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한국사 2 - 근현대편 시민의 한국사 2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 돌베개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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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 이어 2권은 근현대사를 다루고 있다. 2권으로 나눈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분량 문제이기도 한데 기존에 한국역사연구회가 1992년도에 펴낸 한국통사 저작인 한국역사는 1권으로 나와서 아무래도 내용상 압축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다. 


시민의 한국사의 압권은 2권이라고 생각한다. 2021년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정말 최근까지의 한국사를 담고 있다. 게다가 보수/수구 정권의 눈치에 은폐되거나 축소된 다양한 시민의 역사가 오롯이 담겨 있다. 때문에 제목에 걸맞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은 2권이 아닐까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여러 번 감탄했다. 많은 분들이 이 책을 통해 한국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길잡이를 찾으시면 좋겠다.


2권의 가장 큰 장점이 최근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다양한 시민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또 하나의 장점은 한국사만으로 국한하지 않고 주변국의 정세를 비롯하여 세계사의 흐름을 담고 있어서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근현대사는 특히나 세계 정세를 이해하지 않으면 역사를 파악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세계사의 흐름을 같이 다루어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생각된다. 


1권에서도 돋보였지만 2권은 더욱 그러한데 경제 파트를 상당히 많이 다룬다는 점이 눈에 띈다. 특히 식민지 시기 경제 파트가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는데 이를 시기별로 잘 다루고 있다. 일본이 조선을 어떻게 경제적으로 침탈하고 자본을 잠식했는지 농업과 공업 등 분야별로 확인할 수 있었다. 


개항기는 유럽과 미국의 세력 경쟁이 외부로 본격 격화되는 시기였다. 청일/러일 전쟁으로 동아시아의 질서는 일본 중심으로 변화되었다. 조선의 개화 세력은 일본 or 청 or 러시아에 기대면서 자력으로 근대화를 추구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청이 영국과 아편전쟁 끝에 강제적으로 조약을 맺고 일본이 미국과 조약을 맺으면서 조선은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서구 국가들은 사회진화론에 기반한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 논리를 바탕으로 비서구 지역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서구가 아시아와 맺은 조약의 기반은 국제법으로 서구와 비서구를 구분하는 체계였다. 국제법은 1648년 30년 간의 종교전쟁을 종결짓는 베스트팔렌조약 이후 유럽 기독교 국가 간의 관계를 규정한 공법에서 출발한 것이다. 18세기 이후 서구 법학자들은 비서구와 비독교 국가의 법체계에 비문명 요소가 있다 판단하고 국제법은 서구 기독교 국가에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유럽을 비롯한 서구 열강은 국제법 논리에 따라 비서구 비독교 국가에 거주하는 자국민에게 자국법을 적용하는 치외법권을 강요한 것이다. 서구열강은 청일본과의 조약에서 치외법권의 특권을 확보했으며 이후 일본이 다른 국가에 이를 동일하게 적용하면서 불평등조약체제가 성립되었다. 


개항기 대표적인 민중 항쟁이라면 동학농민전쟁을 빼놓을 수가 없다. 동학농민군은 1, 2차로 나뉘어지는데 그 성격도 다르고 전쟁의 양상과 결과도 매우 달랐다. 1차 봉기는 1894년 2월부터 6월까지 지속되었고 동학농민군은 고부와 고창을 점령하고 황룡촌에서 관군을 격파한 후, 정읍과 태인, 전주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에 긴장한 민씨 정부가 청에 도움을 청하면서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잇달아 파병되는 결과를 낳는다. 동학농민군은 이에 관군과 6월 11일 전주화약을 체결하며 1차 봉기가 마무리된다. 2차 봉기는 1894년 10월부터 12월까지 지속되었다. 동학군이 공주를 총공세 목적지로 삼자, 동학군과 일본군은 11월 말부터 공주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동학군은 무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버텼으나 12월 10일 우금치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했다. 

동학농민전쟁을 공부할 때마다 민씨 일가가 청군을 부른 것은 결코 용서가 되지 않는다. 남의 나라에 손벌려놓고 댓가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 순진한 생각 아닌가? 조선은 속방국이므로 조선을 보호해줄 거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을 것을 생각하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청-일 간 맺어진 텐진 조약으로 청의 도움은 일본까지 끌어들이게 되는 결과를 낳을 뿐이었다.



