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정치적 탈식민화가 어느 정도 종식되고 경제적 탈식민화가 진전하고 있기는 하지만, 정신적·문화적 탈식민화는 아직 제대로 시작하지도 못했다는 것이 포스트 식민주의 이론가들의 주장이다. 사실 어떤 유럽 또는 미국의 역사가는 최근까지 - P16

만 해도 나머지 세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자기의 역사를 저술할 수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비서구의 역사가는 그가 저술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든, 연구 단위로서 유럽적 기원을 가진 근대 국민국가라는 개념을 피할길이 없다. 근대 국민국가라는 개념의 사례는 앞서 언급했듯이 식민지 이후의 시대에조차 근대 서양식의 교육제도와 역사 서술을 통해 유럽 중심주의적개념들이 비서구 세계에 여전히 관찰되며 늘 새롭게 정당화되고 있음을 잘보여 준다. 무엇보다 비서구의 역사가는 서방의 그레고리력,‘ AD (기원전)와BC(기원후)같이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의 탄생 전후로 구분되는 연도 표기방식, 서구 역사의 시대구분법에 여전히 묶여 있다. - P17

우리가 구상한 다섯 개의 공간 분류는 역동적인 문화 개념을 상호 관계사적 문제의식과 연결하려는 시도다. 한편 우리는 문화라는 개념을 사실적·공간적·시간적으로 폐쇄된 단위여서 기본적으로 외부의 낯선 자들은 이해할수 없는 단위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타 문화들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한 결과로서 지속적인 변화 속에 있는 개방적인 단위로 간주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주移住가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렇듯 문화사적·관계사적 측면에서 볼때 이주는 역사적으로 더는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통상적인 과정으로 파악된다. 그러므로 전통적으로 ‘침략‘이나 ‘외적의 지배‘ 등으로 혹평되었던 현상들은 (이슬람의 인도 침입이나 중국 역사에서 나타난 북방 초원 지대 부족(야만인)들의 역할뿐 아니라 무굴 제국이나 만주 왕조 같은 경우에도) 이제 새롭게 평가되어야한다. - P19

제국은 제국 안에 통합된 여러 지역 권력들이 이전에 지니고 있던 각각의 특성과 지배 구조들을 통합후에도 그대로 유지한 정치 공동체인 반면에, 국민국가는 한 민족이 한 영토에서 하나의 정치 공동체를 구성한다는 사고에 기인한다. - P24

영역realm, 왕국kingdom, 군주국monarchy 이라는 세 가지 개념이 등장했는데, 이 가운데 왕국이라는 개념이 영역이라는 개념보다더 많이 쓰이므로 더 좋은 표현이며, 군주국이라는 개념은 가장 추상적이기때문에 이 가운데 가장 좋은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적어도 1350년에서 1750 년 사이에는 전 세계의 모든 제국이 군주국이었다. - P28

여기서 중요한 점은 제국의 몰락과 근대국가의 등장은 단지 위기와 퇴보를 넘나드는 우연한 발전들이 불균등하게 축적된 결과라는 사실이다. - P31

늘 우연이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않고는 일반적인 테제를 내세우기 어렵다. 하지만 여기서 각각 지배 체제의 권력 주체와 수혜 집단이 얼마나 서로 안정적으로 결집했느냐가 분명 결정적 요인이었다. 그리고 권력 주체와 수혜 집단이 결집하는 데는 근대 이전 모든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족이 분명히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물론 그 구체적인 방식은 각각 다를 수 있다. - P32

오히려 제국 유지에 결정적인 것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왕가의 존속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지속적으로 전체 제국과 자기들을 동일시하는 유력한 사회계층이 폭넓게 존재하는지였다. - P36

유럽이 많은 전투에서 승리할 수있었던 비결은 고도로 훈련된 창병과 점점 더 증원된 소총수로 구성된 보병, 그리고 이들을 지원했던 야전 대포였다. 17세기에 칼이 장착된 총이 발명되자이는 (사실상 창과 총포를 결합시켜) 보병 전원을 창병으로 만들었다. 러시아가스텝 지역의 부족들을 굴복시킨 것도 이 때문이었다. - P46

모든 대양에는 각각의 상황에 맞게 고도로 발달된 선박 형태가 있었으며, 유럽인들은 필요하면 이를 철저히 벤치마킹했다. - P48

이제바다는 육지와 마찬가지로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날 바다를 순전히 지형학적으로 세 개의 대양, 즉 대서양, 인도양, 태평양으로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리적 개념은 비교적 최근에 와서야 사용되기시작했다. 사람들은 각각 대양의 특정한 영역에만 접촉하고 친숙했기 때문에단순하게 그 지역을 표현하는 부분적 명칭들을 사용했다. - P50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사는 대서양을 둘러싼 소통과 상호작용이 일회성 사건들로 끝나지 않고, 점차 축적되어 대륙 간 경계를 극복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이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이 경계 극복 과정을 ‘파사주passage‘로 칭했다. 다시 말해 여기서는 일회적인 경계 넘기가 아니라 소통과 상호작용이 장기적으로 진행되고, 그 결과들이 축적되면서 경계 지역들에 나타난 변화가핵심적인 관심사다.

