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 나와 당신을 돌보는 글쓰기 수업
홍승은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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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는 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여기에 있고 쓰고 싶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는지 돌아본다. 그 시작은 대단한 게 아니었다.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말들이었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었고 다스릴 수 없는 화와 슬픔이 가득했다. 공개가 아닌 비공개로 나 혼자만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지금도 한 번씩 그 글을 읽을 때가 있다. 창피하고 부끄러운 글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런 글들이 나를 달래주었다. 솔직하게 미움을 표출했고 나를 기록했다. 그랬다. 나로 시작해 나와 이어진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썼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글을 읽었다. 글이라는 게 참 신기해서 글쓴이가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가진 슬픔이나 고유한 무언가가 전해졌다. 그런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 열렸다. 누군가에게 보여줄 목적으로 쓰지 않았지만 결국엔 하나의 문이 열렸고 나는 다른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런 모호한 글은 좋은 글이 아니라고 한다. 홍승은의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에 따르면 그렇다. 그 시절의 내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구제적으로 쓰지 못하는 글이니까. 그럼에도 나는 계속 쓰고 싶다. 책을 읽고 느낀 것들을, 일상의 작고 사소한 이야기를 쓰고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 이 역시 나를 위한 글쓰기라 여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글의 놀라운 영향력을 느꼈다. 글을 통해 나의 생각에 다른 생각을 더할 수 있고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확장시키는 힘을 배운다. 글을 읽는 즐거움과 글을 쓰는 기쁨에 대해서도 말이다.

글쓰기는 단지 지난 시간을 기록하는 활동이 아니라 경험을 기반으로 끈질긴 사유와 해석을 이어가는 과정이다. 기존의 관념을 비틀어 존재를 자유하는 언어를 구사하고, 경험을 다각도로 해석할 때, 내가 쓴 글은 단지 개인적인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61쪽)

글쓰기를 전공하지 않아도 글을 쓸 수 있고 각자의 삶이 전부 글이 될 수 있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다. 하지만 나의 삶을 어떻게 생생하게 포착해서 서술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쓴다는 것 자체를 어렵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저자가 운영하는 글쓰기 모임에 나온 이들이의 마음처럼 말이다. 솔직하게 쓸 수 있을까, 이런 이야기를 써도 될까, 사람들이 뭐라 생각할까. 저 깊은 곳에 자리한 어떤 사건, 지우고 싶은 순간의 기억, 이런 생각들이 튕겨 나와서 쓰지 못하는 시간들. 그것이 상처라면 더욱 그렇다. 상처, 트라우마, 일반적이지 않은 일상에 대해서 끄집어 낼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들을 함께 읽어주고 공감할 이들이 필요하다. 저자는 그런 글쓰기의 필요성에 대해 말한다. 잘 쓰는 글이 아니라 아름답고 예쁜 글이 아니라 나를 기록하는 글 말이다. 나만이 쓸 수 있는 나의 글 말이다.

 

우리는 오늘도 기록하며 적극적으로 내가 되어간다. 타인의 글을 읽으면서 적극적으로 각자가 자기 자신이 되는 과정을 지지하면서. (84쪽)

저자가 부모의 이혼을 경험했고 학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생활했고 비혼 주의자로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것에 대한 글이 그러하듯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은 나의 일부이며 나의 전부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지난 시간이 부끄럽고 잘못된 게 아니라는 인식을 시작으로 당당하게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 그것이 글이라는 걸 알기에. 그래서 나는 더욱 쓰고 싶다. 아직 말하지 못한 나에 대해서. 나와 닮은 글을 쓰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글쓰기에 대한 책이 아닌 나를 발견하는 방법에 대한 책이 아닐까 싶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들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들고 나의 내부에서 자라는 그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보게 한다. 은밀한 욕망일 수도 있고 때로 세상을 향한 작은 외침일 수도 있다.

