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ㅣ 문학동네 시인선 26
김이강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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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에게 시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비단 그 시를 쓴 시인이나 독자뿐 아니라, 우연하게 마주 한 어느 누군가에게도 그런 의미로 존재하는 시가 있을 것이다. 말로 할 수 없는 감정들을 대신 토해주고, 한 번쯤은 이런 시를 쓰고 싶다는 소망을 키우게 하는 시도 있을 것이다. 시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모든 것이 시가 될 수 있다고 말해주는 듯한 시집을 만나는 일은 그래서 반갑다. 때문에 당돌하지만 거절하지 못할 질문을 던지는 김이강의 시집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는 친근하다. 목차에서 눈에 박힌 첫 번째 시는 당연 이런 시.

 

 <시월>

 

 흑인 남자가 연주하는 바흐의 곡이 머릿속에서 넓은 하늘

로 울리는 저녁 서쪽 하늘엔 어김없이 노을이 지고 옥타비

오 파스의 시 몇 편 소리 내어 읽는 저녁 시린 발을 잡고 진

한 커피를 마시는 저녁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비행운 같은

안부를 바람에 던져보는 저녁 어디서 났는지 모를 피가 사

람들 수군거리게 했지 아픈 건 아닌가봐 낫낫한 입가가 피

로한 저녁 서쪽으로 난 전면 창이 있다는 카페 그 카페에도

물들었을 노을 그 노을에도 담겨 있을 선율 콘트라풍투스

다른 공기들로 연주되는 시월의, - 40쪽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오늘 밤>

 

  1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오늘 밤

 당신은 말한다 조용한 눈을 늘어뜨리며

 

 당신은 가느다랗고 당신은 비틀려 있다

 

 그럴 수 없다고, 나는 말한다 나도 어쩔 수 가 없다고

 

 가만히, 당신은 서 있다 딱딱한 주머니 속으로

 찬 손을 깊숙이 묻어 둔 채 한동안 오래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을 것이다

 행인들에게 자꾸만 치일 것이고

 아마도 누구일지 모르는 한 사람이 되돌아오고

 따뜻한 커피를 건넸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겨울이 갔던가

 

  2

 오늘은 고통과 죽음에 대한 장을 읽고 있다

 이 책을 기억하는지

 연필로 한 낙서를 지우지 못하고 도서관에 반납한 내게

 겨울에, 당신은 묻는다 아무래도

 이 책의 삼십칠 페이지에 있는 글씨가 내 글씨 같다고

 안녕? 페이지 숫자가 마음에 든다

 

  3

 편도를 타고 가서 돌아오지 말자.

 옆 테이블에서 젊은이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 말들 끝에 찻잔을 비우고 헤어진다

 희미한 그림자들로 어떻게

 대낮의 거리 한복판을 버티어낼까 망설이며

 길 끝으로 사라져가고 있을 것이다

 

  4

 어느 거리에선가,

 당신은 누구일지 모를 한 사람을 만날 것이다

 가느다랗고, 비틀거리는 누군가를

 그리곤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오늘 밤 - 16~17쪽

 

 아무나 붙잡고 말을 걸고 싶은 정도로 지독하게 외로웠던 날들의 기록은 아닐까, 짐작한다. 고독이라기 보다는 외로움이 맞겠다. 차마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낯설지만 낯선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시인은 당신인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날들을 살지만 언제나 혼자라는 결벽적인 생각이 떠나지 않는 당신 말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언제나 누군가를 기다리고, 누군가를 생각한다.

 

 <마르고 파란>

 

 아무튼 간에 너의 목소리가 나직나직하게 귀에 걸려 있다

 우동 먹다 말았어

 

 자동차도 고치고 담배도 피우고 그러던

 마르고 파란 셔츠를 입은 사람이라니,

 이런 묘사는 너무 외로워

 

  *

 

 처음엔 모든 게 크고 멋진 일이지만

 나중엔 그런 것들도 그저 무심하게 흘러가는 거라고

 쓸쓸히 말하던 사람이 있었지

 그러니, 부디 잘 살아달라고 당부하던

 마르고 파란 셔츠를 입은 사람을 묘사하는 너에게

 그 말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어

 헤어진 애인처럼 전활 받지 않는 너에게

 

  *

 

 우리 사이에 남겨진 말들이 지나치게 문학적이라고 생각해

 쓰지 않는 그것들을 살아가는 것으로 대신할 줄 아는 너를,

 

  *

 

 너를

 당장에 찾아가려 했어

 그렇지만 잠깐 멈춰서

 조금 마음을 가다듬고

 달려가고 있다, 너에게

 

 자동차도 고치고

 담배도 피우고 그러던

 마르고 파란 셔츠를 입은 사람을 알고 있는

 어떤 당신들에게 - 24~25쪽

 

 <안녕, 돌멩이>

 

 안녕? 돌멩이

 안녕 안녕?

 돌멩이

 

 우린 서로 말이 없구나

 

 안녕 돌멩이

 안녕 안녕?

 안녕? 돌멩이

 

 우린 모두 공개되지 않았어

 

 그러니 안심하렴

 

 우린 계속 말이 없어도 된단다

 

 안녕 돌멩이

 안녕 안녕?

 안녕? 돌멩이

 

 우린 모두 가마니를 뒤집어쓰고

 가만히 앉아 있구나

 

 안녕? 돌멩이

 내 이름은 애벌레야 - 56~57쪽

 

 마르고 파란 셔츠라니, 돌멩이라니. 이 얼마나 절절한 마음인가. 마르고 파란 셔츠를 입은 이를 당장이라도 찾아서, 돌멩이에게 말을 거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애벌레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거대한 파도처럼 나를 덮친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기록하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일기로 마음을 달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이런 시는 더 아프다. 