(동학농민군 제1차 봉기)



(동학농민군 제2차 봉기)


그렇게 조선에 들어온 일본은 청을 상대로 전쟁의 빌미로 이용했고 1894년 6월부터 1895년 4월까지 근 1년 간 청일전쟁이 진행된다. 일본은 조선의 독립과 동양 평화라는 구호를 내세웠지만 청과 일본의 주도권 싸움이었던 이 전쟁으로 한반도는 전쟁터가 되었다. 게다가 청일전쟁의 결과는 혹독했다. 조선의 내정 개혁은 친일 세력에 의해 일본의 입김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후 조선의 철도 등 많은 이권은 일본이 차지하게 된다. 



(청일전쟁)


개항기 파트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정부가 한 여러 시도들이었다. 아관파천(1896) 이후 강제 병합(1910) 이전 시기까지의 역사는 일본에 의해 어떻게 조선이 무너져 갔는가 하는데 주로 집중하여 외국에 의해 침탈되는 이권들에 주목한다. 그러나 비록 실패는 했을지언정 백성들도 정부도 여러 시도들을 했다. 

1720년(숙종 46) 정부는 양전 제도를 170여년 동안 시행했으나  전국적으로 확대되지 않은 탓에 토지와 소유자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조세 부과와 징수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1898년 7월 전국 단위의 양전사업에 착수했다. 양지아문을 설치하고 서울은 외국인 전문가 주도하에 서양식으로 측량하고, 지방은 각 도 단위로 양무감리와 양무위원을 중심으로 결부제에 기초하여 측량하였다. 양전은 결부제를 바탕에 둔 전통 방식에 새로운 특징을 더했다. 전답을 소유한 주인인 시주와 소작인을 함께 기재해 납세 의무자 및 지주 전호관계를 확인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또 전답 위주의 기록이었던 이전과 달리 산림과 천택, 가사 등 모든 부동산을 조사 대상으로 삼았다. 또 실제 면적을 기입하고 절대 면적을 표시하면서 객관적 파악을 하게 하였다. 양지아문은 1899년 6월 시작되었으나 1901년 흉년이 들며 12월에 중단되었다. 그때까지 양전이 실시된 지역은 대상 지역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범위였다. 

양전 사업으로 토지와 소유자를 조사하고 양안에 기재하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때까지 토지 소유권을 법적으로 확인하고 보호해주는 제도는 없었다. 1901년 10월 지계아문이 설치되면서 오늘날의 등기부 같은 토지 소유권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제도가 비로소 마련되었다. 양안처럼 전답 뿐 아니라 산림, 천택, 가사를 포함하고 개항장 외에는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금지한다는 조항도 들어갔다. 1902년 4월 강원도부터 시작된 지계아문이 2년에 걸쳐 이루어지면서 전국의 3분의 2 정도 지역에 토지 측량이 이루어졌다. 다만 1904년 1월 지계아문이 축소되면서 양전사업이 중단되고 말았다.


식민지 시기는 조선 뿐 아니라 아시아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열강의 이권 다툼에 희생양이 된 시기였다. 한국은 주권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억압과 차별, 수탈을 당하였다. 또 일본의 대륙 침략의 기지와 일본 개인과 기업 자본의 활동에 적합한 식민지 자본주의 사회로 변모하면서 사회경제적으로 대일 종속관계가 만들어지고 민족 간 불평등이 심화되었다. 

1917년 러시아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고 레닌이 민족자결 원칙을 담은 「평화에 관한 포고」를 발표했고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평화를 지키기 위한 원칙으로 민족자결 조항을 포함시켰다. 다만 민족자결원칙은 1919년 1차 세계대전 결과로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에서 패전국의 일부 식민지에 적용되는 것이었으나 식민지와 반식민지 상태에 놓여 있던 전 세계 약소민족들에게 독립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조선인들은 일본에 맞서 비밀결사운동과 실력양성운동, 사회주의운동, 의열투쟁, 무장투쟁, 정부 구성 등 일본의 지배 시기에 따라 다양한 노선과 방식으로 꾸준한 항쟁을 벌였다. 


