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충무로의 한 극장에서 더스틴 호프만이 직접 연출한 영화
<콰르텟>을 보았다.
은퇴한 오페라 가수들이 모여 사는 '비첨 하우스'가 배경이었는데
나는 처음 영화 소개 글을 읽을 때 '비첨'을 '비참'으로 읽었다.
영화 중간에 자막이 통째 사라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나를 포함, 이삼십여 명의 관객은 휘파람을 불지도 않고 야유를 퍼붓지도 않고
점잖게 자리에 앉아 자막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어쩌다 아는 단어가 한 개씩 귀에 걸리면 대사를 눈치로 때려잡으며 흐뭇했다.
그 재미가 얼마나 좋았는지 이렇게 영화가 끝나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5분이 지나도 자막이 돌아오지 않자 성질 급한 누군가가 달려 나가고
안내원이 나타나고 또 5분쯤 지나서야 겨우 사태가 수습되었다.
<콰르텟>은 엔딩 크레딧이 아주 중요한 영화다.
음악과 함께 매기 스미스를 비롯한 주인공 역할의 배우들 외에
영화 속에 등장하는 비첨하우스 속 실제인물(은퇴한 오페라 가수들)을
한 명 한 명 젊은 날의 사진과 함께 보여준다.
멋을 부리지 않아도 반짝반짝 빛나는 젊은 날의 사진과
몇십 년 뒤 현재의 모습을 대비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이상하게 영화 속 그런 장면에 환장했는데
지금은 오죽하겠는가!
그런데 누군가 나타나 화면을 가로막고 뭐라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영사기사(?)였다.
사람들이 비로소 항의를 하기 시작했다. 좀 비켜달라고.
그는 그 큰 몸으로 화면을 가로막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사과를 계속했다.
그는 마지막 관객이 모두 극장을 빠져나갈 때까지 굳건하게 자리에 서서
한 명 한 명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죄할 작정인 듯했다.
그의 앞을 지날 때 눈을 맞추거나 괜찮다고 말해주는 관객은 한 사람도 없었다.
나는 그를 쳐다보며 뭐라고 뭐라고 입속으로만 달싹였다.
내 뒤의 시인 언니가 큰 목소리로 괜찮다고 그를 격려했다.
우리 일행은 경복궁앞의 한 식당에 늦은 저녁으로 도다리쑥국을 먹으러 갔다.
아직 차가운 봄밤에 도다리쑥국은 정말 시원하고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