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수의 연필 ㅣ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6
마누엘 리바스 지음, 정창 옮김 / 들녘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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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이라 불리는 모든 것들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단순하게 뜻을 같이 하고 동참하는 경우라도 그 순간, 삶을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사랑도 그렇다. 선택한 사랑을 지키기 위해 죽음도 겁내지 않는 이가 있다. 기도하는 여인의 모습이 새겨진 붉은 색연필의 표지 『목수의 연필』에서도 그런 사랑을 만난다. 한 치의 균열도 찾을 수 없는 견고한 철옹성같은 사랑이라고 하면 맞을까.

 

 소설은 에스파냐 내전을 배경으로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삶에 대한 것이다. 의사인 다 바르카와 그의 연인 마리사, 그녀를 흠모하는 간수 에르발이 들려주는 그들의 사랑 이야기다. 책은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노인 다 바르카를 취재하기 위해 신문기자가 그를 방문하면서 시작한다. 혁명가이자 의사였던 그의 생은 항시 죽음과 맞닿아 있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에르발이 감시하게 된 이유는 마리사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마리사를 처음 본 순간부터 에르발은 사랑에 빠졌고 그녀가 다 바르카의 연인이라는 건 그에게 거대한 상심과 분노를 가져왔다. 그럼에도 다 바르카가 감옥에 있을 때 마리사의 면회나 물건을 전달해주는 일을 거부할 수 없었다.

 

 혁명가를 사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다 바르카와 신념이 달랐던 마리사의 집안에서는 그를 반대했고 그녀는 자살을 시도하면서 사랑을 굽히지 않았다. 함께 한 시간보다는 지켜보는 시간이 더 많았을 사랑이다. 소설은 그들의 아름다운 사랑을 에브발의 목소리로 담담하게 담아낸다. 다 바르카가 감옥에서 만남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 에스파냐의 역사와 정치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내게는 조금 지루했고 어려웠다. 감히 내가 감옥이라는 공간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동질감을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산책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진 생의 마지막 순간을 집행해야하는 에르발에게 환청이 들리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살아남은 자가 된 에르발이 자신이 죽인 화가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다 바르카와 마리사가 결혼에 이르기까지 에르발의 도움이 있었다. 다 바르카가 위기에 처했을 때도 그랬다. 사랑하는 여자의 남자를 감시하면서 그녀의 행복을 빌어줘야 하는 그 마음은 어땠을까? 세월이 흐른 뒤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을 기억하고 누군가에게 그들의 사랑을 전하는 일이다.

 

 ‘난 그전에도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걸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아무도 그 둘을 떼어놓지 못했어. 내가 마리사 마요와 다니엘 다 바르카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안 건 그때였지. 사실 그때까지 두 사람이 부부가 될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어. 소설에선 그럴 수 있어도 그 시대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거든. 그건 마치 향로에다 화약을 뿌려대는 짓이나 다름없었으니까.’  164쪽

 

 신념대로 살아 온 남자와 그를 지지하며 사랑한 여자가 함께 늙어가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그 여자에 대한 욕망을 멈추지 못해 그들의 주변을 벗어나지 못한 한 남자의 삶은 얼마나 쓸쓸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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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12-28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보았습니다.

혁명과 로맨스, 거의 불가분의
관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가만 보니 제 리뷰는 전자에
더 비중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10월을, 붙잡지 않는다

 

 아직 겨울은 오지 않았지만 그 겨울이 끝나기 전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다. 만나고 싶은 마음이 만날 거라는 믿음으로 바뀐 어떤 계기나 특별한 이유는 없다. 막연하게 그렇다. 계획을 세우려고 마음 속에 담가두었던 말들을 꺼내기 시작하자 마자 날씨는 마스크를 벗내고 감춰둔 본색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갑자기 추워졌다는 말이다. 교통편을 알아보다가 멈춤이 되고 말았다. 만나야 할 사람은 반드시 만난다 말을 생각한다. 계획은 여전히 계획중이고, 실행에 옮기는 것은 여전히 멈춤에 있다.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은, 왜 이리 먼가요. 나의 두려움과 나의 게으름 때문이겠지요.

