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남자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7
외젠 이오네스코 지음, 이재룡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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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태어난다. 양육되고 조금씩 자신의 자아를 형성한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신기하고 신비롭지 않은가.  ‘나’는 어디서 와서 이 세상에 ‘나’라는 이로 살아가는 것일까. 누구나 한 번쯤 깊이 고민하고 답을 찾으려 애썼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정답도 없거니와 존재라는 명제만 생각할 수 없다는 걸 안다. 생이라는 굴레는 그 질문 외에도 답을 찾아야 할 것이 많으니까. 만약, 존재에만 올인 할 수 있다면 답 근처에 다가갈 수 있을까? 외젠 이오네스코의 『외로운 남자』의 화자처럼 말이다.

 

 불우한 가정사를 지닌 우울하고 권태로운 남자에게 친척이 남긴 유산은 그를 일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지겹던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이 생겼으니 그에게 남은 건 행복하게 사는 것 뿐이다. 작고 낡은 호텔을 떠나 자신만의 아파트를 장만하고 가정부를 두고 홀가분한 생활을 시작한다. 식당에서 혼자 끼니를 해결하고 거리를 거닐며 주변 인물들을 (자신을 경계하는 수위, 지정 자리를 내어주며 부러워하는 식당 종업원, 개를 기르는 이웃 여자)관찰한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지 않아도 되고 하고 싶은 일만 해도 되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삶이니 그는 충분히 만족스럽다.

 

 하지만 아무리 풍요로운 일상이라도 혼자 깨어나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사는 일은 고독하다. 거기다 건물은 무너지고, 폭동이 일어나고, 잔혹한 살인이 일어나고, 독재는 이어지는 세상까지 그가 불행할 이유는 충분하다. 이 끔찍한 세상을 흉보고 비판하고 술잔을 나눌 누군가를 원하지만 그는 찾지 못한다. 물론 그가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다. 전화를 설치하지만 타인에게 자신의 번호가 알려지지는 건 원하지 않는다. 철학을 공부한 학생에게 인생에 대한 생각을 털어놓지만 병원을 추천받는 일로 끝난다.

 

 다른 시도로 단골 식당 여 종업원과 동거를 한다. 사랑을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이 역시 이별로 이어진다. 그를 불안과 그의 환멸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들의 눈에 그는 그저 운이 좋은 사람이다. 절대 외롭거나 불쌍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절대적으로 외로운 사람이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거대한 우주에 대한 욕망을 가진 이였다. 평범한 삶이 그에게는 너무도 무겁고 절망적인 것이었다.

 

 ‘모든 것이 존재하면서도 부재하며, 단단하고 투박하면서도 한없이 허약한 듯한 이 느낌이 야릇하다. 이 세계가 진정 존재하는 것일까? 조금만 허점이 있어도 모든 것이 수천 조각으로 부서질 수 있다. 내 몸이 조화의 눈부신 잎사귀의 일부라 생각되자 무(無)에 대한 구토가 일어난다. 그리고 충만에 대한 구토.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시간이 남아 있다면 얼마 동안이나 버틸 수 있을까? 아마도 오직 순간만 있으리라.’ 89쪽

 

 ‘존재하는 것은 그냥 있는 것과 같은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 이 세계는 용해될 수 없는 실재이거나, 아니면 절대적 실재의 껍데기일지도 모른다. 실재를 감추고 있는 단순한 커튼일지도. 동시에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수십억 개의 이미지와 목소리, 이런 모든 것은 부동의 근본적인 토대에 의해 지탱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은 추측일 뿐. 이런 토대가 있기를 절망적으로 원했다’ 107쪽

 

 그가 예전과 같이 직장에 다니고 그들과 어울렸다면 그의 생은 달라졌을까? 여전히 그에게는 존재에 대한 갈증이 있었 것이다. 육체적 욕망을 채우고, 계절이 바뀌고, 이념이 대립과 화해를 반복하고, 세상이 변하는 것도 그에게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었다. 결국 그가 그 답에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건 죽음이었다. 

