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
켄트 하루프 지음, 한기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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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작은 읍 소재지다. 다니고 있는 교회는 더 작은 면 소재지에 있다. 예배에 참석하시는 분은 거의 노인들이다. 자연스레 주일마다 안부를 묻고 살핀다. 예배에 나오지 않으시면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먼 도시의 병원에 입원을 하셨거나 돌아가신 경우도 많다. 몇 년 사이 이곳에도 요양 시설에 거주하시는 분도 늘어난다. 죽음이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하지만 죽음을 기다리는 삶은 불안의 연속이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축복』속 대드 루이스도 그렇지 않았을까?

 

 폐암 말기 진단을 받고 남겨진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차분하게 계획할 수 있는 삶은 없다. 77세로 55년 동안 철물점을 운영했고 지역사회에서 큰 무리 없이 살아온 대드 루이스의 곁에는 아내 메리가 있다. 그녀는 아버지의 소식을 딸 로레인에게 전한다. 딸과 함께 남편의 마지막 시간을 평화롭게 지켜주고 싶어 예정된 수순을 밟는 것이다.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간호사는 대드 루이스의 상태를 살피고 메리와 로레인에게 약 조절과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해 알려준다. 옆집 이웃 버타 메이와 손녀딸 앨리스와 홀트 카운티의 과부 윌라 존슨과 그녀의 딸 에일린은 종종 방문하여 함께 차를 마시고 시간을 보낸다.

 

 평범하면서도 평온한 일상을 이어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저마다의 상처를 지녔다. 어린 소녀 앨리스는 유방암으로 젊은 엄마를 잃었고 로레인은 딸 레이니를 교통사고로 떠나보냈다. 지역사회 교사였던 에일린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아픈 기억으로 힘든 시간을 견뎠다. 자신의 상처로 인해 로레인은 더욱 앨리스를 애틋하게 바라보고 월라 존슨 모녀는 적극적으로 앨리스에게 다가간다. 앨리스를 데리고 나가 옷을 사주고 식사를 하며 자전거를 타는 법을 알려준다. 수줍던 앨리스도 그녀들과 점점 가까워진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준비하는 건 힘들다. 떠나야 하는 대드 루이스도 그렇고 떠나보내야 하는 가족과 이웃도 그렇다. 대드 루이스는 55년 동안 철물점을 운영하면서 살아온 지난 삶을 회상한다. 틀에 박힌 듯 반복된 일상, 집을 나간 아들 프랭크와 화해하지 못한 시간을 돌아본다. 프랭크와 로레인이 연락을 하며 지냈다는 사실에 한편으로는 놀라면서도 안도한다. 자신의 인생이 담긴 철물점을 로레인이 맡아주기를 바라며 딸이 행복해지기를 소망한다.


 거기서 내가 보고 있던 것은 바로 내 인생이었소. 어느 여름날 아침 앞쪽 카운터에서, 나와 다른 누군가 사이에 오간 사소한 거래 말이오. 몇 마디 말을 주고받는 것. 그냥 그뿐이었소. 그런데 그게 전혀 쓸모없는 일은 아니었던 거요. (182쪽)


 시한부 선고를 받은 대드 루이스의 가족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 펼쳐지는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갈등은 대단하거나 특별하지 않다. 덴버에서 동성애를 옹호한 이유로 홀트 마을로 좌천된 라일 목사의 가정도 마찬가지다. 시골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라일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아내와 덴버로 돌아가기만을 바라는 아들 존 웨슬리는 방황의 날들을 보낸다. 대드 루이스가 암과 싸우며 하루하루를 버티듯 그들도 자신의 정해진 자리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내심 아들 프랭크가 아버지를 만나러 오기를 기대했고 라일 가족이 서로를 이해하기를 바랐지만 끝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내와 딸의 배웅을 받으며 대드 루이스는 떠났고 그를 추모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든다.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난 보낸 이들의 담담하면서도 다정한 위로가 남겨진 이들에게 뜨겁게 스며든다. 어쩌면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게 축복인지도 모른다.    


