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오지 않았다. 기다렸는데 오지 않아서 화가 났다. 약속을 저버린 애인 같았다. 며칠째 일기예보는 비가 내릴 것처럼 비구름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 강력한 더위의 힘은 커졌고 나는 점점 말을 잃었다. 할 말이 없기도 했지만 말이 되어 나오는 마음에 화가 있었기 때문에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게 더 나았다.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인데 한강 소설의 말을 잃은 여자가 어떤 기분일까, 잠시 상상하게 되었다. 할 수 없는 말, 하고 싶은데 하지 않는 말. 말과 말 사이의 거리는 잴 수 없을 만큼 멀다. 꼭 해야 할 말만 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이 돌아다니며 일을 벌이고 있다. 말 없는 도시는 고요할까. 말 없는 도시의 풍경은 어떨까. 비가 쏟아지면 좋겠다. 그럼 말도 쏟아질 것 같다. 비가 쏟아지면 더러운 말도 비에 씻겨 흘러갈지도 모른다. 비가 쏟아지만 조금 평온해질 것도 같다.
눅눅한 날에 우유에 곡물가루를 타서 마셨다. 꿀을 넣었다. 달콤했지만 우유가 적어서 텁텁했다. 맛없는 감자를 먹었고 상추를 먹었다. 그런데도 졸거나 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차가운 물에 얼음을 가득 부어 마셨고 냉커피를 마셨다. 땀을 흘렸고 샤워를 했고 오랜만에 드라마를 시청했다. 서로의 상처를 감싸주는 연인이, 참 예뻤다. 서로에게 기대어 둘이 아닌 하나를 꿈꾸는 연인과 혼자의 사랑을 끝내고 술을 마시는 모습에서 슬픔보다는 다짐이 보였다. 건강한 다짐이라고 할까.
어제 오전에는 선생님의 명예퇴직 소식을 들었다. 마음이 복잡하다는 선생님께 나는 그동안 수고하셨다고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언제나 선생님으로 존재하실 선생님, 그런 대상이 있다는 건 참 기쁜 일이다. 베트남 하노이에 계신 선생님과 더위를 나누고 중복에 치킨이라도 먹어야겠다고 말했다. 선생님이 베트남에 가신 후 두 시간 느린 그곳을 생각한다. 아침에는 그곳의 날씨를 검색했다. 알지 못하며 가본 적 없는 곳의 풍경을 상상하는 일, 낯설지만 즐겁다. 다음 주에는 말라위를 상상할 것이다. 날씨와 음식을 검색하겠지.
내게 중요한 것을 상대에게 강요할 수 없다. 그것은 내게만 속한 일이니까. 상대의 도움이 필요하더라도 그에게 재촉할 수 없다. 상대에게는 귀찮은 일에 속하니까. 부탁을 했으니 기다려야 하고, 기다림이 길어져도 할 수 없고, 기다림의 끝에 아무런 결과가 없더라고 상대를 탓할 수 없다.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걸 경험하는 중이다.
인터파크에서 개인 정보가 유출되었다. 비밀번호를 바꿨지만 기분이 나쁘다. 모르는 사이 다른 곳에서도 같은 일이 행해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알고 나니 산뜻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남았던 적립금으로 우선 책을 구매하고 탈퇴를 할까, 고민 중이다. 비처럼 상쾌한 선물이 될 책들. 반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최은미의 『쇼코의 미소』 , 청량한 기운을 안겨줄 것 같은 『너무 시끄러운 고독』, 이광호의 『사랑의 미래』와 왠지 닮았을 것만 같은 김행숙 시인의 산문 『사랑하기 좋은 책』, 최윤필 기자의 『가만한 당신』,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누운 배』.
오늘은 비가 올까, 비가 오면 정말 반가울 텐데. 비야, 좀 내려주면 안 되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