 

 ‘사다리가 빛났다. 정원이 내게 가까이 다가와 나를 둘러쌌고, 나는 그 일부가 되어 그 한복판에 있었다. 여러 해가 지났다. 아니면 몇 초가 흘렀다. 사다리가 내게 다가왔다. 거의 내 머리 위에 있었다. 여러 해가, 아니면 몇 초가 흘러다. 그것이 멀어져 녹듯이 사라졌다. 사다리가 사라지고 나서는 덤불이, 나무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개선문과 함께 기둥들이 나에게 깊이 스며들었던 그 빛의 무엇인가는 남았다. 나는 그것을 계시로 받아들였다.’ 155~156쪽

 

 쓸쓸하고 어두운 소설이지만 선명한 질문을 남기는 소설이다. 외젠 이오네스코는 이 소설에서 화자의 이름을 단 한 번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의 주변인물의 이름이나 사회적 지위, 직책을 언급하면서도 말이다. 화자를 비롯해 우리 인간이 우주의 작은 부속물에 불과하다는 걸 강조하는 듯하다. 버튼 하나로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세상에 사는 우리는 어떤가. 나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주목받기 위해, 시간마다 시시콜콜 일과를 사진과 140자의 글자에 담아 세상에 내 놓지 않는가.

 

 어쩌면 우리는 모두 그와 같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나로 살고 있지만 다른 나를 갈망하며 수많은 사람들 속에 존재하지만 나와 같은 이는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에 절망하면서도 여전히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는가. 누구도 그 기다림의 끝에 죽음이 있다는 건 인정하지 않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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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2-12-14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의 글을 읽으니 '존재'에 대한 여러 생각들이 마구 떠오르네요. 그리고 쇼펜하우어가 여러 차례 언급했던 '마야의 베일'도 떠오릅니다. '필사해 둔 부분'이 있어서 (매우 길지만) 덧붙여 봅니다.
* * *
시간에 있어 각 순간은 오직 선행하는 순간, 즉 그 순간의 앞 순간을 없앤 후에만 존재하며, 그 순간 자체도 마찬가지로 곧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과거도 미래도 그 내용의 연속은 별도로 해도 마치 꿈과 같이 헛된 것이고, 현재는 이 둘 사이에 있는 넓이도 존속성도 없는 경계에 불과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충족 이유율의 다른 모든 형태에서도 이와 같은 공허함을 다시 인식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과 마찬가지로 공간도, 또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 속에 동시에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원인과 동기에서 생기는 모든 것은 상대적인 현존을 가지고 있을 뿐이며, 이와 같은 성질은 그것과 동일한 형태로만 존재하는 다른 것에 의해, 또 그러한 다른 것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한 견해의 근본은 옛날부터 있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러한 견해를 이야기하며 사물의 영원한 유동을 탄식했고, 플라톤은 그 대상을 언제나 생성될 뿐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경시했다. 스피노자는 그러한 것을 존재하고 영속하는 유일한 실체의 단순한 우연성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칸트는 이렇게 인식된 것을 물자체에 대한 단순한 환상으로 간주했고, 마지막으로 오랜 옛날 인도인의 지혜는 다음과 같이 말해 주고 있다.

그것은 '마야(베단타 학파의 술어로 환(幻) 또는 화상(化像)의 뜻, 현상 세계는 진제의 입장에서 보면 마야다)'다. 인간의 눈을 덮고 이것을 통해 세계를 보게 하는 거짓된 베일이다. 이 세계는 있다고 할 수도 없고 또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꿈과 같은 것으로, 방랑자가 멀리서 보물로 생각하는 모래 위에 반짝이는 햇빛과 같으며, 또 그가 뱀이라고 생각하고 던져 버리는 새끼줄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中에서