 

저자와 함께 글을 쓰고 서로의 글을 읽고 조언을 하는 이들의 단단한 연대가 부럽다. 한 번도 그런 모임에 참여한 적이 없기에. 동생과 엄마와 저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글을 쓰는 부분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엄마와 동생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쓰는 존재로 인정하고 인정받는 기쁨이랄까. 저자의 말대로 그들의 삶이 입체적으로 변화하는 순간이라 느껴졌다. 강연을 하고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더욱 자신의 글쓰기에 필요한 확신과 그것을 위한 다짐을 하는 결연한 의지가 전해진다.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쓰는 사람으로 지녀야 할 태도를 생각한다.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대변할 수 없는 내 위치의 한계 알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대하려는 노력을 버리지 않기.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고통을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기. 쓸 수 없는 말을 쓰기. (141쪽)

나는 쓴다. 아직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에 대해서는 쓸 수 없지만 쓴다. 그러나 내가 써야만 하는 문장이 있다는 걸 믿는다. 나를 온전히 보여주는 글이라는 거울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조심스럽게 그 거울을 꺼내어 아주 오래 바라볼 날을 꿈꾼다. 그리하여 언젠가 나의 글이 영롱한 빛을 발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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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0-02-27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쓸 수 없는 말을 쓰기, 라는 문구가 들어오네요. 쓰기에 대한 생각과 회의와 기쁨 그리고 원점과 출발지를 생각해 보게 되는 이른 봄밤이에요. 자목련 님 건강히 ^^

자목련 2020-03-02 15:42   좋아요 0 | URL
네, 무엇을 쓰고 싶은지, 그것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해요. 3월, 생기있게 시작해요^^

공쟝쟝 2020-02-27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의 말하지 못한 글을 기다리고 있을 게요. 책 참 좋지요? 저도 엄마와 동생과 같이 글쓰는 부분에서 울컥 했어요. 저자는 용기 있는 사람 같아요. 그 용기에는 못미치더라도 조금씩 써나가요~~^^

자목련 2020-03-02 15:41   좋아요 1 | URL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 참 좋으네요. 조금씩 써나가는 일, 그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공쟝쟝 님, 코로나로 힘든 시기지만 이 오후 환한 봄빛을 즐겨요!!
 
호텔 창문 - 2019 제13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편혜영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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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혼자서 척척해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삶 말이다. 독립적으로 살고 싶었다고 할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적지 않은 이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 그들에게 항상 고맙고 미안하다. 빚진 삶이라고 할까. 언젠가 그 빚을 갚아야지 생각하면서도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 누구나 살면서 나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에 붙잡혀 살고 있다면 어떨까?

 

『제13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수상작인 편혜영의 「호텔 창문」속 화자는 그런 시달림에 힘들다. 그건 죄의식이었다. 여름 날 강물에 빠진 자신을 구하고 대신 죽은 사촌 형에 대한 마음이었다. 자신을 구하고 죽은 사촌 형은 의사자 지정을 받았다. 희생정신이 있거나 모범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죽음은 그런 결과를 만들었다. 살아남은 게 죄일까. 사촌 형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과연 나에게 있는 것일까. 사고였고 어쩔 수 없는 일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원망할 대상을 찾는다. 수습이나 대책이 아니라 화와 분노를 쏟아낼 단 한 사람. 소설 속 화자에게 그 사건은 평생 자신을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된다. 그 사건을 아는 이들이 화자를 대하는 태도는 과연 정당한가.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오롯이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냐고 소설은 묻고 있다.

 

자라면서 운오는 누구 덕에 살아났는지 자주 상기했다. 큰어머니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놓치지 않고 말했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들뜨지 않는 것처럼 자신이 오래전에 죽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도 별 감흥이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람만 누리는 이런 무덤덤함을 큰어머니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28~29쪽)

수상작인 「호텔 창문」외에 6편은 일상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특히 기억에 남는 단편은 이주란의 「한 사람을 위한 마음」과 최은미의 「보내는 이」와 동성 연인과 자신과의 사이를 돌아보는 김혜진의 「자정 무렵」이었다. 존경하는 선생님이 어린 남자와 사랑에 빠져 이혼을 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김금희의 「기괴의 탄생」, 폭력과 폭행에서 안전할 수 없는 여성의 미래를 그린 조남주의 「여자아이는 자라서」, 김사과가 만든 인물의 독특한 세계관을 만날 수 있었던 「예술가와 그의 보헤미안 친구」도 흥미로웠다. 이주란의 단편집에서 만났지만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은 두 번 읽어도 좋았다. 하루의 일과를 담담하게 이어가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그 안에서 발견하는 사소한 것들이 주는 기쁨을 위대하게 다가왔다. 우리가 놓치고 사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사회가 규정해놓은 관계가 아닌 다른 관계에 대해 지속적으로 의견을 제시하는 김혜진의 시선이 점점 더 날카롭다.

