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와 도가 중의 노자학
‘노자’라는 책은 초나라 사람인 이이가 쓴 전국시대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사마천은 이이를 전설 속의 노담으로 병치시켰는데 노담의 모습은 신령과도 같아 전설 속 인물의 모습이다.
이이가 쓴 기록에 노담의 전설이 더해진 후 순자, 장자 이후에는 노자학을 노담의 학문으로 여겼다.
- 노자학과 장자학
노자학과 장자학의 학설은 같은 듯 다르다는 것에 주목하자.
전국시대 이후 노자학은 한대 초엽에, 장자학은 한대 말엽에 성행했다.
- 도, 덕
고대의 도는 사람의 도인 인도를 일컬었으나, 노자는 도에 형이상학적 의미를 부여하여 천지만물의 생성에 도라는 것이 있다라고 이름지었다.
도는 만물을 낳고, 덕은 만물을 기른다.
- 사물에 대한 관찰
사물이 발달하여 극에 이르면 그 반대로 흐른다. 마치 정-반-합의 변증법을 떠올리게 한다. ‘노자’는 되돌아가는 것이 도의 운동이라 했다.
- 처세의 방법
만약 어떤 모습으로 살고자 한다면 그 반대의 측면에 머물러야 한다. 마찬가지로 정-반-합의 논리다.
- 정치철학
종종 사회-정치 제도는 원래의 목적과는 상반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 욕망과 지식에 대한 ‘노자’의 태도
욕망을 만족시키려 하느니 차라리 욕망을 줄이려 애쓰는 것이 낫다. 욕망을 지식에까지 확장시킨다. 헌데 끝을 모르는 욕망을 어찌 줄일 수 있나. 결국 만족에 가 닿지는 못할 것 같다는 면에서 ‘노자’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은 간다.
- 이상적인 인격과 이상적인 사회
덕이 두터운 이는 갓난아이에 비할 수 있다.
노자가 말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원시 사회가 아니라 소박함을 지키는 사회이다. 야만을 함유한 문명의 경지로 오래 지속 가능한 문명이다.

"초연히 홀로 신명과 더불어 거했다"는 말과 "홀로 천지의 정신과 더불어 교류했다"는 말만이 같은 의미이다. 이외에, 『노자』학은 여전히 선후(先後), 자웅(雌雄), 영욕(榮辱), 허실(虛實) 따위의 분별에 주목하여, "단단하면 깨지고 예리하면 꺾임"을 인식하고, 깨지지 않고 꺾이지 않을 술(術)에 주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장자학은 "사생을 도외시하고 시종을 무시한다." 『노자』학에서 주목한 내용은 장자학에서 주목할 가치가 없다고 여긴 것들이었다." - P279
도가라는 명칭은 한나라 사람이 수립했다. 그들이 노장을 같은 도가로 여긴 것은, 『노자』학과 장자학이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다같이 당시의 모든 전통적인 사상과 제도에 대한 반대파였기 때문이고, 또『노자』학과 장자학이 논한 도·덕의 두 근본 관념도 같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나라 사람이 그들을 도가로 통칭한 이유였다. - P281
초나라 사람은 주(周)나라 문화를 동경할 경우 북으로 유학 가야 비로소 그것을 획득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초나라 사람은 비록 주나라 문화의 혜택을 입지는 못했지만, 또한 주나라 문화의 구속도 받지 않았던 만큼 그들에게는 극히 신선한 사상이 많았다. 『한서』 「지리지(地理志)」에 따르면 "초나라는 양자강과 한수(漢水]를 비롯하여 강과 못 그리고 산림의 풍요한 혜택을 입어 인민들은 먹을 것이 항상 풍족했다. 그래서 나약하기는 했으나 삶을 즐겼고 재물을 축적할 줄 몰랐다. - P281
사물은 유(有)라고 이름할 수 있지만, 도는 사물이 아니므로 다만 무(無)라고만 일컬을 수 있다. 그러나 도는 천지만물을 생성할 수 있기 때문에 유라고도 일컬을 수 있다. 따라서도는 유무를 겸한 말인데, 무는 도의 체(體)를, 유는 도의 용(用)을일컫는다. - P285