자목련 2012-12-14 18:41   좋아요 0 | URL
oren 님은 이렇게 어려운 내용이 담겼을 책을 읽으셨군요.
영원한 탐구의 주제가 아닐가 싶어요, 존재란.
소설을 읽는 동안은 고독과 존재란 단어에 둘러싸였지만 금세 잊고 마는..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문학동네 시인선 28
박연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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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이 내렸고 세상은 느려졌다. 자동차는 길을 떠나는 대신 달콤한 잠에 취했고 안부를 묻는 전화는 틈을 두고 이어진다. 동(動)으로 가득했던 세상이 잠시나마 정(靜)으로 변화한다. 곧 사라질 것을 알기에 요란하지 않게 맞이하려 해도 닿는 곳마다 마주하는 눈은 이런 시를 찾게 만든다. 겨울이라는 계절과 하나가 되는 누군가를 데리고 온다.

 

 <겨울의 고도(高度)>

 

 빨간 코트가 잘 어울렸으면 좋겠다

 얼굴 위로 자꾸만 음영이 드리워지는데

 나를 덮은 우주의 그림자가

 나무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겨울의 갈라진 살결, 그 가느다란 틈에

 나는 끼워져 있다

 

 앙상한 얼굴의 낯선 사내가

 가끔 주먹으로 두드려보는

 나는 겨울이 앓는 문둥병,

 눈썹이 빠지고 코가 주저앉은 채로 휘파람 분다

 

 애인은 내내 화두였다

 전화는 오래도록 먹통이었고

 바람이 유난히 보채는 날에는

 거리를 배회하는 젊은 여자들 오목한 허리선에

 베이고 싶었다

 

 입 열면 허연 입김

 겨울에 피어나는 그을음처럼, 아득히 퍼지고

 나는 겨울의 고도를 생각하며

 자주 떨었다 (42쪽)

 

 <노란 꼭대기>

 

 겨울은 머리카락들이 수선을 떨며

 돌연 사상을 전향하기 좋은 계절

 끝내 완전한 오해로 이루어진 성에 들어가

 불 지르고, 함께 타고 싶다

 나는 정오를 모르고 오후 2시를 몰라요

 노래 부르다

 뜨겁게 녹아내리리라

 

 너는 ‘나’라는 비린내를 묻히고 돌아다니는 바람

 

 떨어지는 깃발

 끊기지 않는 리듬

 빨간 입술이 파랗게 질릴 때까지 뛰어다니는

 시(詩)

 

 누가 내 삶의 가장자리를 따라

 푸른 실로 시침질하네

 

 비틀린 뿌리를 가진 작은 꽃들이

 비로소 편안히 시들 수 있도록 (61쪽)

 

 박연준의 시집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에서 빼놓아서는 안 될 시는 바로 아버지에 대한 시다. 당신의 아버지는 어디에 있냐고, 당신은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없다. 방 한 쪽에 죽은 아내의 사진과 당신의 사진을 나란히 걸어놓은 내 아버지는 늙었고 병들었다. 먼 훗날, 혹은 멀지 않은 날에 내 아버지도 나를 물끄러미 바라만 볼 시간이 올지도 모른다. 육체뿐 아니라 정신까지 허약해진다는 건 지독하고 날카로운 고통일 것이다.

 

 <뱀이 된 아버지>

 

 아버지를 병환에 걸어놓고 나왔다

 얼굴이 간지럽다

 

 아버지는 빨간 핏방울을 입술에 묻히고

 바닥에 스민 듯 잠을 자다

 개처럼 질질 끌려 이송되었다

 반항도 안 하고

 아버지는 나를 잠깐 보더니

 처제, 하고 불렀다

 아버지는 연지를 바르고 시집가는 계집애처럼 곱고

 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아버지의 팥죽색 얼굴 위에서 하염없이 서성이다

 미소처럼, 아주 조금 찡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지나가는 뱀을 구경했다

 

 기운이 없고 축축한 ― 하품을 하는 저 뱀

 