아이들로 인해 친해진 엄마들의 관계가 조금씩 틀어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최은미의 「보내는 이」는 가장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거의 매일같이 함께 커피를 마시고 음식을 나누며 모든 걸 공유한다고 여겼는데 상대는 그런 마음이 아니었다면 어떨까. 막역한 사이라 믿었는데 어느 순간 거리를 두고 결국엔 아무런 인사 없이 이사를 가버린다면 서운한 마음보다 그동안에 보냈던 시간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하고 뭔가 잘못한 게 있는지 스스로를 자책할지도 모른다. 필요에 의해 맺어진 관계의 속성일까.

 

인생엔 예측할 수 없는 돌발 상황이 생긴다.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 때로 우리는 소설을 통해 그런 상황을 점검하고 대비한다. 감정을 다스리는 노력을 하고 어떤 일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연습하고 짐작으로 결과를 예측하지 말라는 조언 같다고나 할까. 여전히 삶은 어렵고 세상엔 내가 모르는 일들이 많다는 당연한 사실을 잊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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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 장혜령 소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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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이야기이자 모두에게 말하고 싶은 그것이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시작하면 끝을 맺을 수 있을까. 누가 하찮은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줄까 고민하고 고민한다. 누군가는 그런 상대가 단 한 사람이라도 존재한다면 쓸 수 있다고 말한다.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면서도 주저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 글을 쓰려고 하는가. 내 안에 갇힌 이야기는 진짜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장혜령의 『진주』도 그런 마음이 쌓여서 시작된 건 아닐까.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을 한 아버지의 부재를 경험하면서 느꼈을 상처와 슬픔, ‘훌륭한 아버지’라고 말하면서도 그것이 진정 무엇인지 설명하지 하지 않았던 선생님과 어른들. 그리고 묵묵히 삶을 견디며 딸을 키우는 어머니. 이제는 역사의 한 장면으로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진짜 삶이었던 어린 소녀가 자라 들려주는 나직한 목소리로 가만히 들려주는 소설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 소설을 쉽게 읽을 수가 없었다. 소설의 형식이나 구성 때문이 아니었다. 화자인 ‘나’ 와 다른 시대와 다른 공간에 거주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분명 다른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불편하고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나의 주변에도 분명 존재했을 수많은 어린 ‘나’와 그의 가족들의 존재를 나는 모르고 있었다. 알았더라도 소설 속 아이들처럼 ‘너는 왜 아빠가 없냐’고 묻는 아이들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여전히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세상과 불화하는 이들이 여전한 지금도 다르지 않기에 더욱 그랬다. 부재로 존재하는 아버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나’에게 가능했을까. 소설에 등장하는 화자의 일기, 그러니까 작가 장혜령의 일기에는 아빠에 대한 걱정과 동시에 어린 소녀가 느꼈을 불안이 고스란히 담겼다. 잠들 때 엄마 손을 꼭 잡고 자자고 말하는 ‘나’의 간절함이 전해진다. 그러나 대답은 그러하겠다고 말하면서도 생계를 위해 너무도 할 일이 많은 엄마는 아침이면 깨끗한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이미 일을 하고 있다.

 

‘나’의 기억으로 시작했을 이야기. 기억은 얼마나 정확한가. 그 많은 일기들과 그림, 사진을 간직했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아이스크림을 사 오라며 돈을 건넨 사복 경찰과의 만남, 가게를 나오는 소녀의 등 뒤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동네 아줌마들,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들의 가족들과 지냈던 안산에서의 기억, 아버지가 부재한 이들이 함께 명절을 지내며 서로를 위로하던 날들, 언제부터 소녀는 나만의 이야기를 쓰고 있었던 것일까.