 

 가을과 겨울을 통과하는 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텃새가 아닌 철새가 되어 가을과 겨울을 말랑말랑한 기운이 감도는 낯선 곳에서 보내고 싶다. 검은 빛깔의 새가 되어도 좋겠다. 검은 바위 위에서 졸고 있거나, 추수를 끝낸 논의 물 웅덩이의 물을 마시거나, 좋아하는 이가 사는 집의 창틀에 살그머니 내려 앚아 그가 잠든 모습을 가만히 지켜봐도 좋겠다. 느리게 느리게 움직이고 나직하게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 10월의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도 모른다. 마지막 날은 8월에도, 9월에도, 내가 좋아하는 4월에도 있는데 가을의 마침표를 찍는 날이 오늘이라고 믿어서 그런 걸까.

 

 갑자기 빛이 사라졌다. 불을 켜지 않은 탓도 있지만 하늘의 빛깔이 달라졌다는 말이다. 창으로 들어오던 빛이 점차 사그라 든다. 설악산에는 첫 눈이 내렸으니 내린다는 비는 어디선가 눈으로 변할지도 모르겠다. 벌써 첫, 눈에 대해 말하는 시간이라니.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을  몇 권이 책으로 달랜다.

 

 처음 문학동네 시선집이 나올 때는 몰랐다. 무지개보다 더 고운 색깔의 표지를 마주하게 될 줄 몰랐던 거다. 그리고 이렇게 내가 시집들을 기다리며 기대할 지도 말이다. 드디어, 보라를 만나는 시간이다. 박연준의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는 제목부터 목이 메인다.  다른 글로 만난 시인 강성은의 첫 시집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도 조만간 곁에 두려고 한다. 박경리 문학상을 수상한 『쿠코츠기의 경우』와 작가 정신의 소설樂 시리즈인 이신조의 『우선권은 밤에게』도 읽고 싶은 책이다.

 

 천둥 소리가 들렸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다. 이 비는 추위를 데리고 올 것이다. 비는 가을과의 이별을 준비하라는 말을 들려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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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0-31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연준의 시집 제목, 아,, 저건 뭔가요. 호기심이 이네요.
담아가요, 자목련님.^^
그나저나 이곳 남쪽도 오늘은 꽤 싸늘했어요. 좀 두께감 있는 옷으로 갈아입어야 할까봐요.
계절이 가고 있는 것도 미처 몰랐네요. 내일이면 11월인데.

자목련 2012-11-01 06:48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박연준의 시집 정말 궁금해요.
어제보다 아주 아주 많이 추워요. 조만간 여기 저기, 첫 눈도 내리겠지 싶어요.
11월, 따뜻하게 포근하게 시작하세요^^

블루데이지 2012-11-03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연준시인의.시집제목이 정말 하루 종일 입에 맴돌아요~~왜그럴까요!!
11월이예요...11월에도 좋은글 많이 읽게.해주세요~~
재미있는 주말 보내세요!

자목련 2012-11-05 11:17   좋아요 0 | URL
예전엔 안 그랬는데, 이젠 아버지라는 말만으로도 먹먹해져요..
프로필, 제가 좋아하는 사진이군요!!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ㅣ 문학동네 시인선 26
김이강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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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에게 시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비단 그 시를 쓴 시인이나 독자뿐 아니라, 우연하게 마주 한 어느 누군가에게도 그런 의미로 존재하는 시가 있을 것이다. 말로 할 수 없는 감정들을 대신 토해주고, 한 번쯤은 이런 시를 쓰고 싶다는 소망을 키우게 하는 시도 있을 것이다. 시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모든 것이 시가 될 수 있다고 말해주는 듯한 시집을 만나는 일은 그래서 반갑다. 때문에 당돌하지만 거절하지 못할 질문을 던지는 김이강의 시집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는 친근하다. 목차에서 눈에 박힌 첫 번째 시는 당연 이런 시.