 삶은 크게 보면 아주 단순한다. 죽는 일과 사는 일, 그 두 가지로 본다면 말이다. 언제부턴인가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죽고 사는 일인가,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분류하다 보니 사소한 감정 다툼은 별게 아닌 일이 된다. 그러나 정작 죽음을 생각하면 모든 게 다 거대하게 다가온다. 죽음에 의연한 삶은 없다. 어딘가 죽음이 우리를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겠지만 어제처럼 그렇게 살아간다. 다투며, 사랑하며, 그리워하며...


 8월 어느 날 밤의 일이었다. 대드 루이스는 그날 새벽 세상을 떠났고 이웃집 어린 소녀 앨리스는 저녁에 길을 잃었다가 어둠 속에서 마을의 가로등 불빛을 보고 집을 찾았다. 그렇게 그 아이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서 날씨는 차가워지고 나뭇잎이 졌으며, 겨울이 되자 산맥에서 바람이 불어왔고 홀트 카운티의 고원지대에는 폭풍이 불고 사흘 내리 눈보라가 쳤다. (462~4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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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04-04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는 폐암으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 나오는 모양이네요. 암이라든가, 또는 다른 질병으로 인해서 남은 시간이 어느 정도 예측이 되는 순간이 된다면, 어쩌면 그 순간이 되면서부터 더 명확해지는 것들도 있을 것 같아요. 앞으로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 것인지, 이전에는 추상적인 생각을 했지만, 그 순간부터는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점이 있을테니까요.

삶은 단순한데, 다시 안으로 들어가면 끊임없이 망설이게 되는 시간을 자주 그리고 계속해서 지나왔던 것을,
그런 것들이 불필요했다는 것은 어느 지점을 지나고 나서야 깨닫습니다. 그렇게 아쉬움을 남기고, 다시 또 지나는 것, 매일매일 이별하고, 새롭게 만나는 것이 순서없이 계속되는 삶을 또 이어갑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자목련님,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17-04-05 16:53   좋아요 1 | URL
네, 남겨진 시간이 적확해서 더 슬프기도 하고 더 아련하기도 한 것 같아요. 갑자기 이별하는 것보다는 나은 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요. 예전에는 소설에서 죽음을 마주해도 먼 이야기로 다가왔는데 요즘은 어느 순간 가까이 죽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요. 하루가, 참 소중하구나 생각하면서요.

포근한 빗소리가 서니데이 님 곁에 머무는 오후이길 바라요.
 

 

 그저 자주 기침을 할 뿐이라고 여겼다. 감기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몸은 언제나 정확하여 빨리 약을 먹으라고 부축인다. 아파트 단지에는 꽃들이 피기 시작하고 친구들의 안부에도 꽃 사진이 함께 한다. 그러니까 4월인 것이다. 노오란 수선화가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꽃봉오리 속에 고운 색을 감춘 자목련이 가득한 4월.

 

 아침에는 다정한 이가 건네는 축복이 도착했다.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우리는 이렇게 또 한 계절을 함께 보내는 것이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쌓이는 날이다. 오늘의 감정을, 오늘의 마음을 가슴에 새기고 싶다. 같은 듯 다른 하루를 보내는 우리다.

 

 3월에는 어떤 계획을 세웠다. 계획은 계획으로 끝났다. 계획은 미뤄지지 않았다. 그것으로 끝이다. 4월이 되었으니 4월의 계획을 세운다. 3월의 계획과는 완전하게 다른 것들로 세운다. 소박하고 하찮은 것들, 그러나 소중한 것들. 생각해보니 계획을 세우는 마음은 참 설레고 기쁜 것이었다. 그 마음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내 마음을 읽은 듯한 지인의 선물과 내가 고른 나를 위한 선물. 장석주의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천양희의 『새벽에 생각하다』, 잘 모르는 작가지만 끌리는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 언제나 반가운 『2017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4월에는 젊은작가를 읽어야지. 박혜상의 『그가 내린 곳』과 줌파 라히리의 산문집 『책이 입은 옷』까지. 4월은 선물로 시작한다. 선물을 주는 즐거움과 선물을 받는 즐거움. 당신과 나에게 모두 즐거움이 흐른다. 5월에는 제임스 설터의 산문집이 나온다고 하니 5월의 즐거움이 대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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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04-03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3월의 계획은 거의 계획으로 끝난 것들이 많았어요.
4월엔 4월에 맞는 계획이 필요한 것 같아요.
자목련님, 4월엔 더 설레는 일들, 더 기쁜 일들로 많이 채우시면 좋겠어요.
따뜻한 저녁시간 보내세요.^^