  나는 원래 느리단다

  나처럼 길고, 나름답고, 축축한 건

  원래가 느린 법이란다

  그러니 얘야,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어둠이 고개를 다 넘어갈 때까지

  눈을 감으렴

  잠시,

  눈을 감고 기도해주렴 (20~21쪽)

 

 <물빛, 정오>

 

 12시라는 찻잔 안에서

 애벌레처럼 꿈틀, 피어나는 아버지

 어디 숨어 있었나 했더니

 밤새 줄어들고 줄어들어

 찻잔 속 노란 애벌레가 되었다

 아버지는 가냘픈 목소리로 운다

 아버지는 100년 전

 자신이 화분 속에 심어진 고양이었다는 걸 기억할까?

 

 찻잔 속에서 늘어지게 자다

 가끔 구름이 되기도

 가끔 허공이 되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도 아버지는 성실하다

 

 귀여운 귀여운 아버지

 사그라지는 몸

 사그라지는 목소리

 사그라지는 실체

 

 마침내 잦아드는,

 흘러넘치는

 아버지라는 액체 (30쪽)

 

 어린왕자가 뱀에 물려 자신의 별로 돌아가는 것처럼 아버지는 자신의 별로 돌아갔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만의 꽃과 나무가 기다리는 곳으로 말이다. 그러니 박연준의 다른 시에 뱀, 나무, 꽃이 등장하는 건 당연한 것이리라. 원래는 팔이 있었다 / 어느 날 이유 없이 두 팔이 잘리자 / 온몸으로 한을 품어 나무의 정수리에서 (나무의 약력 중에서, 31쪽), 너는 나의 캔버스에 / 낯선 초록과 / 열두 마리 키스를 데려왔지 (나무 중에서, 80쪽) 껍질을 벗어놓고 잠든 뱀은 모른다 / 자신이 털어낸 그림자 속에 / 누가 들어가 잠드는지 (가벼운 숲 중에서, 86쪽), 때문에 그녀의 시는 지극히 몽환적이며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연애의 그늘>

 

 내가 아래로 아래로 떨어질 때

 입술은 위로 위로 흐르리

 역방향으로 흐르는 비틀린 빨강이

 허공에 핀 찰나의 꽃이라고 생각하리

 

 포옹이 오래 고이면

 몸은 하나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손가락은 사물을 가리키는 막대로 전락하고

 손톱은 가장 딱딱한 미소를 짓는다

 소리가 나지 않는 사고라니,

 누군가 봄을 꺼버렸다

 

 동공 없이 뻥 뚤린 눈 알 속에

 개구리들이 알을 낳고, 알들은 곧 썩는다

 식탁 위 음식들은 왜 모두 죽어 있을까?

 백 년을 씹어도 삼킬 수 없는 질긴,

 가죽 같은 시간이 있을 뿐

 열렬한 잠 속엔 환영이 없다

 

 깡마른 유령 둘이 사다리 위에 앉아

 톡, 톡,

 손톱을 깎고 있는 풍경

 오래 생각하면 어둠도 늙는다 (74~75쪽)

 

 <기억은 청동빛으로 굳는다>

 

 거울 속에서 너는 내 얼굴을 침범하고

 네 눈으로 나를 본다

 너는 권태,

 라고 말한다 코끝으로

 너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코끝이나 무딘 이마 중앙으로 표현한다

 

 거울 속에 내 모습이 비치지만

 그곳에서 나를 바라보며 도리질 치는 건

 너다 그런데 나는 왜 눈 속에서

 날 바라보는 네 눈을 봐야 하는 걸까?

