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읽는 국화와 칼 Picture Life Classic 4
루스 베네딕트 지음, 김진근 옮김 / 봄풀출판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 국화는 본래 만세일계(萬歲一系)라 불리는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꽃이고,
칼은 일본 사무라이 계층과 그 정신적 지주인 무사도의 상징이다.
저자는 일본 민족의 영혼 깊숙이 숨어 있는 전혀 다른 특징 두 가지를 표현하기 위해
국화와 칼이라는 상반되는 이미지의 사물을 제시했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일본인은 온순하고 예의 바르고 겸허하지만
또한 거칠고 야만스러우며,국화를 재배하는 일에 깊이 심취하는 것처럼
아름다움을 추구하지만, 폭력적이며 무사도와 칼의 명예에 집착한다.(서문 중에서)

리뷰에 마음놓고 딴소리를 하기 위해 서문을 좀 길게 인용했다.
최근 일본과 관련하여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이번 동계올림픽 때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걸고 아사다 마오가 은메달에 머물게 되자
선수와 일본 네티즌이 보여주었던 신경질적인 반응이었다.

또 하나는 지난주 MBC의 시사 프로그램('후, 플러스')에서 본 양심적인 일본인들.
1945년 9월 배를 타고 해협을 건너다 폭풍 속에 사라진 우리 나라 노동자(미쓰비시 징용공) 
246명 중 수습이 된 유골을 보관하고 있는 일본 스님과 주민들의 얼굴이었다.
자국 국민의 유골을 몇십 년째 방치하고 진상조사조차 외면하는 한국 정부의 무신경과
몰지각한 처사를 생각하니 위패를 세우고 보관해 주는 일본 스님들과 주민들에
감읍할 뻔했는데... 금방 제정신이 들었다.
(일본이야말로 이 비극적인 사건의 원인 제공자가 아닌가.)

일본인들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고 한다.
자신들이 앞장서서 낙후된 이웃 나라들을 도와주고 이끌어야 한다고.
그것이 이른바 침략의 이유가 되었던 '대동아 공영권'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도 뻔뻔한 얼굴로 "우리는 당신들을 도와주려고 했는데
왜 고마워하지 않느냐고"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엉뚱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생각의 저변에는 천황제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깔려 있다.

지난해 후지와라 신야의 야심찬 논픽션 <황천의 개>릃 읽으며 일본이라는 나라와
일본인에 대한 궁금증이 두 배 이상 증폭되었다.
세상에서 점점 잊혀져 가는 '옴 진리교'의 교주 아사하라 쇼코의 고향을 찾아
그의 정신의 뿌리를 뒤쫓는 긴 글이 책 뒤에 실렸는데,
후지와라 신야의 치밀하고 집요한 접근 방식이 인상 깊었던 것이다.
그는 직관을 무기로 오랜 시간 그의 뒤를 밟아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아사하라 쇼코의 새로운 면모를 밝혀낸다.

루스 베네딕트의 <그림으로 읽는 국화와 칼>을 읽으며 다소 신기한 체험을 했다.
위에 소개한 <황천의 개>처럼,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이나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일본 문학의 한 장면 장면들이 저절로 떠올랐던 것이다.
마음의 상처를 입었으나 이를 내색하지 않는, 나른하고 퇴폐적인 정조가
일본 소설에는 눈에 많이 띄는데 이 책에는 일본인들의 과도한 '부채의식'이나 집요한 성정,
탐미의식 등이 일본의 역사와 함께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

히라시노 게이고의 <사명과 영혼의 경계>나, 비교적 최근에 읽은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 텐도 아라타의 <애도하는 사람> 등도 예외는 아니다.

"우유를 다 마셨으면 차례대로 자기 번호가 적힌 케이스에 종이팩을 갖다놓고
자리에 앉아요. 다들 마신 것 같군요. '종업식 날까지 우유?'라는 소리도 들리던데
우유시간도 오늘로 끝입니다. 고생 많았어요."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고백'이라는 부제가 붙은 소설 <고백>의 첫머리다.
상냥한 미소에 다정다감한 목소리의 젊은 여교사는 종업식에서 우유 이야기를 시작으로
자신의 어린딸이 살해되던 날과 자신의 전인생을 학생들 앞에서 털어놓는다.
좋은 것은 좋은 것대로, 나쁜 것은 나쁜 것대로 받은 것을 그대로 되돌려준다는
일본의 부채 의식과 복수 심리가 소설 속에 잘 녹아들었다.