자목련 2017-04-04 12:22   좋아요 1 | URL
4월엔 4월의 계획을, 우리 함께 실천하고 채워요!!
감기도 조심하시구요, ㅎ

blanca 2017-04-04 0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웅 저도 기침 중이에요. 빨리 물러가야 할 텐데...자목련님의 서재의 책들을 하나 하나 보니 다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한 권은 읽어서 반갑고요. 희망을 품은 사월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자목련 2017-04-04 12:23   좋아요 0 | URL
아, 감기와 싸우는 마음. 반가워하면 안 되는데 반가워요, ㅎㅎ
먼저 읽은 책, 궁금하네요.
올해의 4월은 좀 더 특별할 것 같아요. 잔인한 4월이 아닌 아름다운 사월이며 좋겠어요, 모두에게!!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 나만의 질문을 찾는 책 읽기의 혁명
김대식 지음 / 민음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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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펴면 세상이 보이지 않는다. 눈을 글을 읽지만, 뇌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낸다. 읽는 자에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책. (74쪽)

 

 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사람들은 묻는다. 당신에게 인생의 책이 무엇이냐고. 인생은 멈춤이 아니니 인생의 책은 하나의 책이 아니라 여러 권이 될 수 있도 시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니 인생의 책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책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누군가의 인생의 책을 원한다. 심지어 그 책이 내게도 그러한 책으로 다가와야 하는 게 아닐까 걱정한다.  책이란 이처럼 모호한 존재다. 읽지 않고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세계가 그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력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인생의 책이 아니더라도 내가 읽지 않은 책은 언제나 궁금하니까. 먼저 읽은 이의 글을 통해 책을 만나는 이유도 그렇다. 그러나 분명한 건 특정한 한 권의 책이 모두에게 좋은 책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개인의 취향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책이라는 저마다의 세계가 하나로 연결될 수 없으니까.

 

 김대식의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는 질문의 필요, 혹은 질문을 통해 확장되는 사고, 나아가 삶에 대한 통찰력을 키울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의 질문에 하나의 답이 아닌 하나의 질문에 수천, 수만 개의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것은 다시 질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1부 삶의 가치를 고민하라. 2부 더 깊은 근원으로 돌아가라. 3부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라. 4부 과거에서 미래를 구하라. 5부 답이 아니라 진실을 찾아라. 6부 더 큰 질문을 던져라,로 나눠 32가지 질문을 던지고 그에 맞는 책을 소개한다. 익숙하지만 작품으로 만나지 못한 작가도 많다. 랭보, 이탈로 칼비노, 보르헤스, 움베르토 에코, 카프카, 베케트, 제임스 조이스 등이다.

 

 책에서 던지는 32가지 질문은 오늘만 사는 것처럼 살아가는 우리를 멈칫하게 만든다. <‘함께 홀로’의 길을 고민하라>, <누구를 존경해야 하는가>, <역사는 과연 누구의 것인가>, <나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가> 등 질문을 듣고 지난 삶과 지금의 나를 돌아본다. 우리는 우리가 정확하게 안다고 믿는 것들, 확신하는 것들에 왜? 란 질문을 한 적이 있던가. 그러니까 이미 답이 정해진 것들에 대해 한 번도 다시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것들이 최초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잊는다. 학습으로 얻은 것들은 의심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간단한 덧셈으로 인식하는 1+1=2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와 러셀의 대작 『수학 원리』는 360여 쪽에 가서야 그 사실을 증명했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증명 과정을 반드시 다 알아야 하고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는 질문과 반복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거대한 우주의 비밀이 밝혀지고 인간의 정체성과 본질에 대해 다가가는 것, 그것이 질문의 궁극적인 답은 아닐까.