 

 <시월>

 

 흑인 남자가 연주하는 바흐의 곡이 머릿속에서 넓은 하늘

로 울리는 저녁 서쪽 하늘엔 어김없이 노을이 지고 옥타비

오 파스의 시 몇 편 소리 내어 읽는 저녁 시린 발을 잡고 진

한 커피를 마시는 저녁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비행운 같은

안부를 바람에 던져보는 저녁 어디서 났는지 모를 피가 사

람들 수군거리게 했지 아픈 건 아닌가봐 낫낫한 입가가 피

로한 저녁 서쪽으로 난 전면 창이 있다는 카페 그 카페에도

물들었을 노을 그 노을에도 담겨 있을 선율 콘트라풍투스

다른 공기들로 연주되는 시월의, - 40쪽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오늘 밤>

 

  1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오늘 밤

 당신은 말한다 조용한 눈을 늘어뜨리며

 

 당신은 가느다랗고 당신은 비틀려 있다

 

 그럴 수 없다고, 나는 말한다 나도 어쩔 수 가 없다고

 

 가만히, 당신은 서 있다 딱딱한 주머니 속으로

 찬 손을 깊숙이 묻어 둔 채 한동안 오래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을 것이다

 행인들에게 자꾸만 치일 것이고

 아마도 누구일지 모르는 한 사람이 되돌아오고

 따뜻한 커피를 건넸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겨울이 갔던가

 

  2

 오늘은 고통과 죽음에 대한 장을 읽고 있다

 이 책을 기억하는지

 연필로 한 낙서를 지우지 못하고 도서관에 반납한 내게

 겨울에, 당신은 묻는다 아무래도

 이 책의 삼십칠 페이지에 있는 글씨가 내 글씨 같다고

 안녕? 페이지 숫자가 마음에 든다

 

  3

 편도를 타고 가서 돌아오지 말자.

 옆 테이블에서 젊은이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 말들 끝에 찻잔을 비우고 헤어진다

 희미한 그림자들로 어떻게

 대낮의 거리 한복판을 버티어낼까 망설이며

 길 끝으로 사라져가고 있을 것이다

 

  4

 어느 거리에선가,

 당신은 누구일지 모를 한 사람을 만날 것이다

 가느다랗고, 비틀거리는 누군가를

 그리곤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오늘 밤 - 16~17쪽

 

 아무나 붙잡고 말을 걸고 싶은 정도로 지독하게 외로웠던 날들의 기록은 아닐까, 짐작한다. 고독이라기 보다는 외로움이 맞겠다. 차마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낯설지만 낯선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시인은 당신인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날들을 살지만 언제나 혼자라는 결벽적인 생각이 떠나지 않는 당신 말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언제나 누군가를 기다리고, 누군가를 생각한다.

 

 <마르고 파란>

 

 아무튼 간에 너의 목소리가 나직나직하게 귀에 걸려 있다

 우동 먹다 말았어

 

 자동차도 고치고 담배도 피우고 그러던

 마르고 파란 셔츠를 입은 사람이라니,

 이런 묘사는 너무 외로워

 

  *

 

 처음엔 모든 게 크고 멋진 일이지만

 나중엔 그런 것들도 그저 무심하게 흘러가는 거라고

 쓸쓸히 말하던 사람이 있었지

 그러니, 부디 잘 살아달라고 당부하던

 마르고 파란 셔츠를 입은 사람을 묘사하는 너에게

 그 말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어

 헤어진 애인처럼 전활 받지 않는 너에게

 

  *

 

 우리 사이에 남겨진 말들이 지나치게 문학적이라고 생각해

 쓰지 않는 그것들을 살아가는 것으로 대신할 줄 아는 너를,

 

  *

 

 너를

 당장에 찾아가려 했어

 그렇지만 잠깐 멈춰서

 조금 마음을 가다듬고

 달려가고 있다, 너에게

 

 자동차도 고치고

 담배도 피우고 그러던

 마르고 파란 셔츠를 입은 사람을 알고 있는

 어떤 당신들에게 - 24~25쪽

 

 <안녕, 돌멩이>

 

 안녕? 돌멩이

 안녕 안녕?

 돌멩이

 

 우린 서로 말이 없구나

 

 안녕 돌멩이

 안녕 안녕?

 안녕? 돌멩이

 

 우린 모두 공개되지 않았어

 

 그러니 안심하렴

 

 우린 계속 말이 없어도 된단다

 

 안녕 돌멩이

 안녕 안녕?