'인간은 그 사람이 아니고는 해낼 수 없는 사명이라는 걸 갖고 태어난다'고 강변하는
히라시노 게이고의 의학 스릴러 <사명과 영혼의 경계>.
그리고 인간 각자의 죽음은  노천에서 얼어죽은 거지나 심지어 살인자의 죽음이라도
각자 고유한 죽음이고 그들을 구체적으로 기억하며 애도해야 한다며 타인이 죽은 자리를
찾아 떠도는 <애도하는 사람>.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을 우위에 두고 명예와 의리를 추구하는 일본인의 속성이
어느 작품보다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의 저자 루스 베네딕트 여사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봇짱(도련님)> 중
빙수 한 그릇을 얻어먹고 앙앙불락하는 주인공을 '일본인의 과도한 보은정신'의 예로
들고 있다. 빙수 한 그릇 가지고 난리 치는 주인공이 그렇게 이상하다면, 
그보다 더한 다른 숱한 소설의 주인공들은 어쩌란 말인가!
구체적인 범죄보다도, 개인에 가해지는'수치와 모욕'을 더욱 견딜 수 없어하는
일본 소설 속 인물들은 소심하면서도 또 굉장히 강하고 단호한 태도를 보여서 
어리둥절하면서도 흥미를 유발하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주목했던 부분은 일본인의 '이중성'이다.
천황의 명령이라면 죽음의 불바다도 뛰어들었던 그들이 천황의 항복 선언과 함께
깨끗이 패전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나라 건설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부분.
좋게 보면 합리적이고 쿨한 태도인 것 같으나 어쩐지 무시무시한 데가 있다.
'죽음을 불사하는' 일본인의 생사관은 '사무라이 정신'과 맞닿아 있다는데......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의 생사관을 볼 수 있는 <죽기 위해 사는 법>에는
가난한 집안 형편을 염두에 두지 않고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결심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자신의 욕망을 위해 '죽을 자리'를 궁극적으로 떠올리며
이제까지의 자신과 깨끗이 결별하는 청년 기타노 다케시의 얼굴은 바로
<국화와 칼>에서  보여주는 일본인의 초상에 가장 가까운 것 같다.
(일본 문학작품 속에는 평소 예의 바르고 소심하며 의리에 목숨을 걸다가
어떤 상황에서 갑자기 화산처럼 폭발하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림으로 읽는 국화와 칼>을 읽으며 문득 떠오른 몇몇 문학작품과 
나의 소소한  생각들을 가볍게 연결시켜 보았다.
일본인의 특성뿐 아니라 역사도 개관하는 등 무게감이 상당히 있는 책인데도
우키요에 그림과 사진, 삽화들이 풍성하게 실려 있어서 재밌게 읽힌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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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3-08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화와 칼을 통속적으로 풀어 쓴 책이 전여옥<일본은 없다>입니다.이 두 책을 연속해서 읽어보면서 여러가지가 떠오르더군요.혹시 관심 있으면 시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로드무비 2010-03-08 22:38   좋아요 0 | URL
일본은 없다가 처음 나왔을 때 읽고 뭔지 꽤 그럴듯하다고 여겨져
다음에 나온 두어 권의 책(간절하라 어쩌고 하는 책까지)도 챙겨 읽었는데요.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노이에자이트 님, 반갑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3-09 16:36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국화와 칼'을 보면 우리나라에도 있는 관습을 일본 특유의 것으로 알고 있는 것도 있더군요.베네딕트가 우리나라도 연구했다면 책 내용이 달라졌을 겁니다.역시 그녀는 일본어를 전혀 몰랐다는 것이 큰 약점이지요.깊은 정글이나 외딴 섬의 부족을 연구하기 위해 그곳 언어를 직접 공부해서 낸 연구서와 비교해서 아무래도 그런 점을 많이 지적받는 것 같습니다.
재밌는 것은 주한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이 이중성이 강하다고 한다는 거죠.제가 아는 외국인도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구요.

로드무비 2010-03-09 22:45   좋아요 0 | URL
미국 내 일본 포로들의 생활모습과 인터뷰에 많이 기대어 쓴 글이라더군요.
말씀하신 것처럼 일본보다 도리어 우리나라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들도
꽤 있었습니다.
얼마나 정확한 연구서냐 하는 건 사실 제 관심 밖의 일이고
일본인의 특성들 중 매치가 되는 문학작품들을 떠올리니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인의 '이중성'이 그렇게 강한가요?
잘 모르겠지만 일본인의 이중성과는 또 다른 종류 같은데요.^^

노이에자이트 2010-03-09 23:27   좋아요 0 | URL
결국은 보편성 특수성 문제로 귀결되는 것 같아요.그리고 이중성 문제인데 생소하고 이질적인 대상에게 이중적이라고 하는 것 같아요.로드무비 님 말처럼 이 세상 사람 모두 이중적인 데가 있지요.그 이중성 자체가 좀 다양하게 나타나는 게 아닐까요...

릴케 현상 2010-03-08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 잘읽었습니당...로드무비님 독서의 폭을 여지없이 보여주시는군요, 전 여지껏 국화와 칼도 안 읽었다눙

로드무비 2010-03-08 23:53   좋아요 0 | URL
제 알량한 독서의 폭을 보여주기 위해 용을 좀 썼습니다요.^^
산책님, <국화와 칼> 꽤 재밌어요.

2010-03-08 2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08 2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瑚璉 2010-03-09 0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인과 천황"이라는 책도 퍽 흥미로운 책입니다. 한 번 읽어보세요.

로드무비 2010-03-09 12:20   좋아요 0 | URL
<맛의 달인> 저자네요.
언제 꼭 읽어보겠습니다.^^

rainy 2010-03-09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구성이 골고루고, 맛있고, 영양까지 알찬 식사를 만끽한 것같은 리뷰에요 ^^

로드무비 2010-03-09 12:39   좋아요 0 | URL
좀 횡설수설인데... 그렇게 봐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요.^^

지혜네 2010-04-22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길 이제사 들어와 봤네요. 3,4월 계속 바쁘더라구요. 이것저것 읽어보는 재미가 쏠쏠해서 시간가는줄 모르겠네요.^^ 추천해주시는 책들 열씸히 읽을께요. 건강하세요.

2010-04-26 14:3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