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태일이 1 - 어린 시절
최호철 그림, 박태옥 글, 고래가그랬어 편집부 / 돌베개 / 2007년 11월
평점 :
지난 주말 아이와 함께 그토록 기다리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마녀 배달부 키키>를 보러 갔다.
마을버스와 전철을 갈아타고 왕복 다섯 시간이 걸리는 먼 길이라
읽을 책을 두어 권 챙기는 건 필수였다.
그리하여 골라든 책은 '와우산'과 '을지로순환선'의 화가 최호철이 그린 만화 <태일이>.
'와우산'이라는 작품은 언젠가 한 알라디너의 페이퍼에서 처음 봤는데
그 규모와 세밀함과 구불텅한 매력적인 선에 넋을 잃었다.
'을지로순환선'을 탄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과 표정은 또 어떻고......
이 책은 우선, '열사'니 뭐니 거창하게 수식하지 않은,
성을 뺀, 아이 이름 그대로의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신기하게도 만화 <태일이>에는 그 '와우산'과 '을지로순환선'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들이 다닥다닥 붙어 사는 초라하고 정겨운 인간의 마을이 그대로 나온다.
우리가 갈아탄 전철은 바로 그 을지로순환선이었다.
이 만화는 뭐랄까, <악동이>의 작가 이희재보다는 좀더 선이 굵고
인물이건 배경이건 간에 음영이 훨씬 짙다고 할까.
주인공 태일과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특징을 잘 살린 얼굴이 정감 있게 느껴진다.
마츠모토 타이요의 만화를 볼 때 매력적인 캐릭터나 독창적인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살아숨쉬는 듯한 골목의 그 가로등, 전신주, 담벼락의 낙서,
쓰레기통 하나까지 세밀한 묘사에 감탄을 금치 못했는데
만화 <태일이>는 그 못지않게 주인공이 살았던 1960년대라는 시대배경과 생활상을
아주 꼼꼼하고 리얼하게 그려 보여주고 있다.
아직 어린 태일, 태삼, 순옥 3남매가 땔감을 구하려고 돌아다니다
거리에서 만난 넝마주이 아저씨의 얼굴과 몸짓은 동양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는데.
전태일의 수기나 평전을 읽으며 상상했던 것보다 더 극심한 가난과 삶의 풍파가
사실적인 그림으로 펼쳐졌다.(1권: 어린 시절, 2권: 거리의 천사)
다음은 어제 아침 초등학교 3학년인 딸아이와 나눈 대화다.
"<태일이> 만화 어땠어?"
"재미는 있는데 무서웠어."
"태일이 아버지 때문에?"
"세상에 그런 아빠는 없지이? 자식이 공부하고 싶어하는데 때리고 일만 시키고.
자기는 술만 마시고."
다행히 그의 생몰연대는 내 머리 속에 확실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주하야, 이 만화는 실화야. 전태일이라는 청년이 실제 있었어.
청계천 봉제공장 노동자였는데 1970년, 그러니까 37년 전 11월 13일,
동료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싸우다 숨졌어.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이 대목에서 딸아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엄마는 해마다 아빠 생일도 정확하게 기억 못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기억을 잘해?"
"히히, 그러게 말이다, 주하야. 그런데 이 만화를 그린 작가만큼이나
오래 전 엄마에게도 엄청난 충격을 준 사람이거든.
전태일 평전을 읽고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고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잖아.
엄마도 그랬어."
(충격만 느꼈을 뿐, 내 삶을 구체적으로 변화시키진 못했다.
그런 것까지 아이에게 이야기하진 않았다. 구차하게 느껴져서......)
"그랬구나. 아무튼 3권이 빨리 나왔으면 좋겠어. 4, 5, 6, 7, 8권
계속계속 나왔으면 좋겠어. 태일이 오빠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