 

 거울,

 거울 속에서

 너는 몸이 아니라 시간으로 나타난다

 너는 악보의 끝세로줄처럼 서 있다

 너는 한쪽 팔이 잘렸고 그것은 유래 깊은 사건 때문이었다

 그곳에 바다는 없었지만 너는 바닷물에 화상을 입었고

 내가 불탔고, 기억은 팔이 세 개가 되었다

 거울 밖에서 돋아난 겨울 속엔 지렁이 세 마리가 산다

 움직이지 않는 채로 자란다

 

 거울 속에서 나를 뒤집어쓴 너는

 끊어지는 허밍으로 존재하고

 우리는 밤의 치마를 들친 벌을 받는다 (52~53쪽)

 

 박연준의 시에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본다. 부모, 형제, 연인, 친구와 보낸 시간의 조각들을 이어 붙인다. 희미해진 사진 속에 갇힌 얼굴을 발견한다. 잊고 있던 이름들, 잊었다고 믿었던 이름들을 불러온다. 어쩌면 12월이라서, 연말이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들의 이름을 불러 볼 핑계를 찾으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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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터의 고뇌 창비세계문학 1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임홍배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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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젊은 남자가 한 젊은 여자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다. 이 얼마나 눈부시고 아름다운 일인가. 한데 그 여자에겐 이미 정혼자가 있다. 부적절한 관계라 할 수 없는 삼각관계지만 18세기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젊은 남자 베르터의 생은 환희와 고통의 세계를 오간다. 때문에 슬픔이 아닌 고뇌인 것이다. 로테를 사랑했지만 이루어질 수 없기에 괴로워하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은 베르터의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사랑이 전부라고, 그 사람이 없으면 죽을 것 같았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내 사랑이 상대의 사랑에 비해 너무 크다고 생각했기에 사랑을 강요하는 어리석은 시절이었다. 활화산 같았던 그 감정들이 지속되는 시간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그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과 고통을 안다고 조금은 말할 수 있다. 한데 과연 그 고통을 아는 게 맞을까, 나는 그가 아닌데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괴테의 『젊은 베르터의 고뇌』는 슬픔이 아니라 고뇌가 맞는지도 모른다. 한 여자를 사랑했기에 그녀를 원했고 소유하고 싶은 마음은 당연한 것이다.

 

 ‘나는 이렇게 가진 게 많지만, 그녀에 대한 생각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나는 이렇게 가진 게 많지만, 그녀가 없으면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버린다.’ (144쪽 - 10월 27일 저녁 일기)

 

 스물다섯살의 청춘이 쓴 글이라 그럴까. 아니면 실화를 바탕으로 쓴 글이라 그럴까. 괴테는 순수하면서도 여린 베르터를 온전히 책 속에 담았다. 닿을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애절함과 비통함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친구 빌헬름에게 보내는 편지와 일기 형식은 비밀로 존재되어야 할 고백이라 할 수 있다. 자살을 결심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겨 로테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고자 하는 베르터의 심경은 어땠을까. 죽음만이 그 사랑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은 건 분명 어리석지만 아무도 그를 탓할 수 없음이 더 슬프다.

 

 로테를 잊기 위해 그녀를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나 일에 몰두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지만 그에게는 단 한 사람 로테만이 필요했다. 베르터에게 로테는 천사였고, 전부였다. 로테의 약혼자 알베르트에게 어떤 결함도 없었기에 베르터는 더 좌절했는지도 모른다. 알베르트와 베르터, 그리고 로테는 한편으로는 우정이라는 이름의 가장 안정적인 삼각구조의 형태를 보여주지만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관계가 얼마나 불안정하며 위태로운지 말이다.

 

 때로는 냉철하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변하는 베르터의 감정 묘사가 탁월하다. 극단적이고 비극적인 결말이라 지금까지 사랑받는 건 아니겠지만 그만큼 강렬하게 폐부를 찌르는 소설이다. 그렇게 때문에 사랑의 열병을 앓는 이에게는, 사랑이라는 덫에 빠진 이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은 책이기도 하다. 설사 그들이 죽음 그 이상의 고통을 감당할 수 있다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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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1-09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픔과 고뇌는 그 깊이가 다르게 느껴져요. 이 책으로 새로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담아가요.
자목련님, 차분하게 초겨울아침 시작해요, 우리^^

자목련 2012-11-10 08:21   좋아요 0 | URL
베르터의 맑고 투명한 사랑보다는 그가 겪었을 수많은 불면의 밤들의 시간을 담고 싶은 제목이 아닐까 싶어요.
날카로운 모습을 드러내는 겨울을 차분하게!!
 