 안녕? 돌멩이

 

 우린 모두 가마니를 뒤집어쓰고

 가만히 앉아 있구나

 

 안녕? 돌멩이

 내 이름은 애벌레야 - 56~57쪽

 

 마르고 파란 셔츠라니, 돌멩이라니. 이 얼마나 절절한 마음인가. 마르고 파란 셔츠를 입은 이를 당장이라도 찾아서, 돌멩이에게 말을 거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애벌레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거대한 파도처럼 나를 덮친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기록하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일기로 마음을 달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이런 시는 더 아프다. 

 

 <겨울은 길었고 우리는 걸었지>

 

 더이상 수선을 할 수 없을 만큼 낡아버린 코트가 내게 한

벌 있지

 짙은 녹색이지만 그렇지만도 않은

 

 산책을 나가야지

 오늘은 긴 잠을 잤어

 오래 뒤척이지 않고 멈추지 않는 꿈을 꾸면서

 등이 아프고 피곤해

 영화를 보고 싶어

 상암으로 가서 <몽상가들>을 보던 날을 떠올려

 S양의 울음을 보았던가

 바람이 많이 불어왔지

 그 날도 코트를 입었어

 낡아버린 코트

 

 모든 게 끝이 났지

 응 모든 게 끝이 있지

 스무 살처럼 푸른 나이도 푸른 관념도 푸른 희망도

 응 모두가 희미해지지

 붉은 고통도 선명한 사랑도

 학교 안 커피집에는 에스프레소 새 컵이 나왔어

 

 조그만 에스프레소 컵을 나는 좋아하지

 흑빛도 쓴맛도 저 눈 감은 사람도

 캠퍼스의 밤은 아름답지

 나는 여름을 기다려

 환상의 섬에 갈 거야

 해변이 아담하고 인적이 드물다는

 마을에서는 대마를 기르고 해 지는 바다에 떠 있다는

 

 버스에서는 잠이 들어

 나는 그것이 행복하다고 생각해

 기대어 잠드는 것만큼 행복한 것은 없다고도 생각해

 쓸데없이 우는 것이 미안하다고도 생각해

 동물원에는 가지 못했어

 게르하르트 리히터 전도 못 봤어

 오늘은 긴 잠을 잤거든 - 76~77쪽

 

 <모두가 걸어가네>

 

 햇살이 접히던 오후였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네

 산책은 바람을 따라잡지 못하고

 얼굴은 얼굴을 닮을 수 없었네

 

 머리카락의 길이로는 사람을 알아볼 수 없네

 비가 오려고 하는 하늘을 보라고 속삭이네

 내일은 비가 온다고

 어제도 비가 온다고

 

 그러나 오늘은

 오늘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네

 거리를 걷고 있었네

 밤은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 법

 

 사람들은 사과 향 주스를 마시고 있었네

 사과 향 풍선을 불었다고 해야 할까

 렌즈를 보고 말하는 영화도 있는데

 누구도 그 누구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네

 트리뷴, 트리뷴, 트리뷴!

 어깨의 모서리마다 안개가 앉아 있었네

 (이 자리에 써두었던 문장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신문에 사정없이 매달려 있었네

 사과 향 풍선을 불어보았네

 사람들이 비옷을 나누어주네

 

 어깨가 아파오네

 거리에는 떨어진 안개들이

 모든 제자리의 것들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네 - 60~61쪽

 

 과거가 되어버린 날들, 그 안에서만 존재하는 시간들, 잠 속에서만 말을 건넬 수 있는 당신이라서 더 아련하다. 아프다고 소리치지 못하고, 그저 견디고 바라보는 쓸쓸한 모습이 누군가를 닮았기 때문은 아니다. 그저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 시간을 조금은 알 것 같아서다. 간직했던 모습들, 잊지 않으려 기록으로 남겨두었던 나와 당신의 문장은 어디에서 숨을 쉬고 있을까. 해서 막연하게 불러보는 폴린느는 바로 당신의 이름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쏟아낼 수 있는 오직 한 사람, 당신 말이다.

