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하게 참 철없이 - 2009 제1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창비시선 283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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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밥 한 그릇이
소반 위에 놓여 있다
소반이 적막하여서
무밥도 적막하여서
송송 채를 썬
흰무의 무른 살에 스민
뜨거움도 적막하여서
무밥 옆에 댕그라니 놓인
양념간장 한 종지도
옛적에 젊은 외삼촌이
여자를 만난 것처럼
가난하게 적막하여서
들척지근하고 삼삼한
이 한 저녁을
나는 달그락달그락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무밥' 안도현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


떡잎이 누렇게 진 시든 채소를 다듬어 삶아 나물 한 접시를 무치고,
냉동실에 굴러다니는 꽝꽝 언 생선을 녹여서 굽거나 찌개를 만들어
버젓이 한 끼를 해결하고 나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다.
나의 알뜰살뜰함과, 소박한 찬이 주는 만족감이라니......

'달의 변화 관찰'이라는 딸아이 학교숙제 도움을 받기 위해
몇 달 전 늦은 밤 딸아이 친구의 집을 찾았을 때
열 살, 여덟 살인 두 살 터울의 자매가
소매끝이 나달나달하고 목이 늘어져
어깨가 드러날락 말락 하는 내복 차림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낡은 내복을 입은 보름달 같은 어린 자매의 모습은
김치냉장고 사는 데 보태기 위해 마트 일을 나간다는
그 엄마의 말과 함께 그립고 순정한 풍경으로 다가왔다.

<간절하게 참 철없이>는 평소 그립고 순정한 풍경을 보여주는
안도현의 신작 시집이다.
특히 2부에 묶인 22편의 시는 시인이 밤새도록 끓인 뜨끈한 국밥 같다.
그가 차린 개다리밥상 위에는 찌그러진 알루미늄 냄비나  손때 묻은 막사발에
무밥이나 갱죽(53쪽, "밥알보다 나물이 많아서 슬픈 죽")이 
김을 피워 올리고 있다.
'통영 서호시장 시락국'(73쪽)은 내 언젠가 꼭 가서 먹어보고 말
맛집 명부에 오르고......
"들척지근하고 삼삼한" 무밥이나 시락국은 음식이라기보다 내게는 뭐랄까,
소박하고도 견고한 정신성의 상징 같다.

날씨가 춥다.
정육점에 딸린 동네의 허름한 식당에서,
프라이팬에 파채랑 수북히 얹어서
삼겹살이나 지글지글 구워 먹었으면 좋겠는 저녁이 온다.



 

***창비 서평단으로 받은 시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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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8 20: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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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9 07: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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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8-01-18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오늘 낮에 시락국 먹었어요.^^
어느 샘과 이름도 예쁜 '꽃마을'이란 동네의 할매집이라는 식당에서요.
소박하고 견고한 정신성의 상징.. 마음에 닿는 구절입니다.
뚝배기에 담긴 시락국에 소박한 밑반찬 몇가지와 쭉쭉 찢어먹는 벌건 김치가
어찌 맛나던지요. 무조림이랑 빡빡하게 끓인 된장찌게도요~

로드무비 2008-01-19 00:07   좋아요 0 | URL
시락국이란 이름 참 구수하고 예쁘죠?
맑은 된장국 잘 끓이는 게 힘들까요, 툭한 된장국 잘 끓이는 게 힘들까요?
이상한 의문들이 머리속을 오갑니다.
혜경 님, 저도 오늘 저녁 가자미와 함께 얼큰하게 졸인 무조림 먹었어요.^^

2008-01-18 22: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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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8 23: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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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9 07: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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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다예요 2008-01-19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밤새도록 끓인 뜨끈한 국밥, 같다니... 말만 들어도 속이 뜨끈뜨끈해지는 것 같아요.
예전엔 옆에 끼고 많이 보면서 그의 시가 연탄처럼 너무 뜨끈뜨끈해 좋았더랬는데, 요즘엔 냉랭한 것들에 익숙해져서 인지 최근엔 그의 시를 별로 읽질 않았거든요. 그래도 신작이 나왔다니 궁금하네요. 반가워요^^

로드무비 2008-01-22 13:08   좋아요 0 | URL
이게다예요 님, 그러니까요.
저는 안도현 시인의 시를 언젠가부터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모처럼 읽어보니 참 좋더라고요.
음식 시들은 특히 좋네요.^^


2008-01-20 03: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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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22 13: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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