우선권은 밤에게 작가정신 소설락 小說樂 3
이신조 지음 / 작가정신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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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은 낮보다 화려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때문에 밤은 새로운 세상의 창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밤을 소유하며 즐길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누군가는 밤에도 일을 해야 하고 누군가는 밤을 지켜야 하며 누군가는 밤의 그늘에 속해 숨어버린다. 소설 『우선권은 밤에게』의 스물 두 살의 주인공에게 밤은 거대한 안식처이자 불안의 공간이다.  

 

 주인공 나는, 미혼모였던 엄마 대신 외할아버지와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엄마의 재혼으로 잠깐 아빠가 존재했지만 엄마의 죽음으로 다시 시골로 돌아왔다. 스물 두 살의 나는 서울의 어느 전문대 근처의 한 부동산에 근무한다. 할아버지와 할어니가 차례로 죽고 혼자 남은 나를 그가 서울로 불러들인 것이다. 죽은 엄마의 남편이었지만 이제는 더이상 계부가 아닌 전 계부가 운영하는 부동산에서 매물로 나온 집들을 원하는 이들에게 보여주는 일이다. 1년 넘게 편의점 음식으로 허기를 달래 뚱뚱해진 몸은 계절마다 같은 옷, 같은 신발로 지낸다.

 

 작은 읍에서 혼자 지낸 나에게 서울은 연극무대와 같았다. 나의 감정을 숨긴 채 다른 나로 사는 것이다. 누군가 남기고 간 먼지 가득한 살림살이, 당장이라도 들어와 살 수 있는 최신 유행의 원룸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사람들의 속내를 읽는다. 밤은 나에게 잠을 허락하지 않았다. 불면의 밤은 나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잠들지 못하는 밤, 나는 주인을 찾지 못한 집들을 청소하고 들의 이야기를 듣다 그곳에서 잠들기도 한다.

 

 누군가 나를 본다면, 나는 그저 하나의 검은 덩어리로 보일 것이다. 나는 그저 하나의 검은 덩어리로 보이는 커다란 검은 외투를 입고, 그 외투에 달린 커다란 검은 모자를 덮어 쓰고 밤의 거리를 걷는다. 커다란 주머니에는 언제나 편의점의 음식들. 그것들을 만지작거려 차갑거나 따뜻하거나 끈적이거나 가슬가슬한 손가락. 그저 하나의 검은 덩어리로 보이는 까닭인지, 밤의 거대한 반죽에서 떨어져 나온 한 점 부스러기로 보이는 때문인지, 반년쯤 이어진 밤의 산책길에서 내게 위협을 가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45쪽

 

 소설은 단조롭다. 나의 일상이 단조롭기 때문이다. 부동산으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거나 편의점에서 사온 단 음식들으로 끼니를 때우고 밤이 되면 매물로 나온 빈 집을 기웃거린다. 부동산은 찾은 신입생에게 여러 집을 보여주면서 나는 그에게서 자신을 본다. 움츠러들고 두려운 모습을 숨기며 방어하는 자신을 말이다. 그러다 집을 구하러 온 쌍둥이 여사가 장독대집의 주인이 되고 그들이 운영하는 나이트룸을 만나면서 달라진다. 그 방에서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고 단 한 번도 내놓지 못한 상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동안 혼자 외로웠던 시절에 대해 엄마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에 대해서 말이다. 쌍둥이 여사가 드려주는 말은 가장 기본적인 삶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되는 대로 살아온 삶, 나를 돌보지 않고 살아온 이들에게 따끔하면서도 따뜻한 조언인 것이다.

