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주 목요일까지는 왼팔에 깁스를 감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외팔이로 살아온 17일 그리고 살아갈 4일이 맞는 표현이겠지만 이젠 웬만큼 팔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자판도 두드리고 있지 않은가. 물론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다면 배꼽을 잡겠지만 말이다. 하긴, 사람들이 자신의 근원인 배꼽을 너무 태만히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배꼽 잡으면서 한 번 눈길을 주는 것도 자기를 사랑하는 한 가지 방법은 되겠다.

 유도에 입문하면 처음 3개월은 낙법만 줄기차게 배운다고 한다. "하나, 둘, 퍽. 하나, 둘, 퍽" 물론 실전에서의부상을 피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유도 도복도 처음 입은 내가 딸랑 러닝 20분에 스트레칭 5분하고 유도한다고 덤볐으니 왼팔 인대 좀 늘어난 건 그래도 착하게 살았다고 하늘이 도운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사고 당시의 그 끔찍한 고통과 왼쪽 팔꿈치 윗부분에 형성되었던 엄청난 크기의 붓기는 당분간 지워내기 힘들 것 같다. 사실 오늘도 자판을 좀 많이 두드렸더니 질끈질끈 쑤셔댄다.

 몸이 아프니 덩달아 마음도 괴로웠다. 아픈팔 덕에 근무는 좀 편하게 설 수 있을 것 같아 내심 쾌재를 불렀건만 그게 아니었다. 얼마 안 되는 근무시간이었지만 익숙했던 모든 것들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님을 깨닫는 시간들을 겪고 내게 남은 건 비참함이었다. 그 무서운 실감 속에서 나는 그 무엇도 손 대기 힘들었고 내내 신세 비관만 하다, 사람들이 이러다 우울증에 걸리는 구나, 뭐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조금씩 고통이 가시고, 한 손이 두 손의 일을 대체하는 것에 익숙해지면서 조금씩 마음의 평온도 되찾을 수 있었다. 오른손의 몫을 대신해준 녀석들은 주로 입, 무릅 등이었다. 이 시기에 깊은 위로의 말씀을 전해준 파란여우님과 더불어 내 팔이 낫는데 가장 큰 공헌을 세워주었다. 커피 봉지는 입으로 뜯고, 종이 뭉치는 무릅으로 고정시키고, 다른 일들은 조금 서툴고 느리고 답답해 보일지라도 한 팔로 차근차근 해 나가면서 한 팔로 생활한다는 게 생각한만큼 힘겨운 것은 아니다란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내가 왼 팔에 깁스를 한 상태는 일종의 장애인데 이 장애라는 사실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하는 딴애는 기특한 생각도 해보았다. 1급, 2급... 이라는 국가적 분류체계에 포함되면 장애고 그렇지 아니면 비장애인가. 비장애인의 눈으로 규정짓는 장애라는 건 얼마나 편의적인 걸까 이런 생각을 했다. 장애라는 어려운 주제에 대한 어줍잖은 생각의 편린일 뿐이기에 허점이 많겠지만 앞으로 공부하면서 내 생각을 정리해야겠다는 수확 정도는 얻었다.

 보름 남짓한 시기동안 7권의 책을 읽었으니 평소의 3배정도 본 셈이다. 이것만으로도 이번 팔 부상은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첫 번째 페이퍼도 팔 부상이 아니었으면 태어나지 않았겠구나. 여전히 괴롭고 당분간은 힘들겠지만 깨달은 바도 없지 않으니 압박 붕대와 부목 속에 숨어있는 팔도 그리 섭섭하게만은 여기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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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3-03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깁스 하고 고생 많으시군요. 그래도 책 볼 시간을 많이 얻으셨으니 좋았기도 하구요. 새옹지마네요. 그래도 푸시고 나면 잘 적응하시고 조심도 하시기 바래요^^

파란여우 2007-03-03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중권의 미학을 시작으로 얼음장수님의 순도 높은 리뷰를 기대하며
회복을 기념하는 축하 인사를 더불어 드립니다.
팔이 다 나서면 봄 꽃도 활짝 필 것입니다.^^

로드무비 2007-03-04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팔이론--외팔이로
오타 신고하고 갑니다. 제목이니 눈에 띄어서요.
외팔이로 지내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전 깁스한 사람 멋져 보이던데......^^

얼음장수 2007-03-04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다시 한 번 고마움을 표한답니다. 육체와 정신에 관한 님의 말씀은 내심 반박해보려 했지만, 몸과 마음은 거짓말을 못 하더라구요. 함께 봄꽃을 기다려 보지요.

로드무비님/얼마 안 살았지만 팔 깁스만 세번쨉니다. 제 깁스한 모습에 뭇 여인네들이 다 반한다 하더라도 이제는 그만 하고 싶어요. 생각해보니 조금 머뭇거려지기는
합니다만, 쩝.^^

비로그인 2007-03-06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앗, 유도...
좋은 운동입니다. 그쵸?
그나저나 부상이 빨리 완쾌되시면 좋겠네요.
서재 재오픈한 기념으로 마실다니는 중입니다. 반가워요 얼음장수님 :)

얼음장수 2007-03-06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셔고양이님/ 참말로 죄송스럽게도 유도랑은 영영이별 영이별입니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예약된 멘트) 저도 종종 들르게요. 담배피는 모습 멋지군요.

2007-03-17 2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음장수 2007-03-17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별 말씀을요.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저도 읽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른 읽고픈 소설이 요즘 많아서요. 자주 들러 따뜻한 글들 구경 많이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