 

 내가 읽은 책에 대한 다른 시선은 언제나 신선한 감동을 안겨준다. 뇌과학자가 읽은 문학을 통한 질문과 사유. 아침에 일어나니 벌레로 변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인 카프카의 『변신』에서는 다르다는 이유로 자행되는 차별과 폭력을 고발한다. 과거의 문학이 현재의 모습을 고스란히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벌레가 된 남자에게는 더 이상 인간의 존엄성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가까운 미래 인간의 자리를 대신할 인공지능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아니, 인간과 기계는 대등한 관계가 될 수 있을까. 점점 더 신의 영역에 다가가는 인간의 삶은 옳은 것일까.

 

 우리 모두의 영원한 변신. 그리고 언제라도 우리와는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학살과 폭행과 차별을 저지르는 또 하나의 우리 모습을, 카프카의 변신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82쪽)

 

 삶의 가치에 대한 질문과 관계없이 김대식이 사랑한 책의 유혹은 강렬했다. 전혀 궁금하지 않았던 작가와 책이 읽고 싶어진 것이다. 아, 이처럼 책이란 위험한 존재다. 정말 흥미롭고 새로운 이야기로 오랜만에 세상을 잊고 글에 빠져들어갈 수 있는 기회라 말하는 이탈로 칼비노의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 본질적으로 번역이 불가능한 책이라는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 400년 후의 미래를 걱정하는 방대한 스케일의 인류를 그린 류츠신의 『삼체』. 과연 언제 내가 이 책들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을까.

 

 정해진 답을 원하는 질문은 식상하다.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다양한 해답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질문을 두려워한다. 그것이 과거에 대한 것이든 미래에 관한 것이든, 지식에 관한 것이든 가치관에 대한 것이든 말이다. 뇌과학자 김대식이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에서 소개하는 책이 누구에게나 좋은 책이 될 수 있을까? 저자의 방식대로 질문(너무도 포괄적인 질문)을 던지고 책에서 답을 찾는다면 완벽한 독서가 될 것이다. 물론 나는 그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니 여전히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남는다. 질문이 질문을 만드는 책, 점점 질문은 많아지고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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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495
임솔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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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도 쓰고 시도 쓰는 젊은 작가. 소설도 읽기 전에 시집에 대한 기대가 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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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실로 길게 들어오는 햇빛이 정말 좋다. 봄이라 그런가. 곧 노란 개나리도 피고 진달래도 필 것이다. 이렇게 또 봄을 본다는 게 기쁘다. 이상하게 자꾸 말랑말랑한 감정에 빠져든다.  읽고 있는 소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감성은 메마른데 그렇다. 봄이 주는 숙제일까. 같은 자리에서 변화 없이 서 있다는 게 무섭도 두렵지만 한편으로는 그저 감사하다. 같은 일상,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나이가 튼 탓이다.

 

 책을 고르는 기준도 조금씩 달라진다. 소설도 많이 읽지만 에세이에 눈이 간다. 김탁환의 『엄마의 골목은 어떤 내용인지 전혀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꼭 곁에 두고 싶었다. 엄마의 골목이라니, 벚꽃의 도시 진해와 골목은 어떤 추억을 보여줄까. 벚꽃을 한 아름 안은 듯 마음이 밝아진다. 이승우의 『사랑의 생애』​를 읽으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이승우의 소설은 이상하게 잘 안 읽게 된다. 소설집 한 권만 읽고 몇 권은 정리한 기억이 있다. 과연 이 소설은 읽을 수 있을까. 어쩌면 도전일지도 모르겠다.

 

 집에 있는 화분의 나무도 잘 키우지 못하지만 나무에 관한 책은 언제나 기대가 크다. 나무, 숲, 그것들과 살아가는 이야기 『랩 걸』은 이 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책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나를 제일 설레게 하는 책은 존 버거의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그의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운인가.

 

 눈이 내리는 3월이다. 꽃이 피는 3월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서, 혼자 피어나는 꽃을 생각하며 그것의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상상하는 3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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