일본의 조선 지배가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와 비교할 만하다고 기술한 것이 눈에 띈다. 어째서인가. 영국도 아일랜드를 식민지로 부르지 않고 본국으로 취했다. 그러나 아일랜드는 1919년 독립전쟁을 일으켰고 협상 끝에 1922년 아일랜드자유국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1920~1930년대 자치를 거쳐 아일랜드가 독립으로 나아간데 반해 일본은 1945년 패전 때까지 조선의 자치와 독립을 허용하지 않았다. 종종 대만과 조선이 비교되고는 하지만 둘은 차이가 있다. 대만은 일본의 경제적 식민지였던 데 비해 조선은 경제적 식민지 이상으로 군사적 식민지의 성격이 강했다. 대만은 중국의 하나의 지방이었다면 조선은 오랜 독립국이었기에 일본은 조선인들의 많은 저항에 부딪쳤다.


일제는 조선의 농업 구조를 변화시킨다. 1910년대 개량 농법을 보급하고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으로 식민지 지주제가 정착되었다. 이는 쌀의 공급량을 늘려 안정적으로 일본 시장에 공급하기 위함이었다. 이 시기 조선은 쌀 생산량보다 반출량이 훨씬 컸는데 수확하자마자 일본인 미곡상이 사들여 일본으로 보내버렸고 밭을 논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다른 작물의 재배 기회까지 줄어들면서 쌀 소비량이 급감하여 농민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지주의 경제적인 힘이 커지면서 농촌 사회는 자작농의 비율이 감소하고 소작농이 증가하여 양극화되는 결과를 낳는다. 농가 경제는 자립성이 약화되고 외부 자극에 절대적 영향을 받는 구조로 변화되었다. 1930년대 이후에는 소작관계법이나 전시 농업통제정책이 시행되면서 식민지 지주제가 둔화되는 추세를 보인다. 그런데 일본인 지주제는 일제 말기까지 성장세를 보인 반면 한국인 지주제는 1920년대 후반 이후 위축되는 추세를 보이게 된다. 일제 말기가 되면 식량 공출, 강제 저축, 강제 동원 등이 이루어지면서 농사를 기피하는 풍조가 늘어나는 추세를 보였다.


식민지 공업화는 자본과 기술이 부족한 조선에 일본의 자본이 들어와 공장을 설립하면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총독부는 일본 기업이 경영하기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고 자본가들에게 조선에 투자를 종용하였다. 금융과 세제 지원을 하고 공장 건설에 필요한 용지도 싼 가격에 이용 가능하게 했으며 원료 확보에도 편의를 제공했다. 하지만 노동자 보호를 위한 보호 장치가 적용되지 않았으며 노동자가 조직화하는 것을 철저히 탄압하는 모습을 보인다. 일본 자본이 들어간 회사는 점차 증가하였으나 조선인 공업회사는 대부분 영세한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41년 말 기준 공업 분야 회사, 개인 기업의 자산 총액 중 일본인 사업체의 비중은 91.5%를 차지한 반면 한국인 기업의 비중은 8.5%에 불과했다. 조선인 공장은 주로 화학, 식품, 방직 분야에 많았으며 주로 생필품을 생산하는 업체들이었다.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사회주의 운동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조선공산당의 역사는 대부분 소략하게 다룬다. 때문에 조선공산당 책을 따로 읽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 후 전 세계를 강타했던 사회주의를 제외하고 식민지 시기를 결코 논할 수 없다. 일제의 치안법(1925)으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강력한 탄압과 제재 속에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수많은 단체와 정당이 지하로 숨어들어가는 과정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신간회의 좌우합작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국내는 사실상  독립운동의 동력이 상실된다.


1945년 조선의 해방 이후 6.25 전쟁 이전까지의 시간은 한국 현대의 기원을 확인할 수 있는 시기이다. 해방 후 임시정부가 내세웠던 통일 정부와 민주적 개혁이 이루어져야 했으나 남한과 북한은 미소 하에 각기 다른 정부가 세워지면서 전쟁을 치르게 된다. 전쟁의 인적, 물적 피해가 컸으나 이념의 갈등은 현재까지도 이어지며 서로를 온전히 믿지 못하는 사태를 만들고 말았다. 