도라는 것은 아련하고 어렴풋하다(侊憁). 어렴풋하고 아련하지만, 그 가운데에 형상이 존재하고, 이아련하고 어렴풋하지만, 그 가운데에 실체가 존재하고, 그윽하고 아득하지만, 그 가운데에 정기가 서려 있고, 그 정기가 너무나도 진실하여, 그 가운데에 증표가 있도다! - P287
"덕은 도의 거처(舍)이다." 사(舍)는 당연히 머물러 깃든다(舍寓)는 의미로, 덕은 바로 도가 사물에 깃든 것이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덕이란 사물이 도로부터 얻은 바에 의해서 그 사물이되는 것을 말한다. - P288
인간사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는 통칙(通則:常)은 다음과 같다. 천하의 정복은 영원히(常) 사건을 일으켜서 된 적이 없다. 사람들이 하는 일은 언제나(常) 완성단계에서 그르친다. 합니다 살생의 주관자(司殺者 : 즉 天道)가 살생하는 것이 통칙(常)이다. 천도는 편애가 없는지라, 영원히(常) 선인(善人) 편에 있다. - P290
만물은 아무리 번성해도, 저마다 그 근본(根:道)으로 복귀한다. 근본(도)으로 복귀하는 것이 바로 "정적(靜 : 만물의 본질적 상태)"이고, 그것을 일컬어 "복명(復命 : 운명에의 복종)"이라고 한다. 복명(復命)이 바로 "통칙(常 : 영원한 법칙)"이고, 통칙(常)을 아는 것이 바로 "개명(明)"이다.
통칙(常)을 아는 사람은 관용적이고(容), 관용적이면 공평무사하고(公), 공평무사하면 포용적이고(周), 포용적이면 광대하고(大), 광대하면 도에 부합하고(道), 도에 부합하면 영구하고(久), 종신토록 위태롭지 않다(歿身不殆). - P291
오직 굽음을 내포한 곧음, 서투름을 내포한 기교라야 지극한 곧음, 지극한 기교인즉, "정"과 "반"의 "합"이다. 따라서 지극한 곧음은 굽은 것이 아니라 굽은 것 같을 뿐이고, 지극한 기교는 서툰 것이 아니라 서툰 것 같을 뿐이다. "통칙을 아는 개명한" 사람은 "웅성을 알고 자성을 지켜", 항상 "합(合)"의 경지에 처하므로 "종신토록 위태롭지 않을" 수 있다." - P297
사회진화의 측면에서 보면 원시사회는 이름이 없는 이른바 "박(樸 : 제작하지 않은 원재)"이고, 제작에는 이름이 있으니 이른바 "박이 흩어져 기물이 되면, 성인은 그 기물들을 사용하여 백관의 우두머리가 된다"는 말이다. "이름이 이미 생겼으면", 오직 "그칠 줄 알아야 위태롭지 않을 수 있으므로," 너무 많이 제작하여 그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 P301
욕망을 줄이는 것(寡欲)은 즉 절제이다. 욕망을 줄이려고 하기 때문에 『노자』는 또 지식을 반대한다. 왜냐하면 (1) 지식 자체가 본래 욕망의 한 대상이고, (2)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욕망의 대상을 많이 알게 하여 "만족할 줄 모르게(不知足)" 하고, (3)지식은 우리가 노력하여 욕망의 대상을 획득하도록 도움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칠 줄 모르게(不知止)" 하기 때문이다. 즉 "배움(학문)의 추구는 [욕망과 지식을] 끊임없이 더하는 것이다"는 말이다. - P303
나는 홀로 담박하여 아무런 동요가 없는 것이, 마치 영아(嬰兒 : 젖먹이)가 아직 웃을 줄 모르는 것과 같도다! - P304
국가는 작고 그 구성원은 적어야 한다. 설사 아주 우수한 효력의 기물이 있더라도 [쓸데가 없어] 사용하지 않고,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을 중시하고 멀리 이사가지 않게 한다. 비록 배와 수레가 있어도 사용할 데가 없고, 갑옷과 병기가 있어도 쓸 일이 없다.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결승문자[結繩文字]를 사용하게 하고, 음식을 달게 먹고, 옷을 아름답게 입고, 안온하게 거처하고, 전원생활(俗)을 즐기도록 한다. 이웃 나라가 앞에 보이고 닭 울고 개 짓는 소리가 들려올지라도, 사람들은 늙어가도록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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