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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위화의 “인생”은 읽기에 만만치 않은 소설이다. 회고조의 쉽고 간결한 문장으로 일관하고 있음에도 푸구이 노인이 들려주는 인생사를 듣고 - 분명 읽은 것이었지만, 체감상으로는 분명 듣는 것에 가깝다. - 있다 보면 몇 번이나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저려온다. 어이 없는 사고로 아들을 잃고, 옛 전우가 문화혁명의 광풍 속에서 사라져 가는 것을 목격하고, 딸은 출산중 과다출혈로 죽고, 딸의 사후 아내마저 보내 버린 푸구이 노인의 삶. 그 후 불의의 사고로 사위마저 노인을 떠나는 장면에서 ‘이제 그만’을 내심 되뇌인 독자들이 나말고도 꽤나 많았을 것 같다. 하지만 위화는 그런 독자들의 애처로움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끝내 푸구이 노인의 마지막 피붙이인 어린 손주마저도 세상을 등지게 만들어버린다.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 난 이미 힘이 쫙 빠져 버린 상태였는데, 책을 덮고 생각해보니 이게 위화가 말하고자 하는 그 힘센 ‘운명’이 아닌가 싶다. “생각하면 할수록 아찔한 기분이었다네. 옛날에 아버지와 내가 집안을 말아먹지 않았다면 그 날 사형당할 사람은 바로 내가 아니었겠나? p.111” 에서 깨닫기 시작해 작품 내내 “생각해보니 그것도 다 운명이더구먼. p.138"의 형태로 다양하게 되풀이되던 그 가혹했던 ‘운명’말이다. 하긴,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말아먹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사람이라면 운명적인 무언가를 본능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그 후 사랑하는 이들을 하나둘 잃게 되면서는 그것을 운명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서는 버티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 ‘밀양’에서 아들을 잃은 신애가 ‘신’에게라도 기대지 않고서는 살아나갈 힘이 없었듯이 말이다. 운명이란 게 있다면 그 운명의 종류는 살아가는 인간의 수만큼은 있을 텐데, 이 정도면 참 가혹하다. 위화의 다른 작품인 ”허삼관 매혈기“에서 허삼관이 보여주는 운명은 피를 팔면서까지 가족을 부양해내는 것이었는데 ”인생“의 푸구이가 보여주는 그것은 어떠한 노력을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둘씩 떠나버리는 것이라 읽고 나서도 가슴 한 켠이 시리다.
나는 운명 따위는 믿지 않는다. 운명이라니, 이 얼마나 인생을 비겁하고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태도인가. 현실에서도 난 운명을 운운하는 인간들은 대체로 게으른 부류라고 생각한다. 운명이건 인연이건 노력과 집념의 결과일 뿐이라고 본다. 그럼에도 ”인생“에서만큼은 운명이라는 두 글자가 푸구이 노인의 삶에 겹쳐져 감동적으로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은 작가 위화의 역량이 그만큼 뛰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모진 운명을 담담하고도 낙관적인 시선으로 정직하게 풀어내는 솜씨 말이다.
위화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작품의 배경인 중국 근현대사도 빼놓고는 이 소설이 주는 감동을 이야기하기 어려울 것 같다. 푸구이 노인과 그 주변 사람들의 인생은 국공내전, 중국혁명,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등 중국 역사의 거대한 벌판 위에서 펼쳐진다. 중국 역사는 아주 얕게 공부를 한 것이 전부라 쓰기 망설여지지만, 문학의 소재로는 더할 나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여류 작가 샨 사도 “천안문의 여자”나 “바둑 두는 여자”에서 이를 잘 활용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위화는 활용을 넘어서 소설 자체가 하나의 중국사이고 중국사가 소설 속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는 느낌까지 준다. 역사적 배경이 거세된 채 푸구이 노인의 이야기가 외따로 존재한다면 내가 느꼈던 감동과 울림은 아주 미미했을 것이다. 특히 푸구이 노인이 젊은 시절 국민당군에 의해 강제로 전장에 끌려가서 목격했던 전쟁의 참혹한 광경 - 부상병들이 후방에 내팽개쳐져 치료도 보호도 받지 못한 채로 짐승처럼 울부짖다 죽어가는 장면 - 은 내 머릿속에 그 어떤 전쟁의 영상보다도 충격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다. 그 외에도 평범한 농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대약진 운동이나 문화대혁명의 모습들은 무수한 구호에도 불구하고 그런 운동들이 실은 얼마나 허구적이었는지를 고발하는 것 같다. 푸구이 노인이 그랬듯 어쨌거나 민중은 그저 열심히 농사를 짓고 악착같이 살아낸다. 위화의 말마따나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임을 푸구이 노인은 몸소 보여준다. (이와 관련, “인생”보다는 개정되기 전의 “살아간다는 것”이 더 훌륭한 제목이 아닐까 한다. 좋은 제목을 괜히 바꿨다는 인상을 받은 건 나뿐인가.)
작품 해설을 보니 위화의 부모님께서는 문화대혁명 당시 의사였다고 한다. 그 덕에 문화대혁명의 광풍을 피할 수 있었던 위화는 어려서부터 집앞의 병원에서 매일같이 무수한 사람들이 고통에 신음하고 죽어가는 광경을 보고서는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고 한다. 나는 그 고민의 결과가 “인생”에서 깊이있게 묻어나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삶과 죽음,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이지만 그 이유에서 참 다루기 어려운 주제를 이처럼 과장없이 감동적으로 그려낸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위화 스스로가 밝히고 있는 소설 쓰기의 시작점, ‘마음의 소리’ 또한 “인생”이 감동적으로 다가오게 해주는 보이지 않는 힘일 것이다.
“진정한 작가는 언제까지나 마음을 향해 글을 쓴다. 마음의 소리만이 그의 이기심과 고상함이 얼마나 두드러지는지를 그에게 솔직하게 말해줄 수 있다. 마음의 소리는 작가가 진실로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자신을 이해하면, 곧 세계를 이해한 것이다." p.10
‘마음의 소리’로 위화가 계속해서 훌륭한 소설을 써내기를 한 사람의 독자로서 바랄 뿐이다. “인생”은 근래에 읽은 소설중 가장 감동적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