80년대 민주화운동의 현장에 있었던 아버지. 집이 아닌 거리에 있었고 경찰을 피해 다니고 결국엔 감옥에서 지냈던 아버지. 시간이 흘러 아버지는 돌아왔고 아버지가 감옥에서 삶을 견디는 동안 아버지의 동료들 가운데 우리가 알만한 누군가는 교수가 되고 정치인이 되고 사업가로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간다. 마치 과거에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아버지의 선택은 잘못된 것이었을까. 그 기준은 누가 세우는가. 돌아온 아버지도 생의 현장에 적응하려 노력한다. 대학 졸업장 대신 전과자가 된 아버지는 남들처럼 회사에 다닐 수 없다. 친구나 지인의 소개로 들어간 회사에서도 여전히 주변을 돌아보고 뒤를 돌아본다. 부당한 대우, 체불된 임금, 열악한 노동환경. 그것들을 묵과할 수가 없다. 다시 그렇게 아버지는 방 안으로 돌아와 식물처럼 조용히 지낸다. 그러나 딸에게는 자전거를 가르치며 돌아보지 말라고 공집합을 이해하지 못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어쩌면 아버지는 자신의 딸이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랐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어둡고 무서운 곳인데 자전거 타는 작은 일부터 두려워한다면 살아갈 수 없다고(12쪽)’ , ‘돌아보지 말아라. 자전거를 타고 앞으로 나아갈 때는, 자신이 나아갈 방향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라고(100쪽)’ 말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딸은 짐작할 뿐이다.

아버지가 앞으로 나가는 대신 돌아본 세상엔 보통의 우리가 있었다. 기간제, 계약직, 임시직의 우리들 말이다. 시대가 바뀌고 정권이 바뀌어도 여전하게 지속되는 고단한 삶. 소설 속 아버지는 여전히 거리에서 투쟁하고 단식하고 언론에 등장한다. 과거의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당장 자기가 사는 시대가 바뀌지 않더라도 지금의 어린이들이 어른이 된 미래에는, 자신들이 꿈꾸던 세계가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178쪽)’ 모두에게 괜찮은 세상, 악의보다는 선의가 가득한 세상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려 한다. 그러므로 소설은 ‘나’처럼 아버지의 부재가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된 어린아이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역사 속 저편에 기록으로 남은 민주화운동과 노동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고 살아내는 이들에게 『진주』는 소설이 아닌 그들의 기록이자 일상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욱 부끄럽고 불편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가 더듬어가는 기억 속 반려견과 보내는 잔잔한 일상과 진주의 풍경에서 어떤 평안과 평화를 느낀다. 참으로 이상한 감정이다. 아버지가 옥살이를 하던 도시 ‘진주’를 가기 위해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멀미를 했던 열 살의 ‘나’는 아버지와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서른둘의 나이에 다시 그 진주를 찾는다. 엄마와 함께 짧은 면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먹었던 국수, 진주의 볼거리와 먹거리를 소개하는 이들의 말투와 표정, 일요일에는 면회를 하지 않는다는 것, 아득한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다.

모든 것은 이야기가 될 수 있고 때로 그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힘으로 응집된다. 장혜령의 『진주』는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당사자인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남편을 믿고 기다리고 지원하는 아내와 그의 딸이 살아낸 시간의 기록이라 더욱 남다르게 다가온다. 누구도 대신 채울 수 없던 아버지의 자리, 부재로 자신을 증명하던 아버지를 세상에 공개한 것이다. 그렇게 작가 장혜령이 혼자만 간직했던 이야기의 타래가 술술 풀려서 나에게 닿는 순간의 감정을 나는 오래 기억하고 싶다. 소설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흘러가는지 지켜볼 것이다. 구르고 굴러 커진 소설의 힘이 닿는 그곳이 어디인지도 말이다. 이제 『진주』를 만나는 모든 이들은 스스로가 하나의 운동장이 될 것이며 그곳에서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 자전거를 타면서 주저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마음을 응원할 것이다. 그가 뒤돌아보면 손을 흔들고, 넘어지면 달려가 일으켜주고. 마침내 그가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즐거움과 소소한 풍경이 주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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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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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으면서 작가의 경험에 의한 이야기가 아닐까 궁금할 때가 있다. 소설이라는 것이 허구의 세계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다. 현실처럼 너무 완벽할 때, 경험치가 없다면 알 수 없는 구체적인 장면을 마주할 때 그런 생각을 한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정 부분 작가나 지인의 경험이 소설에 녹아들었을 것이다. 소설이란 게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낯선 세계를 그리는 건 아니니까. 요즘엔 SF 소설을 읽으면서도 그런 느낌을 종종 받는다. 그래서 소설과 현실을 구분하는 일이 무의미할 정도다.

