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하나를 먹는 행위도 따지고 보면 사실 엄청나게 복잡한 과정이다.
소화작용에 필요한 각종효소들을 합성하는 일과 음식에서 에너지를 얻는
일련의 화학반응들을 의식적으로 하나하나 챙겨서 수행해야 한다면,
나는 결국 굶어죽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박테리아같이 보잘것없는 존재도
산소가 없는 곳에서 당을 자동으로 분해할  줄 안다.
이것이 사과가 썩는 이유다.
                                                     
                                           - 칼 세이건 <코스모스> 445쪽


먼지떨이를 들고 모처럼 청소를 하려다 책꽂이를 한 칸 한 칸 살피니 
읽지 않은 책이 태반이다.
웃긴 건 그 책들을 대부분 읽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
이런 식의 자기기만은 사실 애교에 속한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눈에 들어와 무작위로 펼쳤더니
위의 구절에 연필로 밑줄이 쳐져 있다.
언젠가 내가 쳐놓은 밑줄 부분을 읽는 건
점쟁이가 건네준 내 점괘를 읽는 것만큼이나 흥미롭다.

'수행遂行'의 遂는 굳이 찾아보니 '드디어 수'이다.
보잘것없는 일상의 작은 행동들을 하나하나 해나가는 것이
'수행修行'이라고 마음 깊이 받아들인 건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수행'을 생각하니 왠지 <일상 예찬>이라는 책 제목이 떠올랐다.
그림들이 재밌어서 가끔 꺼내 보는 책이라 바로 찾아 페이지를 펼쳤다.
몇 장 넘기니 '불행이나 행복 앞에서 날뛰지 않았다는 스토아 철학풍의 현자'
스피노자의 한마디와 함께 꽤 마음에 드는 구절에 밑줄이 쳐져 있다.

"현실과 완벽, 나는 이 두 가지를 같은 뜻으로 여긴다."
일상생활을 그린 네덜란드 화가들은 도덕의 존재를 순순히 수긍하면서도,
매우 자발적인 행위라 할 수 있는 삶에 대한 강렬한 애착을 통해
그 도덕을 초월하는 것이다.
(...)
네덜란드 회화는 미덕도 악덕도 부정하지 않으며,
그것들을 존재하는 세계 앞에서의 충일한 기쁨으로 초월시킨다.
(...)
화가들은 아름다움이 가장 무의미한 오브제,
가장 평범한 행위 속에 깃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 츠베탕 토도로프 <일상 예찬>(165~167쪽)


책들이 일제히 말을 걸어오는 날이 있다.
뻔히 아는 사실이나 미루어 짐작할 뿐인 어떤 이치도
활자로,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날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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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31 20: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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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31 20: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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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31 21: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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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31 23: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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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1 15: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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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2 15: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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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12-02-02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언제고 꼭 읽고 싶다. 아직은 나와 멀어, 일단 책부터 사야하고! 했는데, 집에 있는 책이었네요 ㅎ 일단 읽는 일부터 해야겠는데, 청소는 언제 할겨??!!
로드무비 님의 이 글을 읽고, 앉은 자리에서 쉼표(,) 찍으며 생각해요~
그래 천천히 살자, 책들이 일제히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날..! 만끽하고 싶어요..

로드무비 2012-02-02 15:38   좋아요 0 | URL
icaru님 저도 그런 책이 꽤 되더군요.
<사람들은 자가 집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다>라는 제목의
이승우 소설집도 있는데...
심지어는 이 소설집이 어떻게 우리 집에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청소 작파하고 책 읽는 재미가 그저그만이었습니다.
덕분에 페이퍼도 하나 건지고.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