다. 15세기 초에6000만 명 이상이던 인구는 전성기를 구가하던 16세기에는 최소 1억 5000명으로 늘어났다.
산맥과 주요 하천의 분수계에 의해 구분되는 여덟 개의 거대 지역이 제국의 경제 지리를 형성했다." 이 중 두 핵심 지역, 즉 강남(장강 하류 하곡)과 화북은 각각 제국의 수도를 하나씩 거느리고 있었다. 이 두 수도 지역은 대부분의 부와 정치적인 힘을 축적했다. 초대 황제는 새 수도를 자기 고향과 가까운강남의 남경(즉 남쪽 수도)에 두었지만, 영락제는 북경(즉 북쪽 수도)에 두 번째수도를 건설했다. 비록 왕조는 두 개의 수도를 유지했지만, 북경이 우선적인정치 중심으로 부상했다. - P88

명이 거의300년이나 지속된 것은 황제의 독재적 지배권이 있어서가 아니라 수천 명의헌신적인 민정 관료가 일상적인 공무를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 P94

명 국가와 그 사회는 자급자족적 농업경제를 보호하는 것에 집중하던 내부 지향적인 사회에서 고도로 상업화되고 유동적이고 외부 지향적이며, 소비와 교환에 크게 집중하는 사회로 변모했다. 이러한 변화는 제국의 모든 주요 제도에 커다란 긴장을 부과했다. 은이 대규모로 유입된세기 내내 명의 정치가와 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내재적인 방식을 변화시켜 국가의 힘과 인민의 복지를 보존할 것인지에 관해 끊임없이 논쟁을 벌였다. - P98

오늘날의 만주는 세 개의 생태 지대에 걸쳐 있다. 서부는 초원인데 일반적으로 몽골인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목축 유목민들은 주로 양과 말로 생계를 유지한다. 북쪽은 삼림으로서 시베리아의 연장이다. 이 지역에는 사냥꾼들과 임산물(산삼, 버섯, 약간의 금) 채집자들이 살았는데 대단히 다양한 부족집단이 있었다. 남만주, 즉 요녕(랴오닝)은 농민들을 부양하는 기름진 경작지를 품고 있는데, 농부들은 주로 남쪽에서 이주해 온 한족이었고 만주족은 일부였다.
이들 민족과 명의 관계는 이른바 ‘기미‘라 불리는 전통적인 정책에 의해 형성되었는데, 이 정책하에서 명의 관리들은 그들을 내버려 두는 대신에교역 허가증을 주고 국가를 다스리는 현지 우두머리의 작위를 주었다. 만주부족들 입장에서는 장성을 넘어 물품을 교환하는 것이 이득이었다. 또한 명입장에서는 이것이 그들을 정복하는 것보다 편리했으므로, 16세기 말까지 상대적으로 안정된 관계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세계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만주의 역동적인 지도자들은 새로운 부의 원천을 중앙집권적 국가 건설에 썼다. - P114

만주족의중국 정복은 결코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경합하는 세력 간의 수많은 불확실한 상호작용 및 더 광범위한 지정학적·기후적 환경, 개별 결정들에의해 좌우되었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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