 

한 권의 소설을 읽는 일은 그저 재밌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소설을 읽는 일은 세상을 읽는 일이 되었고 시대를 바라보는 시선이 되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사유가 그곳에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독자는 소설을 통해 세상과 접속하고 소통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를 생각할 때 고 박완서 작가는 소설은 그런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나는 작가의 소설을 전부 읽지는 못했다. 겨우 몇 권 읽었고 곁에 두었다. 나는 알 수 없는 시대의 풍경과 그것을 살아내는 이들의 마음을 소설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 내가 만나지 못한 글들을『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로 만난다. 자신이 쓴 소설과 산문, 동화, 여행기를 소개하는 글이다. 때로 아쉽고 안타까운 심정을 솔직하게 들려준다. 글을 쓸 때의 상황과 출판 당시의 복잡한 마음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다.

제목만으로도 소설과 산문집은 익숙한데 동화집은 잘 몰랐다. 67편의 작가의 말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이 책을 통해서야 이렇게 많은 글을 쓰고 책으로 냈다는 걸 알았다. 작가에게 글을 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그의 글을 읽고 기다리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 작가의 말은 뭔가 사적인 영역에 초대받은 기분이다. 한 권의 소설을 압축하여 들려줄 때도 있고 개인적인 일상을 소개할 때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 책은 평범하면서도 소중한 기분을 안겨준다. 정확하게 그 형체를 설명할 수 없지만 말이다.

마흔이라는 나이에 등단을 하고 책을 내는 일이 작가에게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겠지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꾸준하게 글을 쓰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면서도 글이 도무지 안 써지고 절망스러운 때에 『나목』을 펴보는 버릇이 있다는 작가의 말은 첫 소설에 대한 깊은 애정과 함께 어떤 고단함이 전해졌다. 그런가 하면 이런 글은 지금 문학에 속한 이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지 않을까 싶다. 끊임없이 쓰고 고치고 또 써야 하는 작가에게 힘을 내라고 응원하는 듯하다. 어디 문학뿐일까. 누구나 살면서 절망하고 한계를 느끼는 순간에도 자신을 다잡을 수 있는 글로 다가온다.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억누르는 온갖 드러난 힘과 드러나지 않은 음모와의 싸움은 문학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의 싸움을 걸 상대의 힘이 터무니없이 커졌을 때라든가 종잡을 수없이 간교해졌을 때도 그런 싸움을 중단하거나 후퇴시켰던 적은 없고, 그럼으로써 문학한다는 게 본인이게만 보이는 훈장처럼 스스로 자랑스러울 수 있지 않나 싶다. 52쪽, 『살아 있는 날의 시작』발문에서

전쟁이라는 시대의 수난을 온몸으로 경험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일상을 담담하게 전하는 작가의 산문을 읽으면서 편안하고 포근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흙을 만지고 손자의 밥을 챙기고 계절의 기록하는 일상들. 선명하지 기억을 소설로 복원해 꼭 세상에 내놓고 싶었던 소망, 그런 작고 소소한 모든 것들은 작가의 말을 통해서만 전달된다. 어쩌면 독자가 원하는 건 문학평론가의 어려운 해설이 아닌 허심탄회하게 내뱉는 그런 말들이 아닐까 싶다. 출판사를 바꾸어 낸 소설과 개정 보정판을 내면서 자신의 소설을 읽고 지난 시절을 가만히 떠올렸을 그를 상상해본다.

