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망스
윤태호 지음 / 애니북스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로망스>는 <혼자 자는 여자>라는 기괴한 컬트만화와 <야후>의 작가 윤태호가 2002년 모 신문에 연재하던 작품들을 모아 펴낸 노인들의 비망록이다.  로망스와 노인은 별로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고? 그런 말씀 마시라. 노인의 사랑이 얼마나 절절하고 진국인데! 박진표  감독의 영화 <죽어도 좋아>도 못 봤는가?  나는 그 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비로소 노인들의 사랑도 가슴 두근거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상대에 대한 독점욕 때문에 시기와 질투로 몸부림치다가 같이 밥을 먹고 잠자리를 함께 하면서 정이 들고 조금 싫증도 내고 하는 그 모든 '로망스'의 과정을 하나도 빠짐없이 밟는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한마디로 젊은이들의 연애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이상할 정도로......

만화비평가 이명석은 이 책을 한마디로  '한국 최초의 본격 노인 개그 만화'라고 정의했다.

"김이용이올시다. 올해로 70 먹었고 딸 둘, 아들 하나 두었시다. 40년 넘게 나라녹을 먹었는데......그 덕에 우리 식구 건사하고 집도 하나 장만하고......"

이 만화에 제일 먼저 등장해 꾸벅 인사를 올리는 김이용 노인은 바로 우리 아버지나 혹은 할아버지의 초상에 다름아니다.  아들네와 함께 살고 있는데 아들내외가 부부싸움이라도 한 기색이면 아내와 함께 눈을 찡긋하고 방으로 들어가 고래고래 부부싸움을 시작한다. 그 서슬에 아들 내외의 냉전은 눈 녹듯이 풀리고......

"머라꼬? 갸가 갔단다!"

'날고 기는 파랑새'라는 닉네임(월남 파병용사였다)의 할아버지는 용돈이 궁하면 친구의 부고 소식을 들은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연기해 며느리와 부조금 흥정에 들어간다. 수화기를 든 채 "머라꼬?"라고 외치는 날고 기는 파랑새 할아버지 모습을 못 보여주는 것이 한인데 가만 보니 표지의 저 할아버지다. 저승사자들이 잡으러 왔다가 이 노인의 만담에 넘어가 번번이 빈손으로 돌아갈 정도이니 그의 구라 솜씨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너  누구냐?"노망기가 있어 초등학교 3학년 손주의 존재를 끊임없이 확인시켜 주고 그나마 대화 상대가 되어주는 할아버지도 나온다. 아이의 응석을 받아줘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는 집 아이들은 버릇이 나빠진다고 눈살 찌푸리는 젊은 엄마들이 많은데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말이다. 어릴 때 도망가서 숨을 수 있는 탑탑한 할머니의 치마속 냄새를 기억할 수 있다는 것도 얼마나 큰 인생의  축복 중 하나인데!

현역으로 뛰고 있는 열쇠장이 노인은 스스로 학위 없는 열쇠박사라 자부하며 남의 집 고장난 자물쇠를 고쳐주는 것은 물론 가끔 눈이 맞은 독거노인의 하룻밤 애인이 되어주기도 한다. 아아, 그의 유능함이라니! 그외에도 이 만화에는 조금 얼빵한 조폭 모씨,똥침 마니아 모씨, 탈모 청년, 30대지만 50대로 보이는외모로 모욕적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경로당을 찾아가 귀여움을 흠뻑 받는 노처녀도 나온다. 철저하게 서민, 그 중에서도 주변부에 속하는 등장인물들이다.

<로망스>라는 제목의 로망은 그 외에도 노망(老妄)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노인들의 조금 꼬질꼬질한 듯한 모습과 일상은 너무나 리얼하고 코믹해서 에피소드들을 읽어나갈 때마다 웃음이 피식피식 나온다.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면서 산적해 있는 노인문제들. 그 많은 문제를 정면으로 심도 깊게 다룬 건 아니지만 윤태호가 그려낸 노인들의 표정과 일상은 너무나 생생하게 살아있어서 늙어가는 부모님의 모습이나 자기자신의 노년을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아마 그것이 이 책의 제일가는 미덕 아닐까?

이 리뷰의 제목처럼 젊은이들에게만 하루가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가끔 잊고 살고 있다. 노인이 되면 인생이 끝장이라도 나는 것처럼 무서워 하면서......자기도 언젠가 노인이 될 것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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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누리 2004-09-19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특한 책이네요. 노후대비하여 보관함에 넣었어요^^ 추천하고 가요...

2004-09-19 18: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4-09-20 0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누리님, 그래요, 이제 노년을 대비하자고요. 조금씩......^^
속삭이신 분, 우와 그게 정말이에요?
정말이겠죠. 멋진 일입니다.
저도 그런 추억 하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님의 기분 이해합니다. 저라도 그럴 것 같아요.
그런데 도대체 얼마나 예쁘시길래, 흥!^^

2004-09-20 1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4-09-20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20대에도 안 참했던 사람 여기 있습니다!
계속 염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