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토끼]
토끼 모양을 한 전등이 저주토끼다. 저주의 방법을 보면서 예전에 드라마 장희빈에서 장희빈이 중전을 저주하며 사람 모양을 한 인형에 저주를 걸어 비는 장면이 떠올랐다. 사람에게 그렇게 앙심을 품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할아버지의 방법은 잘못되었으나 할아버지 친구는 억울할 만했다. 이 사회는 약삭빠르고 남의 등을 쳐먹는 사기꾼들은 잘만 살아남는데 반대로 어리숙하거나 순진하거나 열심히 사는 이들은 바보되기 십상 아닌가. 생각해보면 너무 분하고 억울하다.
[머리]
내가 버린 머리카락, 배설물, 생리대, 오물 등이 머리가 되어 변기에서 나와 나를 “어머니”라고 부른다면?
그 모습을 상상하니 오싹하긴 했는데 내가 사용하는 것들에 과한 것이 없나 생각해보게 됐다. 낭비에 대한 것들. 배설물도 먹는 대로 나오는 것이다. 먹는 양이 적으면 배설물도 적어지지 않을까. 환경으로 연결될 수도 있는 부분이다.
나에게서 나온 피조물이 나를 공격해서 나를 밀어낸다는 마지막 결말은 충격적이기는 했다. 이는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만들어낸 산물이 결국 나의 몸에서 나오는 것이니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결코 내 몸에서 나오는 어떤 것도 자유롭지 않다는 것.

할아버지의 친구는 더 좋은 기술을 개발해서 더 맛있고 몸에 좋은 술을 만드는 데만 신경을 썼다. 정부 인사와의 친분, 인맥, 접대, 필요에 따라서는 뇌물이나 뒷거래가 제품과 기술보다 중요한 시대라는 사실을 할아버지의 친구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변해버린 술 시장을 넘보는 더 큰 회사가 있었다. 인맥과 연줄에 강하고 접대에 능한 회사였다. 이 회사에서는 자신들이 만들어 파는, 알코올에 물과 감미료를 섞은 액체가 ‘서민들이 선호하는‘, ‘정통의 그 맛‘이라 광고했다. 앞에서는 정당하게 언론매체에 광고했지만, - P13
등 뒤로는 할아버지의 친구 회사에서 만든 술에 ‘공업용 알코올을 섞는다‘고, 그 술을 마시면 눈이 멀고 불구가 되며 많이 마시면 죽는다고 비방했다. 매출이 뚝뚝 떨어졌다. 공장이 가동을 멈추었다. 아니라고아무리 해명해도 사람들은 믿어주지 않았다. 자기 공장에서만든 술을 직접 마시는 모습을 보여주려 해도 그 어느 방송에서도 상대해 주려 하지 않았다. - P14
토끼들은 계속 보이는 대로 갉아댔고 그러면서 계속 번식했다. 서랍 속과 철제캐비닛 속에서 주문서와 계약서와 영업실적 보고서와 회계장부와 재무제표 등등 모든 서류가 밤마다조각조각 씹히고 밝히고 찢겼다. 서류를 추려서 금고로 옮기자 금고 안에 있던 현금과 수표, 어음까지 밝히고 씹히기 시작했다. - P23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할아버지는 늘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업은 그 어 - P33
느 때보다 호황이다. 지금과 같은 삶을 계속 산다면 나도 언젠가 할아버지처럼죽어도 죽지 못한 채 달 없는 밤 어느 거실의 어둠 속에서 나를 이승에 붙들어두는 닻과 같은 물건 옆에 영원히 앉아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저 창가의 안락의자에 앉게 될 때쯤, 내 이야기를 들어줄 자식도, 손자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방문을 닫고 완전한 어둠 속에 홀로 선다. 이 뒤틀린 세상에서, 그것만이 내게 유일한 위안이다. - P34
"당신이 변기 속에 버리곤 했던 빠진 머리카락과 당신의 배설물과 뒤를 닦은 휴지 등, 당신이 변기 속에 버린 것들로 인하여 제가 생겨났기에 당신을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 P39
그녀는 젊은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젊은 자신의 몸을바라보았다. 자궁과 탯줄이 아닌 대장과 배설물로 자신에게서 비롯되어 어엿한 성체를 이룬 존재를 바라보았다. 순백의도기 속에 가려진 그 검은 구멍에 숨어 그렇게도 오랫동안 그렇게도 지겹게 자신을 괴롭혔지만 이제 떠나겠다는 그 존재를 바라보았다. 작별하는 마당이라면, 정말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면, 옷 한 벌쯤 주어도 무방할 터였다. 젊은 그녀가 수건으로 몸을 닦는 동안 늙은 그녀는 옷을 벗었다. 별로 화사한 입성은 아니었다. 카디건 하나와 원피스, 브래지어와 팬티, 양말, 그것으로 전부였다. 그녀는 알몸이되어 젊은 그녀가 늙은 그녀의 옷을 하나하나 천천히 주워 입는 것을 바라보았다. 팬티, 브래지어, 원피스, 카디건, 젊은그녀는 공들여 하나하나 음미하듯이 옷을 입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양말을 신고 카디건의 앞섶을 여몄다. 늙은 그녀는벗은 몸에 문득 으스스 한기를 느꼈다. - P55
"은혜라니, 무슨 은혜란 말이냐? 내가 언제 태어나고 싶어네게 부탁한 적이라도 있더란 말이냐? 네게서 비롯된 피조물이라 하여 네가 한 번이라도 따뜻이 돌보아준 적이라도 있었더냐? 너는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나를 태어나게 했고 이후에도 나를 혐오하고 역겨워하여 줄곧 없애고자 하지 않았느냐? 내게 베풀어준 것이라고는 있어 봤자 네게는 백해무익할 따름인 배설물과 오물뿐이 아니었느냐? 그나마 받아먹으며 사람다운 외양을 이루기 위해 나는 네게서 갖은 수모와 박해를 받아야 했단 말이다. 하지만 드디어 나는 몸을 이루었다. 어두운 구멍 속에서 이날만을 기다려왔다. 이제 나는 네가 되었으니 너의 자리를 차지하여 살아가리라." 말을 마치고 젊은 그녀는 늙은 그녀에게 다가섰다. 젊고 억센 손이 늙은 어깨와 목을 붙잡았다. 젊은 그녀는 늙은 머리를 변기 속으로 쑤셔 넣었다. 그리고 재빨리 늙은 발목을 잡아 들어 올렸다. 늙은 몸을 가볍게 변기 속에 거꾸로 처넣고나서 젊은 그녀는 변기의 뚜껑을 닫고 물을 내렸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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