 

한때는 글의 힘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을 것처럼 치열하게 산 적도 있었나 본데 이제 와 생각하니 겨우 문틈으로 엿본 한정된 세상을 증언했을 뿐이라는 걸 알겠다. 138쪽, 『그 여자네 집』서문에서

한 권의 책을 시작할 때 만나는 작가의 말은 책에 대한 기대를 안겨주고 마지막에 만나는 그것은 짙은 여운을 남긴다. 한 평생 쓴 책들의 시작과 끝을 모아 이렇게 책을 낼 수 있다는 기쁨을 독자인 우리만 누려서 안타깝다. 고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연대순으로 정리하고 표지를 정리해 한눈에 볼 수 있는 즐거움도 안겨주는 책이다. 자신의 책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일이 작가의 말이라고 한다면 정성을 들이지 않은 책이 어디 있을까 싶다. 그래도 67편의 말 중에서 지금 소개하고 싶은 걸 하나만 꼽자면 『살아 있는 날의 소망』의 서문이다.

우리가 아직은 악보다는 선을 믿고 우리를 싣고 사는 역사의 흐름이 결국은 같은 방향으로 흐를 것을 믿을 수 있는 것도 이 세상 악을 한꺼번에 처치할 것 같은 소리 높은 목청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소리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선, 무의식적인 믿음의 교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89쪽, 『살아 있는 날의 소망』책머리에서

 

문학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도 같다고 생각한다. 문학으로 이어진 우리가 공감하고 연대하는 순간 세상은 좀 더 선한 쪽으로 흘러가 단단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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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02-05 0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책 앞과 뒤에 담긴 글만 모아서 책 한권을 만들다니, 그것도 괜찮네요 저는 동화 예전에 만났어요 보기는 했지만 다 잊어버렸군요 예전에 전쟁이 배경인 소설을 보면서 한 사람 이름이 자꾸 나오는구나 하면서 본 게 생각나네요 이제는 그런 게 연작소설이라는 걸 알고, 박완서 님 경험이 담겼다는 걸 아는군요 그때는 거의 몰랐습니다 소설에 자기 경험을 많이 쓰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요 그렇다 해도 그걸 보고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도 하는군요


희선

자목련 2020-02-06 09:40   좋아요 1 | URL
희선 님은 동화를 만나셨군요. 저는 소설과 산문만 만나서 동화를 많이 쓰신 줄 몰랐어요. 말씀처럼 작가의 말로만 엮인 구성도 흥미로웠어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심난한 일상입니다. 희선 님, 건강 잘 챙기세요^^
 
사랑의 잔상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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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로로 작가 장혜령을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그녀의 글을 읽었고 종종 장혜령 시인을 검색해보았다. 시인의 첫 시집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그런데 내가 마주한 그녀의 글은 시가 아닌 산문이었다. 그것도 사랑에 관한 이미지들. 내 안에 간직된 사랑의 이미지는 너무도 흐릿하고 나는 그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에 내가 원하는 글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의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그녀가 말하는 사랑은 삶이며 글이었고 고독이었으며 열망이었다.


그저 쓰고 고친 것들, 사랑에 대해 쓰기 시작했지만 막상 마침표를 찍고 읽었을 때에는 사랑이 아니었을지도 모를 것들은 아닐까, 내게는 그런 느낌으로 다가왔다. 모든 글이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향한 기억과 몸짓이라 해도 맞았고, 기억해야 하는 순간을 기록함으로 간직하는 당연한 수순 같다고 할까. 하지만 그 안에 서린 어둡고 추운 절망의 기운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쓰고자 했으나 쓸 수 없고 쓰고 있지만 만족하지 않았고 자꾸만 길을 잃은 것 같은 두려움이 전해졌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쓰는 걸 멈추지 않았고 보통의 날에 마주한 이들의 사랑을 포착했다. 그 사랑의 아픔을 목격하고 때로 미래를 예측한다. 때로는 사랑이 온 줄도 모르고 떠난 뒤에야 발견하기도 했다.