이 책의 현대사야말로 2권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수면 아래 잠자던 시민의 역사가 요동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950년대 이승만 정부, 1960~1970년대 박정희 정부, 1980년대 전두환 정부, 1990년대 노태우, 김영삼 정부, 김대중 정부, 2000년대 노무현 정부, 뒤이은 이명박, 박근혜 정부, 최근의 문재인 정부까지 짧은 역사인데도 워낙 역동성을 지녔기에 놀라움을 느끼게 한다. 이는 대중이자 시민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의 노력도 있었겠지만 수많은 시민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한국현대사는 이렇게 씌여질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4월 혁명, 6.3항쟁, 3선 개헌 반대운동으로 이어진 1960년대 민주화 운동이 유신 반대운동, 재야민주화운동, 학생 운동 등 1970년대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고, 그 흐름이 전태열 열사의 분신으로 상징되는 민중노동운동으로 결합해 1979년 부마항쟁으로 이어져 박정희 정권은 종식되었다. 신군부의 광주민주화운동 탄압은 3S를 통해서 대중의 눈을 돌리려 했으나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지면서 조직화된 민중의 힘을 보여주었다. 2000년대 들어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미선이 효순이 사건, 광우병 파동 이후 중요 이슈가 나올 때마다 민중은 촛불을 들며 거리로 나왔다. 2016~2017년은 박근혜 정권의 적폐청산을 요구하며 거리를 나선 시민들의 힘이 승리하며 촛불혁명을 만들어냈다.

문화 파트에서는 IT의 발전 이후 대중문화가 미디어를 타고 성장하면서 만들어진 한류에 대해서도 다룬다. 동아시아에 국한되어 있던 한류의 붐이 이제는 BTS를 비롯하여 전세계적으로 한류 팬덤과 컨텐츠의 인기를 이끌어낼 정도로 성장하였다. 

마지막에 전후 북한 사회의 정치와 경제, 사회, 외교에 대해서도 정리해놓아 북한 사회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당연하겠지만 김정은 시기까지 포함시켜놓았다. 


100여년이 넘는 역사를 500여페이지에 걸쳐 압축적으로 담아 놓았다. 파트별로 다양하게 확인할 수 있어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다. 결론만 보여주지 않고 맥락을 제시하고 있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고 보여진다. 이 책시리즈를 통해 최신의 한국통사를 확인해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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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2-08-19 02: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 나라에 사는 한사람 한사람이 역사를 만들기도 하죠 이름 없이 살다간 사람... 그때를 생각하기도 하지만, 더 앞날 사람을 생각하고 여러 가지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정치뿐 아니라 환경도 더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인류가 지구에서 살려면... 이건 지구 전체가 생각해야 하는 거군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2-08-19 09:01   좋아요 2 | URL
네. 한국의 근현대사는 한 사람 한사람들이 모여 만들어낸 역사라고 생각해요. 지금도 그 역사가 씌여지고 있고^^ 말씀하신대로 앞으로가 중요하죠. 정치는 엉망인데 환경은 뒷전이 가고 있네요. 이번에 겪은 물난리를 보면 환경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죠ㅠㅠ 지구 전체가 고민할 문제인데 고물가 및 경제 리스크로 다시 후퇴하고 있는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책읽는나무 2022-08-19 0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 권 가량의 분량이었을텐데 한 권에 근현대사를 다 담았군요? 그래서 책의 페이지 수도 만만찮습니다.^^
아픔의 역사 일제시대는ㅜㅜ 간혹 이 일본 침략이 없었더라면 우린 또 어떤 근대사를 기록할 수 있었을까? 싶어요. 친일파 없는 근대사!!!...그래서 민주화는 좀 더 일찍 시작되고 있었으려나? 싶기도 하구요.
정치적 안정이 나라의 발전을 앞당길 수 있었으니...또 지금의 모습이 달라져 있었겠죠??
하지만 코로나 상황은 똑같겠죠??ㅋㅋㅋ

거리의화가 2022-08-19 12:15   좋아요 2 | URL
네. 그래서 1, 2권으로 나눈 것이 참 다행입니다. 분량은 500여페이지 정도 되는데 저는 생각보다 길지도 않고 너무 짧지도 않고 적당하게 느껴졌어요.
일제시기는 지금도 생각하면 여러 감정을 느낄 수 밖에 없게 하죠. 하지만 그때 국제 정세도 그렇고 우리에게 불리한 점이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친일파는 이완용처럼 나라 팔아먹을려고 작정했던 매국노도 있고 지주나 기업처럼 일본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돈벌어먹기 힘들어서 시작한 이들도 있을 겁니다.
우여 곡절이 있었으나 그리 어둡고 암울한 시기를 지나는 와중에도 끊임없는 민주화 시도를 한 시민들의 힘으로 여기까지나마 온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