 

 <폴린느>

 

  폴린느 나는 사실 형편이 없어요 걸핏 하면 취하기를 좋

 아하고 쓸데없이 침울해지고 전기세도 밀린데다가 무능력

 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에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순전

 히 L이 그리웠기 때문이에요 도대체 어디에다 토로해야 좋

 을까요 미안해요 오늘은 취했고 이런 글을 쓰고 싶을 뿐이

 에요 왜냐하면 지금은 Y대학의 캠퍼스가 자꾸 생각나거든

 요 거짓말이에요 Y대학의 캠퍼스는 그냥 해본 말이에요 사

 실은 버스를 기다리던 추운 겨울밤 수원까지 달려오던 크림

 코트의 거리를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폴린느 그냥 듣고 지우면 그만인 얘기일 뿐이에요 그러니

그냥 듣고 지우면 그만일 것이에요 그냥 듣고 지우면 그만

인 것이니까 이야기할 뿐이에요 아무것도 없이 맥주를 마셔

요 머리카락도 없이 한쪽 다리도 없이 손톱도 모두 빠져 맥

주를 마실 뿐이에요 음악은 치료제가 아니지만 음악을 들어

야 하니까 음악을 듣고 치유되지 않아요 아무튼 나는 울던

것을 마저 울어야 해요 그러니까 이 글은 아무런 것도 아

니지만 실례가 되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요 아무것도 아

닌 시간에 맥주를 마시고 있으니깐요  - 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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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2-11-01 0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시집 평 써주시는 것 정말 좋아합니다.
알라딘에는 시집 건드려 주는 분들이 의외로 많이 없는 것 같아서요.
자목련님 감사부터 전하고 내용은 천천히,섬세하게 읽을 게요. 고맙습니다.

자목련 2012-11-01 07:00   좋아요 0 | URL
리뷰,라고 말하기 부끄러운 감상인데 이렇게 귀한 댓글을 주시다니요.
팜므느와르님 고맙습니다. 몹시 춥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11월, 건강하고 따뜻하게 여세요!!

블루데이지 2012-11-03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꽤 좋은데요!!!! 지금.제가.있는곳에 앉아서.읽으니 안성맞춤이었어요~

자목련 2012-11-05 11:18   좋아요 0 | URL
블루데이지님이 있던 곳이 궁금해요!!
 
워커바웃
김하경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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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모두 오늘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이 말은 어떤 이는 과거에 매달린 채 살고, 어떤 이는 오로지 내일만 보고 산다는 것이다. 모두 행복한 삶을 원하지만 그들의 방식은 다르다. 김하경의 소설집 『워커바웃』은 당신은 어디에 중점을 두고 사냐고 묻는 듯하다. 소설 속 인물은 우리와 다르지 않게 이 시대를 사는 시민들이다. 하루를 벌어 하루를 살고,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고 혼자만 끙끙앓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도 하고,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어 분노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은 소설이라기 보다 누군가의 일기처럼 다가온다.

 

 표제작 <워커바웃>은 과거의 상처로 인해 마음을 닫고 사는 한홍이와 그녀의 마음을 열게 만드어 준 발데르를 통해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프리랜서인 홍이는 친구 희선의 부탁으로 율포조선 해고자들의 농성집회를 취재하기 위해 율포로 향한다. 25년 전 아버지를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굴뚝에서 농성 중인 노동자와 그들을 지지하고 걱정하는 그들의 가족과 동료를 통해 그녀는 과거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아버지 때문에 가족 모두가 힘들었기에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율포에서 노동자들과 어울리고 그들의 삶을 마주하고 나서야 그들이 아버지와 다르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다. 그들을 응원하며 자신의 취재를 도와주는 발데르에게서 어떤 희망을 보게 된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내 안에 들어와 있는 말하는 것 같았다. 순간 깨달았다. 내가 이들과 똑같이 느끼고 똑같이 말하게 되었다는 것을. 같은 마음으로, 같은 언어로 말하게 되었다는 것. 비로소 굴뚝 위 사람들과 굴뚝 아래 사람들이 내 안에 들어와 하나가 되었다.’ 198쪽

 

 이 소설을 읽으면서 김진숙과 크레인을 떠올린다. 함께 염려하고 함께 기도했던 순간들을 말이다.  아버지의 삶에 속하고 싶지 않았던 홍이가 굴뚝 집회 현장을 지켜보면서 발데르에게서 느꼈던 그것은 같이 가는 것이다. 조금 천천히 가더라도 다 함께 가는 길이 더 아름답고 더 행복한 일라는 걸 우리는 잊고 있었던 건 아닐까.

