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읽고 나면, <여행의 이유>라는 제목은 참 정직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김영하는 이 책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핸드폰 하나로 하루에 세계일주를 할 수 있는 시대 아닌가?) 인간은 왜 여행을 떠나는가에 대해 쓰고 있으니 말이다. 통상적인 여행 에세이를 기대한 독자들은 당황하거나 실망했을 수도 있을 정도로 진지하고 묵직한 내용이었다. 나도 읽고 나서 시간이 좀 지나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억은 못 하지만, 김영하의 산문 중에서 가장 유머가 없다는 인상은 남아 있다. 아무튼 김영하가 저렇게 제목을 단 이유는 "작가님, 이 책은 제가 생각했던 그런 내용이 아니라고요!"라는 예상가능한 항의에 대한 알리바이가 아닐까 한다. "독자님, 죄송한데 제목을 다시 한 번 봐보시겠어요?" 

 김영하의 책에 대해 쓰려는 건 아니고, 나에게 '여행의 이유'는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그건 예상하지 못한 사람과의 만남이 아닐까, 라고 이번 도쿄 여행을 통해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일본을 꽤나 다니면서도 계속 미루었던 도쿄 여행이었다. 막상 비행기표를 끊고 나니, 그 어떤 여행보다 기대되는 마음이었다. 파면 팔수록 '먹고 마시기'에 이만한 도시는 없는 것 같았단 말이지. 도쿄 여행이니 도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기내에서 읽으면 좋을 것 같아서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챙겼다. 고등학교 때 읽고 거의 20년 만에 다시 읽게 되는 셈인데, 사실 혈기왕성한 고등학생에게 <노르웨이의 숲>(그때는 <상실의 시대>였지만)은 사실상 야설이었다.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고 남자 주인공이 2명의 여자와 섹스를 하거나 다른 여자와 또 섹스를 하거나, 고등학생 때의 나는 말 그대로 그 책을 탐독했다! '대학생의 생활은 저런 것이겠군.' 어떤 청소년은 저런 기대감으로 열심히 공부를 하기도 하는 법이다. 물론 그 청소년이 그런 소설같은 생활이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20여 년이 흘러 읽은 <노르웨이의 숲>은 좋다/나쁘다 이전에 남자 주인공이 너무 귀엽게 느껴졌다. 그 나이 특유의 치기나 반항심, 적개심이 귀엽게 느껴지다니, 이런 식으로 늙어감을 확인하게 될 줄이야. 


 책을 반쯤 읽었을 무렵 나리타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이때부터 뭔가 기분 좋은 하루가 될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왔는데, 그 이유는 내가 첫 번째로 비행기에서 내리는 승객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39년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비행기의 중간 정도에 앉았는데 공교롭게 그비행기는 출입구가 가운데 쪽에 있었던 거다. '오호, 온 도쿄가 나를 반겨주는군.' 


 도착해서 체크인을 마치자마자 '우에노-아키하바라-도쿄역-긴자' 코스 3만 보를 걸었다. 도쿄에 먼저 도착해 있던 일행과의 대화가 즐겁기도 하고 도쿄의 길거리 풍경도 눈에 담고 싶기도 해서. 그렇게 끝없이 걷다가 긴자의 한 이쟈카야로 향했다. 한국에서 미리 점찍어 둔 곳이었다. 여행 첫 날 저녁에 현지인이 많은 로컬 술집에 가는 건 내 습관인데, 연말이라 그런지 술집 안은 사람들로 바글바글, 한국과 같은 대기 시스템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어쩔 수 없이 나왔다. 급하게 주변의 다른 곳들 몇 군데를 찾아서 가봤지만, 가는 곳마다 만석이었다. 그 와중에도 '찾아서 가는 곳마다 만석인 걸 보니, 식당/술집을 찾는 감은 아주 훌륭하단 말이지.' 으이구, 그래서 행복하세요? 아무래도 번화가인 긴자 쪽은 안 될 것 같았다. 조금 이동해서 아키하바라 근방의 이자카야로 가 보기로 했다. 역시 미리 한국에서 찍어 두고 온 가게. 이걸 어쩌나, 여기도 만석이란다. 기다리겠다고 하니 자리가 언제 날지 알 수 없으니 돌아가란다. 어쩌겠는가. 나와서 다른 곳들을 찾아봐야지. 외진 곳이라 마땅한 곳이 안 보인다. 더 찾아다니기에는 3만 보를 걸었던 몸이 버티지를 못 하는 상황. 마침 동행인 S가 그냥 방금 그 이자카야가서 기다리는 게 어떻겠냐고 한다. 어쩌겠는가. 돌아가서 일단 기다려 봐야지. 가게에 가서 우리 상황을 설명을 하고(전달되었을지는 지금도 알수 없다.) 그냥 가게 앞에서 기다릴 테니 자리가 나면 불러달라고 부탁드렸다. 주인장이 처음에는 난색을 표하다가 다시 온 정성이 갸륵하게 느껴졌는지 그러라고 한다. 머리를 민 주인장의 인상이 강하기도 하고 표정도 살짝 무서워서 다른 데 갈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이미 갈 데가 없는 신세다. 가게 문을 바라보면서 하냥 기다리기로 한다.  




 한 10분 지났을까. 가게 안에서 누가 나오는 낌새가 나더니 문이 스윽 열린다. '역시, 나는 행운의 사나이! 비행기에서 제일 먼저 내릴 때부터 이 행운은 예정되어 있던 거였어!!'는 개뿔. 나오는 사람은 가게 주인장이었다. 오늘 일진은 영 아니군, 생각하던 찰나 주인장이 우리 쪽으로 다가온다. 두 개의 컵을 들고서. 기다리는 우리를 배려해 물 한 잔 주는구나, 싶어 적이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런데 잔을 건네면서 주인장이 핸드폰 화면을 보여 주지 않겠는가. 거기에는 "춥지? / 따뜻한 술이야. / 서비스", 이렇게 3줄이 번역기에 적혀 있다. 그렇다. 물이 아니라 추위에 힘들지 모를 이방인 손님을 위해 데워서 내온 사케였던 거다. 파파고로 번역한 문장이 이렇게 온기가 넘칠 일인가. 사케의 도수는 15도였지만, 저 순간 주변 공기가 30도까지 오르는 듯한 따뜻함. 주인장의 다소 완고해 보이는 인상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저 감동적인 접객은, 피곤해진 다리와 조금은 지쳐가는 마음을 포근하게 풀어주었다. 자리에 앉아 경험한 술과 안주도 너무 훌륭했다. 하지만 이 가게는 나에게 저 3줄의 문장으로, 그리고 가게를 나올 때 서로 과장되게 주고받은 손키스로 기억될 것 같다.


여행의 이유는 이런 예상치 못한 만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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