 

 <겨울은 길었고 우리는 걸었지>

 

 더이상 수선을 할 수 없을 만큼 낡아버린 코트가 내게 한

벌 있지

 짙은 녹색이지만 그렇지만도 않은

 

 산책을 나가야지

 오늘은 긴 잠을 잤어

 오래 뒤척이지 않고 멈추지 않는 꿈을 꾸면서

 등이 아프고 피곤해

 영화를 보고 싶어

 상암으로 가서 <몽상가들>을 보던 날을 떠올려

 S양의 울음을 보았던가

 바람이 많이 불어왔지

 그 날도 코트를 입었어

 낡아버린 코트

 

 모든 게 끝이 났지

 응 모든 게 끝이 있지

 스무 살처럼 푸른 나이도 푸른 관념도 푸른 희망도

 응 모두가 희미해지지

 붉은 고통도 선명한 사랑도

 학교 안 커피집에는 에스프레소 새 컵이 나왔어

 

 조그만 에스프레소 컵을 나는 좋아하지

 흑빛도 쓴맛도 저 눈 감은 사람도

 캠퍼스의 밤은 아름답지

 나는 여름을 기다려

 환상의 섬에 갈 거야

 해변이 아담하고 인적이 드물다는

 마을에서는 대마를 기르고 해 지는 바다에 떠 있다는

 

 버스에서는 잠이 들어

 나는 그것이 행복하다고 생각해

 기대어 잠드는 것만큼 행복한 것은 없다고도 생각해

 쓸데없이 우는 것이 미안하다고도 생각해

 동물원에는 가지 못했어

 게르하르트 리히터 전도 못 봤어

 오늘은 긴 잠을 잤거든 - 76~77쪽

 

 <모두가 걸어가네>

 

 햇살이 접히던 오후였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네

 산책은 바람을 따라잡지 못하고

 얼굴은 얼굴을 닮을 수 없었네

 

 머리카락의 길이로는 사람을 알아볼 수 없네

 비가 오려고 하는 하늘을 보라고 속삭이네

 내일은 비가 온다고

 어제도 비가 온다고

 

 그러나 오늘은

 오늘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네

 거리를 걷고 있었네

 밤은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 법

 

 사람들은 사과 향 주스를 마시고 있었네

 사과 향 풍선을 불었다고 해야 할까

 렌즈를 보고 말하는 영화도 있는데

 누구도 그 누구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네

 트리뷴, 트리뷴, 트리뷴!

 어깨의 모서리마다 안개가 앉아 있었네

 (이 자리에 써두었던 문장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신문에 사정없이 매달려 있었네

 사과 향 풍선을 불어보았네

 사람들이 비옷을 나누어주네

 

 어깨가 아파오네

 거리에는 떨어진 안개들이

 모든 제자리의 것들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네 - 60~61쪽

 

 과거가 되어버린 날들, 그 안에서만 존재하는 시간들, 잠 속에서만 말을 건넬 수 있는 당신이라서 더 아련하다. 아프다고 소리치지 못하고, 그저 견디고 바라보는 쓸쓸한 모습이 누군가를 닮았기 때문은 아니다. 그저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 시간을 조금은 알 것 같아서다. 간직했던 모습들, 잊지 않으려 기록으로 남겨두었던 나와 당신의 문장은 어디에서 숨을 쉬고 있을까. 해서 막연하게 불러보는 폴린느는 바로 당신의 이름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쏟아낼 수 있는 오직 한 사람, 당신 말이다.

 

 <폴린느>

 

  폴린느 나는 사실 형편이 없어요 걸핏 하면 취하기를 좋

 아하고 쓸데없이 침울해지고 전기세도 밀린데다가 무능력

 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에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순전

 히 L이 그리웠기 때문이에요 도대체 어디에다 토로해야 좋

 을까요 미안해요 오늘은 취했고 이런 글을 쓰고 싶을 뿐이

 에요 왜냐하면 지금은 Y대학의 캠퍼스가 자꾸 생각나거든

 요 거짓말이에요 Y대학의 캠퍼스는 그냥 해본 말이에요 사

 실은 버스를 기다리던 추운 겨울밤 수원까지 달려오던 크림

 코트의 거리를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폴린느 그냥 듣고 지우면 그만인 얘기일 뿐이에요 그러니

그냥 듣고 지우면 그만일 것이에요 그냥 듣고 지우면 그만

인 것이니까 이야기할 뿐이에요 아무것도 없이 맥주를 마셔

요 머리카락도 없이 한쪽 다리도 없이 손톱도 모두 빠져 맥

주를 마실 뿐이에요 음악은 치료제가 아니지만 음악을 들어

야 하니까 음악을 듣고 치유되지 않아요 아무튼 나는 울던

것을 마저 울어야 해요 그러니까 이 글은 아무런 것도 아

니지만 실례가 되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요 아무것도 아

닌 시간에 맥주를 마시고 있으니깐요  - 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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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2-11-01 0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시집 평 써주시는 것 정말 좋아합니다.
알라딘에는 시집 건드려 주는 분들이 의외로 많이 없는 것 같아서요.
자목련님 감사부터 전하고 내용은 천천히,섬세하게 읽을 게요. 고맙습니다.

자목련 2012-11-01 07:00   좋아요 0 | URL
리뷰,라고 말하기 부끄러운 감상인데 이렇게 귀한 댓글을 주시다니요.
팜므느와르님 고맙습니다. 몹시 춥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11월, 건강하고 따뜻하게 여세요!!

블루데이지 2012-11-03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꽤 좋은데요!!!! 지금.제가.있는곳에 앉아서.읽으니 안성맞춤이었어요~

자목련 2012-11-05 11:18   좋아요 0 | URL
블루데이지님이 있던 곳이 궁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