 

 <초란>은 과거 노동 운동의 지도자였던 강준을 통해 여전히 노동 운동의 현실은 아프지만 그래도 희망을 놓지 말라고 말한다. 시골로 들어와 닭을 키우는 강준은 아내에게도 말하지 못한 상처가 있다. 과거 대산중공업에 다닐 때의 일이다. 함께 노동 운동을 하던 친구 영호가 감옥에서 죽은 것이다. 그 뒤로 강준은 그 일과 관련된 이들과는 연락을 끊고 지냈다. 그러다 늦었지만 영호의 추모비를 세우는 행사로 후배의 연락을 받은 것이다. 강준을 통해 1980년대를 마주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안타까운 건 최소한의 안전도 보장받지 못한 채 일선에서 생활하는 이들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도 희망을 놓지 말자는 강준의 말은 이 시대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든든한 힘이 된다.

 

 ‘1980년대처럼 싸우라는 말이 아이다. 그렇게 싸울 수도 없꼬. 지금은 분명 그때와 다르다.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아무리 세상이 절망적이라 캐도, 노동조합은 여전히 우리의 희망이데이. 그 유일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촛불 시민이 아무리 거리로 몰려나와도, 인터넷 누리꾼이 아무리 떠들어싸도, 조직적으로 되지 않으모 반짝하고 끝나고 마는 기라. 눈을 뭉칠라카모 먼저 작은 덩어리를 만들어야 한다 아이가? 그 작은 덩어리를 굴리모 많은 눈들이 거 들러붙어 큰 덩어리가 되는 기라. 그 작은 덩어리 하나하나가 노동조합 아이가?’  69~70쪽

 

 촛불 시위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동참을 유도하는 <지르 자자! 찌찌!>, 교통사고로 뇌사자가 된 친구의 죽음을 통해 안타까운 의료 현실을 고발하는 <누가 죽었어요?>, 개혁을 꿈꿨지만 당에 이용만 당하고 빚만 지고 만 씁쓸한 정치 현장을 보여주는 <비밀과 거짓말>, 사회적 약자지만 보호받지 못한 채 결국 불행으로 생을 마감하는 둘례와 윤철의 이야기 <둘례전>은 모두 우리 사회의 문제를 보여준다. 

 

 김하경은 힘겨운 현실에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은 인물을 내세웠지만 포기를 말하는 대신 앞으로 나가가라고 말한다. 강준의 말처럼 인생에는 연습도 실험도 없으니까.  희망을 버리지 말고 살아야 하는 게 우리의 운명이라고 말이다.

 

 ‘어차피 인생에는 연습이 없다. 실험도 허락하지 않는다. 오로지 실전이 있을 뿐이다. 분명 실패할 수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도 멈출 수도 없다. 그래서 간다. 빌어먹을……. 그게 내 운명이다.’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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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비라 말해도 좋을 가을비가 내린다. 10월은 이제 사 나흘 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니까 올해는 두 달하고도 몇 일이 더 남은 것이다. 년초에 어떤 계획을 세웠다. 계획이라는 말은 거창하다. 그냥 이런 저런 일들을 나열했다. 읽기와 쓰기에 관한 것도 있었다. 모 서점에서 알려준 바에 의하면 100권의 책읽기를 달성했다고 한다. 100이라는 숫자는 더이상 큰 의미가 없다. 마구 읽기의 결과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100이라는 숫자는 대견하다. 그러니 300이란 숫자는 격하게 칭찬받아야 마땅하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0권이 선택한 소설은 이상이다. 표지가 이상의 고독을 말해주는 것만 같다. 고독이라니, 감히 내가 그 말을 쓸 수 없지만 말이다.

