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있습니다


조조 4천 원에 영화를 보려고 아침부터 너무 서둘러서 그랬는지,
매표소 앞에서 잠시 영화 제목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떤 하루> 한 장이요." 했더니 담당 여직원은  "'멋진 하루' 말씀이시죠?" 하면서
표를  내민다.
<여자 정혜>의 이윤기 감독이 연출했으며 전도연 하정우가 헤어진 연인으로,
1년 전에 빌려간 돈을 당장 내놓으라며 여자가 남자를 하루종일 따라다닌다는
정도로만 이 영화를 알고 있었으니,  영화 제목을 바꿔 말한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병운(하정우)이 죽치고 있는 스크린 경마장에 불쑥 찾아온 희수(전도연)가
처음으로 내뱉는 말이 "돈 갚아!"이다.
몰골을 보아하니 삼만오천 원도 없을 것 같은 병운에게 삼백오십만 원이 있을 리 없다.
영화 포스터의 '이렇게 만나고 싶지 않았다'라는 헤드카피가 절묘하다.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며 이별을 통보했는데 그 결혼도 깨지고 직장은 구하기 어렵고
쪽팔리는 일이지만 빌려주고 못 받은 돈 350만을 받으러 온 참이다.
채권자와 채무자가 되어 1년 만에 만나는 연인 관계처럼 어색한 게 또 있을까.

독 잔뜩 오른 얼굴로 나타나 오늘중으로 빌린 돈을 모두 받아내고 말겠다니
병운은 그녀를 대동하고 돈을 꾸러 나선다.
그날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강남에서 강북, 서울의 이 구석 저 구석,
돈을 구하러 떠도는 구차한 로드무비인 셈이다.

<여자, 정혜>에서 변두리 우편취급소에 근무하며 혼자 사는 미혼여성의 삶을
가타부타 아무 말 없이  흑백 다큐멘터리처럼 펼쳐 보였던 이윤기 감독은
정혜와는 또 다르게 제법 앙칼지고 야무진 희수를 새 영화에 등장시켰지만
두 여성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화장을 거의 안한 듯한 투명한 얼굴의 정혜(김지수 분)가 식물성이라면,
스모키 화장으로 제법 세상에 대해 적의를 나타내는 것 같지만
뾰족한 수가 없는 건 희수(전도연)도 마찬가지이다.
반죽이 좋달까 요령이 뛰어나달까 거의 처세술의 달인으로 보이는 병운이지만
그도 맹탕.





살아가는 일은 아슬아슬한 줄타기와 같다.
술판에도 못 끼고 늙다리 오토바이족 틈에 끼어앉아 기주봉이 권하는 담배를 피우는 희수.



그것은 몇 푼의 돈을 빌리기 위해 만나는 병운의 지인들도 다르지 않다.
사촌형을 만났더니 마침 옥상에서 오토바이 동호회원들의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허름한 옥상의 계단 밑에는 하릴없이 하늘바라기를 하고 있는
중년의 오토바이족이 있다.
가죽점퍼를 입고 선글래스를 멋지게 쓰고 폼을 잡고 앉아서도 막막한 그 표정들이라니......

그런데 신기한 건 연상의 여성 사업가, 어쩌다 알고 지내는 호스티스, 대학 시절 승마부 후배,
스키 강사로 잠시 일할 때 만난 제자,  이혼 뒤 싱글맘이 된 초등학교 여자 동창까지
갑자기 찾아와 손을 벌리는 병운을 귀찮아 하거나 따돌리는 기색이 없다는 것.
그들은 병운의 손에 백만 원부터 십만 원까지 다문 얼마라도 쥐어서 보내거나 하다못해
술이라도 한잔 먹여 보낸다.
어떻게 보면 돈을 빌려주는 입장의 그들보다 , 또 병운을 사정없이 족치는 희수보다,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병운이  유리한 위치를 점한 것처럼 보이는데.

옥신각신하던 그들이 밥 한끼 먹으러 찾아간 단골집 제주식당은 문을 닫았고
종로의 단성사는 며칠 전 부도를 맞았다.
그 낡은 식당에서 이모님이 해주는 생선찌개백반을 먹고 싶었는데
징거버거를 베물어야 하고, 나는 아직도 멀티플렉스 극장이 거북하기 짝이 없다.

지리멸렬한 남녀의 삶을 보여주는 이 영화, 희수와 병운 역에
<여자, 정혜>의 김지수와 황정민을 떠올려보았다.
사실성은 좀더 획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속은 더 메슥메슥했겠지만.

아무리 영화 속이라지만 돈을 좇는 두 사람의 뒤를 따라다니는 일은 피곤하고 피곤했다.
'이제 도합 이백십만 원 받았으니 남은 돈이 얼마...' 
어쩌자고 나는 병운의 남은 빚을 어두운 객석에서 함께 세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극장문을 나서는 사람들의 입가에는 대부분 왜 희미한 웃음이 맴돌았던 걸까?























계단 이 장면 괜찮지? 파일로는 사진을 분간할 수 없어 뒤늦게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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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8-09-30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포일러 있습니다' 이 말 때문에 사진만 보고 죽 내려버렸어요. ^-^;;
모두들 이야기 하시니, 안 그래도 끌렸던 이 영화 , 보러가야겠어요.

로드무비 2008-09-30 16:51   좋아요 0 | URL
치니 님,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나면 왠지 보러 가기 싫어지지 않나요?ㅎㅎ
엄청나게 끌리진 않았는데 보러 갔고, 꽤 재밌었습니다.
'누들'이나 '캐러멜'보다 좋았습니다요.^^


2008-09-30 17: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01 0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08-09-30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이 영화 보고 왔어요. 모두 다 좋았는데 러닝타임이 좀 길었던 것 같아요. 10분만 잘랐으면 더 좋았겠다고 생각했어요^^;;;;

로드무비 2008-10-01 00:50   좋아요 0 | URL
마노아 님, 전 길다는 생각은 못했는데.
아닌게 아니라 허리가 좀 아프더구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