 

 “사람은 잘 먹지 않고 잘 입지 않고 잘 자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잘 살 수는 없어요.” 159쪽

 

 서울의 밤이라는 공간은 얼마나 화려한가. 그러나 그곳의 삶이 모두 편안하지는 않을 터. 소설은 집을 보러 다니는 스물 두 살의 여자를 통해 밤을 견디는 다양한 사람들의 상처와 삶을 이야기 한다. 어둡고 깊은 밤이 지나야 밝고 환한 아침이 오듯 그 상처를 이겨내야 한다고 나즈막하게 말한다. 지친 육체와 영혼이 온전하게 쉴 수 있는 집이 없는 그들의 밤을 위로하고 달래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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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의 연필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6
마누엘 리바스 지음, 정창 옮김 / 들녘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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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이라 불리는 모든 것들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단순하게 뜻을 같이 하고 동참하는 경우라도 그 순간, 삶을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사랑도 그렇다. 선택한 사랑을 지키기 위해 죽음도 겁내지 않는 이가 있다. 기도하는 여인의 모습이 새겨진 붉은 색연필의 표지 목수의 연필에서도 그런 사랑을 만난다. 한 치의 균열도 찾을 수 없는 견고한 철옹성같은 사랑이라고 하면 맞을까.

 

 소설은 에스파냐 내전을 배경으로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삶에 대한 것이다. 의사인 다 바르카와 그의 연인 마리사, 그녀를 흠모하는 간수 에르발이 들려주는 그들의 사랑 이야기다. 책은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노인 다 바르카를 취재하기 위해 신문기자가 그를 방문하면서 시작한다. 혁명가이자 의사였던 그의 생은 항시 죽음과 맞닿아 있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에르발이 감시하게 된 이유는 마리사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마리사를 처음 본 순간부터 에르발은 사랑에 빠졌고 그녀가 다 바르카의 연인이라는 건 그에게 거대한 상심과 분노를 가져왔다. 그럼에도 다 바르카가 감옥에 있을 때 마리사의 면회나 물건을 전달해주는 일을 거부할 수 없었다.

 

 혁명가를 사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다 바르카와 신념이 달랐던 마리사의 집안에서는 그를 반대했고 그녀는 자살을 시도하면서 사랑을 굽히지 않았다. 함께 한 시간보다는 지켜보는 시간이 더 많았을 사랑이다. 소설은 그들의 아름다운 사랑을 에브발의 목소리로 담담하게 담아낸다. 다 바르카가 감옥에서 만남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 에스파냐의 역사와 정치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내게는 조금 지루했고 어려웠다. 감히 내가 감옥이라는 공간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동질감을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산책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진 생의 마지막 순간을 집행해야하는 에르발에게 환청이 들리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살아남은 자가 된 에르발이 자신이 죽인 화가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다 바르카와 마리사가 결혼에 이르기까지 에르발의 도움이 있었다. 다 바르카가 위기에 처했을 때도 그랬다. 사랑하는 여자의 남자를 감시하면서 그녀의 행복을 빌어줘야 하는 그 마음은 어땠을까? 세월이 흐른 뒤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을 기억하고 누군가에게 그들의 사랑을 전하는 일이다.

 

 난 그전에도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걸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아무도 그 둘을 떼어놓지 못했어. 내가 마리사 마요와 다니엘 다 바르카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안 건 그때였지. 사실 그때까지 두 사람이 부부가 될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어. 소설에선 그럴 수 있어도 그 시대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거든. 그건 마치 향로에다 화약을 뿌려대는 짓이나 다름없었으니까.  164쪽

 

 신념대로 살아 온 남자와 그를 지지하며 사랑한 여자가 함께 늙어가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그 여자에 대한 욕망을 멈추지 못해 그들의 주변을 벗어나지 못한 한 남자의 삶은 얼마나 쓸쓸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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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12-28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보았습니다.

혁명과 로맨스, 거의 불가분의
관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가만 보니 제 리뷰는 전자에
더 비중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