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 결국 영화 '우작'을 보러 뛰어나갔다. 버스를 두 번, 지하철을 한 번 갈아타야 하는 머나먼 장정이었다. 여기로 이사온 이후(3년째) 우리 동네 마을버스 외에 버스는 처음 타보는 거라면 나의 동선과 주변머리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올케가 가르쳐준 대로 퇴계원에 내려 잠실 가는 직행버스를 기다렸다. 버스 정류장 옆에 휴게소가 있어 뜨거운 커피도 한잔 마실 수 있었다. 버스정류소 맞은편의 수령 200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큰 나무 밑에 주황색 비닐 포장마차가 웅크리고 있었는데 손님을 기다린다기보다 술을 좋아하는 주인이 친한 친구들을 불러들여 허구헌날 작취미상으로 마시고 있을 것 같은그런 느낌을 주었다. 언제 나도 저 찌그러진 문짝을 내 손으로 꼭 한 번 열어보리라.

 


저런 쥐새끼 같은 놈이 나타나 나의 평온한 일상을 헝클어놓다니!

 

 

마흐무트는 중년의 사진작가. 아내와는 이혼하고 가끔 잠자리를 함께 하는 여자가 한 명 있긴 한데 사랑이나 열정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바짝 마른 몸, 야윈 얼굴, 촛점없이 퀭한 눈을 보면 그나마 사진을 찍어 출판사에 갖다주고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대견할 정도이다. 타르코프스키를 좋아하고 시적인 삶을 꿈꾸던 것은 먼 옛날의 얘기. 지금은 간신히 버티고 있다. 생을......

그런데 어느 날, 감수성 같은 것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투박하고 불퉁한 표정의 청년 유스프가 그의 삶에 끼어든다. 먼 친척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사는 시골에는 일자리가 없으니 이스탄불에서 취직을 할 동안 신세를 좀 지자는 것이다. 마지못해 일주일 정도의 말미를 주고 허락하지만 취직이 어디 그리 쉬워야 말이지.


유스프의 꿈은 선원이든 잡역부든 뱃사람이 되어 바다에 나가 돈도 벌고 세상 구경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왜 뱃사람이냐는 마흐무트의 질문에 “바다는 불황이 없잖아요!” 하는 그의 대답이 천진하다. 꽁꽁 얼어붙은 거리에 나가 ‘직원 안 뽑음’이라는 팻말을 보고도 용감하게 문을 밀고 들어가지만 그런다고 없는 일자리가 생기겠는가. 그를 냉대하고 구박하는 건 신세지고 있는 친척 형도 마찬가지. 보증 이야기를 꺼내면 못 들은 척 딴청을 부리고 타일공장에 추천 좀 해달라고 하면 “너 같은 놈을 뭘 믿고?” 이런다.

 

 


친척 형이라고 믿고 찾아왔더니 제기랄!


마흐무트는 포르노 비디오테이프를 마음 놓고 못 봐서 심통이 난 것일까? 그는 사실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자기 자신에게 심통이 난 것이다. 그는 헤어진 아내를 만나서도 자기 변명에만 급급하다. 아내가  캐나다로 살러 떠나는 날 비행장에 가지만 먼 발치에서 지켜볼 뿐이다.

일자리를 구하러 나갔다가도 예쁜 여자를 보면 한눈을 파는 유스프, 그리고 일주일이 넘도록 나갈 생각을 안하는 녀석이 못마땅해 흘끔흘끔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쫓는 마흐무트의 심술궂은 눈. 둘은 비록 함께 살고 있지만 마음은 10리 100리만큼 떨어져 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이 ‘우작(UZAK; 터키어로 ‘멀리’라는 뜻)‘인가보다.

 

 



누리 빌게 세일란 감독은 이 영화의 각본, 촬영, 편집, 제작을 도맡았다. 그는 안톤 체홉을 그의 영화 스승으로 공공연히 꼽고 있는데 디테일한 심리와 상황 묘사를 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어쩌면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의 고독과 누군가가 떠난 빈자리와 페브리즈 열 통으로도 지울 수 없는 찌든 담배냄새로 그의 영화는 나의 기억 속에 남으리라. 터키 이스탄불의 눈내리는 골목, 부둣가의 풍경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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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11-06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로드무비님이시군요. 흐흐. 추천이요.^^

로드무비 2004-11-06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고마워요.^^

역시 로드무비님이라니. 좋은 뜻이죠?

urblue 2004-11-06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다 말았어요. 내일 영화보러 갈 거거든요. 보고 나서 다시 읽죠. ^^

stella.K 2004-11-06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