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을 읽을 때는 잠시 정신이 들기도 하는데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또 알아차리게 된다.
조금 전 나의 희미한 깨달음은 '먼지 낀 눈에 보이는 허공꽃' 같은 것이라고.

지난 봄, 지리산의 한 암자 책꽂이에서 책을  훔쳐왔다.
남회근 선생의 알기 쉬운 <불교수행법 강의>.
'훔쳤다'고 표현했지만 밥을 먹고 나서 일행과 차를 마실 때
스님에게 말씀 드렸다.
눈독 들이고 있는 책이 몇 권 있는데 그 중 한 권 가져가도 되냐고.
스님은 알아서 하라고 반승낙(?)을 하셨고 나는 얼씨구나 하고 다음날 아침
그 두툼한 책을 가방 깊숙이 넣어 왔던 것.

몇 년 전 그 암자에 처음 갔을 때 사랑방 책꽂이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박종철 출판사에서 나온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 두툼한 선집 중에서 달랑 한 권(제1권)만 주문했다.
읽어본 적도 없고 보나마나 앞으로도 읽지 않을 책을 전집으로 주문해 꽂아두는 건
허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딱 한 권은 품에 지니고 싶었으니, 그건 무슨 심리일까?

얼마 전 <엄마가 뿔났다>를 보는데 1년 휴가를 얻어낸 김혜자가 혼자 사는 방
책꽂이가 눈에 띄었다.
몇 권 기우뚱 나이브한 제목의 책들 사이에 <막스 레닌주의와 언론>이 눈에 들어왔다.
김혜자의 방 책꽂이에 꽂힌 책도 작가 김수현이 직접 골랐을까?
아니면 김혜자가?
아니면 순전히 어쩌다가?

그런데 참 이상한 일도 다 있다.
지리산에 다녀온 지 얼마 안 되어 훔쳐온 그 책을 어느 친구에게 선물받았다.
나는 뻔뻔하게도 '이럴 줄 알았으면 딴 책을 가져올걸!'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 주말 친하게 지내는 가족들과 어울려 2박 3일로 지리산에 다녀왔는데
남회근 선생의 그 책을 도로 가져가 스님 몰래 얌전히 책꽂이에 꽂아두고 왔다.

생각해 보니 나에게는 '도벽'이  좀 있는 것 같다.
어릴 때 지구본 저금통, 그리고 백수 시절 엄마 아버지의 주머니를 뒤진 것부터 시작해서......

어제 아침 모 방송 프로그램에는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보유자 한복려 선생의
인터뷰 장면이 잠시 나왔는데, 그의 작업실 벽에는 누군가 붓으로 멋지게 쓴
자가
액자에 걸려 있었다.
형형한 눈빛이 나를 지켜보는 듯 살아 꿈틀거리는 필체였다.

누군가의 방 벽에 걸린 액자 속의 글이나 책꽂이에 꽂힌 책들에
시선을  빼앗기곤 한다.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의 일환이라고만 편하게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다.

얼마 전 신문기사인지 인터넷 포털 기사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런 글이 눈에 띄었다.

- 김장훈 득도.

눈을 비비고 다시 한 번 봤더니 '득도'가 아니고 '독도'였다.
착시현상이 요즘 부쩍 심해져서 형이상학적으로  처리,
눈에 먼지가 낀 것이라 믿고 싶지만 그것이 아님을 너무도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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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7 18: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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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7 21: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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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8 15: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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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8 21: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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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 2008-10-08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리산 칠불암(언젠지부터 칠불사로 승격?) 아래 茶 만드시는 내외분의 민박집...
장식이라고는 한구석 놓인 다듬잇돌과 천정에 그네마냥 내린 대(竹)옷걸이
1문, 2창, 1벽 구조의 나트막하여 다락같은 느낌의 단촐한 그 방...
친구야, 우리 뿔 나지 않아도 훌쩍 길 떠나 한 번 자묵자..
맘이, 생각만으로도 헛헛해지는 거이.....맘에도 먼지꽃이 피여....

로드무비 2008-10-08 21:08   좋아요 0 | URL
먹자판 여행에 떼를 지어 다니다 보니 근처 실상사니 보국사니 하는 절들도
한 번 들어가 보지 못했다. 말이 지리산 여행이지 산행은 잠깐이요,
참숯가마 찜질방이 필수인 코스라니!
그때가 언제지?
아우라지, 철길이 지나는 길이었던가?
그때처럼 저녁 무렵 낯선 길 위에서 만나도 좋겠다.^^


흰머리김 2008-10-12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친하게 지내는 가족이 누구인지 난 알고 있다. ㅎㅎ
쌀쌀한 날씨에 잘 지내고 계시지요.
지리산은 단풍이 들었나.......
마감을 끝내고 멋진 하루를 보내볼까 하는데 뭐~~
딱히 없네요. 이곳 상해는.
가고 싶다. 지리산..... 먹자판 여행은 뭐랄까
나이듬을 보이는 것 같은 슬픔이..
예전 힘차게 뛰고 놀던 시절을 생각하시어
다음에는 산행을 주로하는 여행을 다녀오시기를..
젊음이여 다시 내게오라~~~~

로드무비 2008-10-12 18:00   좋아요 0 | URL
마감이 월말인 줄 알았더니 무려 열흘 뒤라니...ㅎㅎ
먹자판여행도 좋아.
먹고 마시고 낄낄거리고.
그런 날도 소중해.(뭔들 안 소중하겄어.)

산행은 아무래도 세 시간 이상은 무리.
말벌대소동이라고 할까.
갑자기 나타나 따라다니는 말벌 때문에 예정된 코스를 다 가지 못했는데
난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나.^^
(이르지 마시오.)

그건 그렇고 아직 새파란 이가 젊음 타령이라니!떽!!

2008-10-16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리산에 다녀왔구나! 난 주말에 동은이 다솜학교에서 북한산에 갔었어. 엄청 용기를 내서 밧줄를 잡고 암벽도 타고... 300m 정도의 낮은 봉우리를 올랐지!
평소 운동을 안했는데도 빨빨거리고 다녀서인지 이번엔 휴우증도 없네.
등산 전문가인 다니엘쌤과 젬마쌤을 만나서 좋은 이야기도 듣고...



로드무비 2008-10-21 14:27   좋아요 0 | URL
엄마학교라는 게 생겼다는데 나도 거기 가볼까?
요즘 컨디션이 좋다니 다행이다.
참치회 먹으러 안 와?
전화할게.^^

2008-10-20 10: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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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0 15: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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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0 15: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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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1 14: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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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11: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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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1 12: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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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1 14: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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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01: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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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09: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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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09: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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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11: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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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15: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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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3 13: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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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5 11: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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