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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0월
평점 :
힘을 뺐다. 기름기도 쏙 빠졌다. 폼을 잡지도 않고 괜한 포즈를 취하지도 않는다. 소설가란 가능한 모든 형식을 동원하여 이야기를 하는 존재일 뿐이라고 웅변하는 듯 하다. 개인적으로 이것을 다이어트 하는 소설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기호의 처녀작 “최순덕 성령충만기” 이야기이다. 그가 전해주는 이야기는 형식이 독특할 뿐만 아니라, 그 내용도 대체로 상상력이 돋보이는 황당한 것들이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 꾸는 몽상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들. 그러나 어찌하랴? “하지만 우리는 다 알고 있다. 때론 그런 일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p. 266) 그래서 그의 소설은 재미있게 그리고 생각보다 리얼하게 읽힌다.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까지 다이어트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으니 이만하면 좋은 소설이라 불러도 될 것 같다.
먼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머리칼 전언’과 ‘백미러 사나이 - 사물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에서 드러나는 몸의 감각에 관한 것이다. 내 몸에 속해 있는 것이긴 한데 나의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감각들. ‘머리칼 전언’의 여자의 머리칼과 ‘백미러 사나이’의 이시봉의 꿰맨 뒤통수는 주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제멋대로 행동한다. ‘머리칼 전언’의 여자는 그 머리칼로 인해 현직교사와 엉뚱한 애정행각을 벌이게 된다는 내용인데 사실 이 이야기를 통해 그가 전하고자 하는 속내는 무엇인지 짐작이 안 간다. ‘백미러 사나이’같은 경우는 꿰맨 뒤통수에 눈이 생겨 눈을 감을 때는 뒤로 볼 수 있는 이시봉이 겪는 에피소드를 통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운동권 학생들을 희화화시키는 효과를 노린다. 이시봉을 통해 보여주는 이 희극 같은 비극은 읽는 내내 웃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 웃음이 폭소인지, 실소인지, 냉소인지는 책을 읽으면 알게 될 테니 더 이상 긴말은 않겠다.(패러디 한 번 해봤다.) 두 작품 공히 나의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내 몸의 감각들을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작품의 중요 모티프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통제할 수 없는 내 몸의 감각들을 창작기법으로 활용함으로써 이기호는 엉뚱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와 관련하여, 얼마 전에 읽었던 한강의 ‘왼손’이 생각난다. ‘왼손’은 자신의 왼손을 통제할 수 없게 된 한 30대 가장이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파탄으로 치닫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같은 모티프를 활용해 이기호는 웃음을 빚어내고 한강은 섬뜩함을 보여준다. 재미있다.
표제작 ‘최순덕 성령충만기’도 이기호 소설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지나치게) 독실한 기독교 신자를 성경의 형식을 빌려 희화화시킨다는 재치있는 발상(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어떨는지 궁금하다.), 아이러니한 상황들, 엉뚱하달 수밖에 없는 결말. 이러한 요소들이 작가의 입담에 의해 잘 버무려지면서 재미있는 소설 한 편으로 태어난다. 입 밖으로 소리내서 읽으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작품이었다.
‘버니’는 랩이라는 형식을 차용한 것이 신선하기는 하지만 내용은 별로 파격적이지도 의미심장하지도 않아 아쉽다. 피의자 신문 과정을 빌린 ‘햄릿 포에버’는 발상이 재미있다. 현실보다 더 생생한 환각 속에서만 찾아오는 햄릿을 통해서 진행되는 이야기. ‘현실보다 더 생생한 환각’이라는 이 형용모순의 표현은 각박한 현실을 에둘러 표현하려는 것일는지도 모르겠다. ‘옆에서 본 저 고백은’은 자기소개서에 대한 풍자로 읽혔고 ‘간첩이 다녀가셨다’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만 공포 앞에서는 누구든 ‘간첩’-일종의 희생양-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인간의 비겁함을 확인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역량 있는 신인의 등장은 독자에게 반가운 소식이다. 이렇게 자신만의 스타일을 잘 드러내면서 첫 인사를 한다면 오히려 독자가 고맙기도 하고 말이다. 처녀작은 기존 문단의 이목을 끌 수 있는 개성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자신의 개성을 문학적으로 잘 형상화해낸 작품이 좋은 작품이기도 하다는 건 당연한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는 은희경의 “새의 선물”이나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어렵지 않게 떠오른다. 작가의 말을 보니 이기호의 소설적 애정은 근대보다는 전근대에 맞닿아 있다고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렴풋이 감이 올 것 같기도 한데, 또렷이 눈앞에 보이지는 않는다. 어쩔 수 없다.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를 읽는 수밖에. 반가운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