국가가 영토를 규정하는 국경선과 함께 성립되고 몰락한다는 것은 근대에 와서야 뚜렷해진 사실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제국의 경우는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다가갈수록 제국에 대한 통합의 강도가 희미해졌다. 이러한 중심부와 주변부의 개념은 국가의 본질과 근본적으로 어긋난다. - P52

근대국가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경계 지역들은 ‘국가성statehood‘이 덜 발달된 지역으로 파악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지역들은 점차 제국에, 그 후에는 국가에 통합되었다. 그 지역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의 입장에서는 (그 격차가단순히 군사기술에 있다고 하더라도) 식민 지배자들과 피식민지인들의 발전 격차에서 빚어진 식민지 지배 관계가 문제의 본질이었다. 이러한 지배 관계 때문에 식민 지배자들은 ‘원주민들‘을 근본적으로 저급한 야만인으로 취급했다.
그리고 식민 지배자들은 이른바 ‘아무도 살지 않는 비어 있는 땅‘을 의미하는 ‘무주지terra nullius‘라는 (그들에게) 유용한 개념을 자의적으로 도입해 이를 토대로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도 했다. - P54

외부 경계들 가운데에는 각각의 세력 관계에 따라, 야만인들의 생활공간인 끝없는 미개척 토지의 변경에 접한 일방적이고 불균형한 ‘프런티어‘와 이와 달리 서로 쌍방적이고 대등하게 마주한 프런티어가 구별될 수 있다. 여기서 후자는 이웃 제국과 접촉하는 지역이었거나 그런 성격의 지역으로 변해간 지역이다. - P55

‘세계 제국‘이나 ‘대양‘이라는 표현은 1750년까지 근본적으로 새로운 동시에 (곧 서술되겠지만) 매우심각한 후유증을 가진 의미를 얻게 되었다. 적어도 세계화 시대의 ‘시공간 압축time-space compression" 현상의 출현을 예고했다. 다만 이 시대에는 유럽과 신대륙 사이의 항해가 아직 여러 달 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해가 걸리기도했다. - P58

당연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문화 바꾸기와 종교 바꾸기가 총체적으로 일어난 경우는 별로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전에 뚜렷하게 형성되어있었던 인간의 사고가 그렇게 갑자기 총체적으로 삭제되고 새로운 것으로 채워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체성의 변화는 아마도 한 번에, 통시적 - P61

으로도 일어날 수 있지만, 반복적이고 병행적(동시적)으로도 일어날 수 있다. - P62

제국을 건설한 사람들은 제국 어디서나 정복자의 언어를 사용하게 했는데, 이 언어는 적어도 그들이 굴복시킨 국가의 엘리트들에게 제2외국어로자리잡았다.

하지만 일상의 소통에서는 눈에 띄는 일탈을 통해, 혹은 심지어 의도적으로 반대되는 언어정책을 통해 지배 도구로서의 제국 언어를 피해 가는 일이흔했다. - P63

범세계적 차원에서 문화 접촉이 점차 늘어났지만,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이과정이 (예수회가 중국 양식을 유럽에 유포한 것처럼) 제한적이고 조용하게 진행된반면, ‘신세계‘에서는 유럽 전체의 문화가 매우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신세계‘에는 식민지 시대 이후에 다양한 발전이 있었는데도, ‘신세계‘ 여러 지역의 언어와 오래된 건축물들은 그 기원이 식민제국이었던 잉글랜드, 프랑스, 포르투갈, 에스파냐에 있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유럽적 뿌리가 강하게 남아 있는 외관의 표면 아래에 원주민들의 토착 문화들이 항상 살아 있다는 사실이, 아프로아메리카인들이 자기들의 고유한 문화를 발전시켰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 두 가지 현상은 지역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 P67

만 해양의 하부 세계에서는 피해자가 가해자로 돌변하기도 했으며, 낭만적인해적 영화에서와는 전혀 다르게, 거기서 실행된 초보적인 민주 질서뿐 아니라 해상 강도들이 저지른 수없는 잔인한 범죄들로도 널리 알려졌다." 이와 비슷하게 육지에서도 해고되거나 탈영한 군인들이 도적 떼로 돌변하는 일이 있었다. - P70

모든 옛 종교가 새 종교들 안에 계속 살아남는 현상은 새로운 종교 안에서 다양한 종교들이 경우에 따라 교대로 적용되는 모습이나 다중의 종교적정체성을 드러내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1350년에서 1750년 사이에 점차 등장하기 시작한 이러한 현상으로부터 결국 오늘날과 같은 전 지구적 시대의 다원적인 상부 세계들‘이 탄생했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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