 

 김숨의 단편집 『투견』을 읽고 있다. 단편이 주는 어떤 포근함과 강렬함이 좋다. 최근에는 장편이 대세라고 하지만 그래도 나는 단편이 좋다. 바로 생각나는 단편집은 이렇다. 은희경의 『타인에게 말 걸기』, 조경란의 『나의 자줏빛 소파』, 정미경의 『나의 피투성이 연인』는 아주 좋아하는 단편집이다. 그리고 김이설의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김도언의 『랑의 사태』,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도 잊지 않는다. 모 소설가의 블로그에서 김도언 작가의 두 번째 산문집 출간에 관한 글을 읽었다. 11월에 마주할 그의 책은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양말을 신지 않았더니 발이 불쌍해 보인다. 스카프로 목을 둘둘 감고 있으면서 발은 외면하다니. 매번 사랑한다고 말하는 나의 오른발에게 미안하다. 점심을 먹어야겠다. 빵과 커피와 치즈가 들어 있는 아주 작은 소시지 3개로 아침을 먹었으니 점심은 밥을 아주 많이 먹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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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은,
    from 識案 2012-10-31 17:05 
    아직 겨울은 오지 않았지만 그 겨울이 끝나기 전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다. 만나고 싶은 마음이 만날 거라는 믿음으로 바뀐 이유는 없다. 막연하게 그렇다. 계획을 세우려고 마음 속에 담가두었던 말들을 꺼내기 시작하자 마자 날씨는 마스크를 벗내고 감춰둔 본색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갑자기 추워졌다는 말이다. 교통편을 알아보다가 멈춤이 되고 말았다. 만나야 할 사람은 반드시 만난다 말을 생각한다. 계획은 여전히 계획중이고, 실행
 
 
프레이야 2012-10-27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점심으로 밥 많이 드셨어요?? ㅎㅎ
그곳에도 비가 오고 있군요. 여기도요. 천둥소리가 납니다.
오늘 불꽃축제 하는 날인데 이렇게 비가 많이 와도 하는지 모르겠어요.
어차피 구경 가지도 않지만요. 가까이 살면서도 저는 별로라서요.
이상소설전집 소식이 메일로 오길래 저도 찜해뒀어요.^^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자목련 2012-10-29 08:56   좋아요 0 | URL
밥은 계속해서 많이 먹고 있어요. ㅎㅎ
무섭게 내리던 비는 사라지고, 다시 고요한 가을 날로 돌아왔어요.
새로운 한 주 활기차게 시작하세요!!

책읽는나무 2012-10-28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꽃축제 취소한다고 텔레비전 자막으로 두웅~ 지나가는 것을 보고
아! 벌써 불꽃축제 하는 달이구나! 생각했어요.
시간 참 빠르군요.벌써 그렇게 올해도 두어 달 남았으니...ㅠ
전 단편집들이 읽긴 좋은데,읽고 나면 머리가 하얘져서 아무 것도 기억이 안난다는 것이 문제에요.
님이 언급하신 몇몇 제목들이 눈에 익은데,왜 내용들은 기억나지 않을까요?ㅋ
책에 푹 젖어서 읽으라고 하신 분이 있는데,분명 읽는 순간에 푹 젖어 읽었는데 돌아서면~~
치매수준이에요.
그나마 장편은 좀 기억나지만요.ㅠ

암튼..100권을 도달하셨다니 축하드립니다.
100권..참 쉽지 않은 권 수 인데...님은 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신 듯합니다.
님의 이미지는 책을 읽는 여자들의 그림을 대할때면 이러한 모습이 아닐까? 항상 떠올리게 되더군요.
집에서 항상 롱드레스 입고 볕드는 창가 곁에 독서하고 계시는 것은 아니죠??^^

자목련 2012-10-29 08:54   좋아요 0 | URL
아직은 가을인가 싶다가도 곧 첫 눈 소식을 마주하겠지요.
잊지 않으려면 재독해야 할 텐데, 그게 참 어려워요. ㅎ

지금 저는 7부 레링스에 가오리 체크 남방을 입고 있어요.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의자에 앉아 책을 마주하는 모습, 꼭 해보고 싶은,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