그녀의 글은 사랑을 꺼내기에 충분하다. 사랑으로 인해 눈부셨던 과거의 순간, 사랑이 전해준 고통과 상실에 대해 아파했던 밤들이 펼쳐지는 건 당연하다. 그러다 다른 선택과 결정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미련한 상상하기 하고 만다. 처음 사랑이라고 맹신했던 나의 몸짓이 선명한 사진처럼 내게 달려든다. 그러니 이런 문장을 만났을 때 반갑고 신기하면서도 씁쓸했다. 아무렇지 않는 문자 하나에 설레던 일, 문자 하나에 수많은 의미를 부여하던 시절이 떠올랐기에. 아직 폐기하지 못한 연인의 편지를 읽는 것만 같았다.

안부를 묻는 일.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 똑똑, 문을 두드리고 세계로의 진입을 간청하는 일. (62쪽)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은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다. 사랑하는 사람, 그는 사랑받는 사람이 자기 안의 사랑을 일깨우는 역할일 뿐임을 아는 사람이다. 무수한 사랑과 이별 끝에도 자기 내면에 결코 사라지거나 부서지지 않는 것이 있음을 아는 사람이다. (67쪽)

시나 소설과는 다르게 산문에서는 작가의 숨결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 나만의 언어로 전하고 싶은 욕망, 세상과 닿고 싶은 간절함이 보인다고 할까. 화려하게 꾸미지 않았지만 수없이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는 걸 안다. 하나의 이미지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글로 쓴다는 건 쉬운 게 아니니까. 불투명한 희망을 보고 글을 쓴다는 건 고통이다. 아니다, 쓴다는 게 희망일 수도 있다. 그녀가 오랜 시간 쓴 글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왔지만 사랑이 아니라 그녀 본연의 모습은 아닐까. 그녀가 쓴 글을 통해 우리는 그녀를 만난다. 그녀가 본 영화와 그림을 상상하고 그녀가 찍은 사진을 통해 그녀의 일부를 인식한다. 그리고 기억 저편에서 걸어오는 나를 만난다. 낯선 사람과 친구가 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던 삶을 생각한다. 같은 방에서 잠이 들고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는 지금 서로를 기억할까. 세상의 끝에 서 있는 것 같았던 시절, 고요만이 나를 어루만지던 시절과 포옹한다. 이제는 가만히 등을 두드리며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내가 되었다는 말을 들려준다. 

 

낯선 사람과 한방을 쓰고, 또 다른 방으로 옮겨가며 이 삶을 어디까지 전진시킬 수 있을까. 우리가 살았던 방들을 연결하면 그건 얼마나 긴 길이일까. (81쪽)

사각의 방 한 모서리에 우두커니 웅크려앉아 있던 적이 있었다. 오후 두시의 햇빛이 얼굴에 쏟아질 때까지 엎드려 잠을 잔 적이 있다. 빛 외에는 아무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이 시간에 따라 기울어지고 방을 가득 채웠다가 이윽고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125쪽)

그런 시절을 통과했고 여러 사랑을 지나왔다. 사랑이 끝났다고 선언했지만 다른 사랑이 존재한다는 걸 우리는 이제 안다. 어쩌면 이런 글을 통해 그런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저마다의 사랑이 품었던 빛과 향기를 우리는 잊고 살아왔다고. 끊임없이 사랑을 원하고 말하지만 사랑은 여전히 어렵다. 안다고 믿었지만 점점 더 멀어지는 심연처럼,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는 제대로 볼 수 없는 당신의 표정처럼. 온통 사랑을 쓰고 말하고 외치고 쏟아내는 세상에서 사랑하며 사는 삶은 더욱 고단한 일이다.

이 세상에는 인간인 내가 끝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결코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사랑이 있으며, 당신이 있으며, 운명이 있다. 그러므로 비밀로 남겨둬야 하는 것이 있다. 다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은 비밀을 지킴으로써 당신이 내 안에 머물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다. 어쩌면 씁쓸하겠지만, 내가 결코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다. (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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